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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명 |
편찬자 |
편찬연대 |
열전 항목 |
비고 |
사기 |
사마천 |
한 무제 시 |
* 刺客열전, 循吏열전, 儒林열전, 酷吏열전, 遊俠열전, 侫倖열전, 滑稽열전 日者열전, 貨殖열전 |
각전에 서문, 말미에 사론을 씀 |
한서 |
반고 |
후한 광무제 시 |
儒林전, 循吏전 酷吏전, 貨殖전, 遊俠전, 佞倖전, 外戚전 |
각열전 서문을 씀 |
후한서 |
범엽 |
晉 424년경 |
黨錮열전 循吏열전, 酷吏열전 宦者열전, 儒林열전 文苑열전, 獨行열전 方術열전, 逸民열전, 烈女전 |
문원열전에만 서문 없음 모두 맨뒤에 贊 |
魏書 |
魏收(505-572) |
皇后, *, 外戚 儒林, 文苑, 孝感(感通鳥獸), 節義, 良吏, 酷吏, 逸士, 術藝, 烈女, 恩倖, 嚴宮, |
양리전은 순리전의 명칭변경임 | |
晉書 |
방현령 |
644 |
后妃, 宗室, *, 孝友, 忠義 良吏, 儒林, 文苑, 外戚. 隱逸, 藝術, 烈女, 叛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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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서 |
李百藥(565-648) |
*, 儒林, 文苑, 循吏, 酷吏 外戚, 方技, 恩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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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 |
沈約 |
후비, 종실, 효의, 양리, 은일, 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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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 |
姚思兼(?-637) |
636 |
황후, 태자, *, 종실, 효행, 유림, 문학, 처사, 止足, 양리, |
#진서, 송서의 지족전을 언급. |
陳書 |
姚思兼(?-637) |
황후,종실, (*제신), 효행, 유림,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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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 |
李延壽 |
황후, 종실,(*) 외척, 유림, 문원, 효행, 절의, 순리, 혹리, 은일, 예술, 열녀, 은행, 참위, 附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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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
636 |
후비, (*), 誠節, 효의, 순리, 혹리 유림, 문학, 은일, 예술, 외척, 열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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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
후비,종실,왕자, (*)외척, 환관,양리 ,혹리,충의,효우,유학,문원,方伎,은일 열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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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
1044-1060 |
후비,종실,諸帝公主,(*),충의, 탁행, 효우,은일,循吏,유학,문예,方技, 열녀,외척,宦者,혹리, 번진. |
각전에 서문을 씀 | |
구오대사 |
후비, 종실, 세습열전, 참위열전 |
사서명 |
편찬자 |
편찬연대 |
열전항목 |
비고 |
신오대사 |
梁家人傳, 당가인전, *, 양 臣傳 , *당 신전, 死事傳, 死節傳, 義兒傳,伶官傳, 환자전. 雜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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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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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 |
후비, 시조이하 제자 , 태조제자, 世戚, 충의, 문예, 효우, 은일, 순리, 혹리, 영행, 열녀, 환자, 방기, 역신, 반신 |
세척이하의 전에 모두 서문을 씀 | ||
송사 |
1345 |
후비, 종실 (*)별전, 순리. 도학, 유림, 충의, 효의, 은일, 탁행, 열녀. 방기, 외척, 환자, 영행, 간신, 반신, 세가, |
도학, 간신 열전에 새로이 설정됨 | |
원사 |
1369 |
(후비, (종실). (제신전), 별전, 유학,양리. 충의, 효우, 은일, 열녀, 석노, 방기, 환자, 간신, 반신, 역신 |
석노전이 새로이 추가 이는 도학전의 대치 | |
삼국사기 |
1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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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1449 |
후비,종실, 공주, (제신전), 양리, 충의, 효우, 열녀, 方技, 환자, 폐행, 간신, 반역 |
삼국사기에서는 10권의 열전 내용을 구분해 그 명칭을 붙이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묶어져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열전 중 유신전(3권), 을지문덕전 이하 온달전까지를 다룬 열전 4권, 5권까지를 명신전이라 할 수 있고, 제6권은 문장가로 강수 이하를 다루었다. 이는 구당서의 문원전(文苑傳), 신당서의 문예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열전 권7에는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신라의 화랑과 계백까지를 다루었는데 이는 신구당서의 충의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열전 권8은 향덕, 성각등의 효행과 의리를 지킨 사람, 음악가. 화가 서예가 열녀인 설씨녀와 도미전으로 이는 신구당서의 효우전, 방기전, 열녀전이 협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9는 역신(逆臣)전인 창조리전과 개소문전이고, 마지막 권 10은 궁예와 견훤을 다룬 반신전(叛臣)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중국의 정사체 열전과 비교한다면 후비와 종실, 공주 열전이 없다. 이는 왕실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이해될 수 도 있다. 이는 삼국사기 찬자의 역사의식의 반영으로도 볼 수 있다. 후비, 종실, 공주열전이 혈통에 기반을 둔 신분의 세습이라는 뜻이 강한데 비하여 삼국사기 열전은 개인의 업적에 치중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김부식이 자신의 능력으로 재상의 직위에까지 오른 것과 연관된다. 또한 이는 한국 고대사회가 종실인 왕의 형제들이 정권을 주도했던 점에서 그들의 활동이 본기에 많이 서술되어 당나라 상황과는 다른 골품제사회였던 점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본전 52명에 부수전이 34명이 된다는 점은 개인의 혈연적 의식의 반영으로 이는 대단히 중시되었다고 할 수 이다. 이는 친족적인 요소보다도 조부의 혈연관계를 무시할 수 없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혈연적 후손을 붙임전으로 서술한 예는 김유신의 경우 두 명의 아들(삼광과 원술) 두 명의 손자(윤중과 윤문), 현손 김암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경우 세명의 아들과 손자 헌성을 붙임으로 썼고, 견훤의 경우, 네명의 아들과 사위 박영규를 붙이고 있다. 김령윤전의 할아버지 흠춘과 아버지 반굴을 붙인 것도 혈연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구삼국사와 달라진 특징은 첫째 궁예와 견훤을 하나의 열전으로 반신전으로 기술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들의 전기는 구삼국사에는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자로 견훤은 백제의 부흥자로 본기에 실렀을 가능성이 짙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신라사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궁예와 견훤을 신라의 반역자로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의 특징은 김유신의 열전을 열전의 첫머리에 실었을 뿐만 아니라 3권을 차지할 정도로 상세히 다루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에는 김유신에 대한 김부식의 사론을 썼다. 이에서 그의 삼국통일의 의지, 그리고 전쟁에 전력한 그의 노고를 칭찬하고 이는 왕실에서 임용하여 전적으로 그를 신임하였기 때문이며 그의 명성은 전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임을 밝혔다. 이처럼 그의 전기를 3권으로 다룬 것은 김유신의 삼국통일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였고, 김유신의 기록인 10권의 김유신행록이라는 자료를 특별히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전쟁인 통일전쟁에서 죽은 화랑과 장수들을 다룬 권7의 인물의 설정도 통일전쟁을 부각시키려한 의도의 반영일 것으로 이해한다.
열전에 실린 52명을 국적별로 구분해보면 신라인 41명, 고구려인 8명, 백제인, 3명으로 압도적으로 신라인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을지문덕, 명림답부, 을파소, 밀우와유유전은 본기에 실린 자료를 열전에 다시 서술한 것이다. 즉 본기에 실린기록과 열전의 차이가 거의 없다. 오직 온달전과 연개소문전이 본기자료와 다른 자료를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인이 열전의 주류를 차지하는 이유는 신라 측의 화랑세기 등의 자료와 전승국의 자료보존이 망한 나라에 비해 유리했던 점을 들 수 있고, 또 기간이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는 점 이외에 신라가 삼국의 중심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그러므로 통일 이전과 이후의 인물로 대비하면 통일 이후의 인물이 9명이고 이전의 인물이 45명이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통일 전쟁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열전을 통해서도 통일전쟁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인은 흑치상지, 계백, 도미 세람만이 열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열전에 오른 인물을 성씨별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씨: 김유신, 김인문, 김양, 김령윤, 김후직 김흠운, 김생 : 7명
박씨: 박제상 1명
석씨: 석우로 1명
설씨: 설총, 설계두, 설씨녀 3명
최씨: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3명
장씨: 장보고(정년)
우리나라 성씨는 당나라와 교섭을 하면서 가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삼국시대 초기에 신라의 육부에 6성을 사성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고 이는 고려 초기의 기록을 끌어올려 쓴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박석김 씨의 3성이 왕위를 교체하였다는 근거도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금석문을 통해서도 삼국시대에 성을 가진 사람은 신라인 중 통일 후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전의 제목에 오른 인물 52명이나 혈손이 아닌 사람으로 부수전으로 표기했지만 독자적 열전을 서술한 사람은 55명이다. 신형식은 개인기록을 가진 사람을 69명으로 파악했지만 55명을 신분별로 구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분은 왕족, 귀족, 평민, 천민(노비)로 구분해본다.
왕족: 거칠부(나물왕의 5대손), 이사부(나물왕의 4대손), 김인문(태종의 둘째아들), 김양(태종의 9세손), 사다함(나물왕의 7대손), 김후직(지증왕의 증손), 석우로(나해왕의 아들), 박제상(파사이사금의 5세손), 궁예: 9명
귀족: 김유신, 흑치상지(백제서부사람), 을파소, 녹진, 밀우와 유유(東部人), 명림답부, 귀산(사량부인) 온달, 강수, 최치원, 설총, (최승우, 최언위, 김대문), 해론, 눌최, 김령윤, 관창. 김흠운(나물왕8세손), 필부, 계백, 창조리, 연개소문 :24명
평민: 장보고, 소나, 취도(사량인),열기, 비령자, 죽죽(합천인), 향덕, 성각(진주인), 실혜, 물계자, 백결, 검군, 김생, 솔거, 효녀지은(백성연권의 딸) 설씨녀, 도미, 견훤 18명
천민:
미상: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는자: 을지문덕, 거도(干): 2명
** 삼국사기 열전을 통해 고대국가의 신분제의 특성은 첫째 왕족이 고위관직을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왕의 친족이 벼슬에서 제외된 것은 고려왕조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려왕조에서는 왕족의 후예는 공후백자남의 봉군을 통해 우대해주는 대신 정치의 일선에서는 제외되어 문무양반제의 관료는 이성 귀족이었다. 이는 신라의 골품제를 개혁함에 큰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통치의 수단이 왕정 하에서 귀족제의 확립이라는 시대를 연 것이다. 고대의 대부분의 귀족이 왕족의 후손이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니다. 이런 고대에서 김부식이 열전에 올린 인물은 종실, 공주, 후비전을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삼국사기 열전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족내혼을 유지하던 고대의 속성을 양반간료제의 국가운영의 경험을 가진 김부식의 역사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열전의 명칭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유사한 사람을 묶어 서술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붙임조의 부수전은 정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설총 다음에 최승우, 최언위 김대문을 제목에서 붙임조로 넣은 것은 잘못이다. 이름만 전하는 문학자의 이름을 열기한 박인범, 원걸, 거인, 김경운 김수훈은 전기를 세우지 못한다고 것과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 열전의 자료적 성격
열전을 통하여 신라가 어떻게 삼국통일을이룩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유신열전은 그 중 삼한일통의 집념을 가지고 이를 일생동안 실현시키려고 노력한 인물임을 서술하고 있다. 이에는 태종무열왕과의 협력, 문무왕과의 협력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통일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화랑들의 전기도 이에 속한다. 그뿐만 아니라 열전과 본기 기사를 함께 이용하면 신라에서 전사자에 대한 국가적 포상정책이 150년간 지속적으로 취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와 다른 점이다. 이런 전사자의 포상정책이 전쟁에서 생명을 바쳐 싸우게 하는 배경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화랑제도도 한몫을 했다.
이처럼 열전에서도 본기와 지와 함께 신라 중심적인 삼국시대사의 서술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열전에는 본기에서 보이지 않는 대왕의 칭호, 연호의 사용 등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대표기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열전은 본기에 이용하지 않은 김유신 행록 10권, 김대문의 화랑세기, 및 설화자료인 도미와 온달의 이야기 등, 중국의 두목의 번천집 자료는 김부식이 새로이 이용한 중요한 열전 자료이다. 그러나 열전은 삼국의 통일기를 전후한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일찍이 골품제도에 불만을 가지고 신라를 탈출하려한 설계두의 이야기와 비록 열전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진평왕 9년조의 대세와 구칠은 해외로 탈출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김부식의 열전에는 예술가 효녀 등도 다루었지만 고대의 다양한 인간상을 충분히 잘 그렸다고 평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다양한 인간을 다룰 만한 자료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으며, 또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역사활동에 나섰다고 볼 수도 없다. 이에는 자료적 성격이외에도 편찬자 김부식의 국가관, 유교적 역사관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역사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글에 김부식이 직접 쓴 사론이 있다. 열전에는 김유신전, 을지문덕전, 장보고전, 연개소문전, 궁예와 견훤전에 5편의 글이 전하고 있다. 김유신전의 사론은 삼한일통을 이룩한 점을 강조했고, 을지문덕전의 사론은 그의 뛰어난 전술전략이 나라를 지켰다는 점을, 장보고전의 사론은 당나라 두목의 사론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정년과의 우정과 반감을 국가를 위해서 용서한 점, 연개소문전에 대한 사론에서는 그가 비상이라는 점, 남생과 헌성은 고구려에서 보면 반역자라는 점, 궁에와 견훤전에서는 고려태조에게 백성을 몰아다 준 점을 강조했다. 특히 장보고 전은 구삼국사에 전하던 열전자료는 신라본기에 궁복의 자료로 남겨두고 열전의 기술 및 사론까지고 당나라 문인 두목(杜牧)의 번천집 자료를 새로이 활용하였다.
4. 열전의 백미
삼국사기 중 열전 중 인기는 시대마다 달랐다. 조선시대 이래 고문체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부분은 온달전과 김유신전, 설씨녀전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사학자에 의하여는 화랑의 전기가 소중하게 여겨졌고, 한 인물인 계백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서로 상반된 역사가의 평이 내려지기도 했다.
권근은 조선 태조 태조대에 편찬한 “동국사략”에서 계백이 가족을 먼저 살해하고 전쟁에 나간 것은 인도주의 관점에서 패륜이라고 평했다. 즉 첫째 不道요, 狂悖라고 평했다. 이에 반하여 “동국통감”의 찬자는 계백이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했고, 아내와 자식이 더럽힘을 당할 것이 뻔하였으므로 충의를 다했다고 평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학자로 자신을 칭한 안정복은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사람의 도를 온전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인륜을 키켰다고 평하고 그가, 據險設營 智也 , 臨戰誓衆 信也, 四戰克之 勇也 擒官昌而 不殺은 仁也 再擒而 殺之 復還其屍 義也 衆寡不敵 終能一死 忠也라고 하여 인의와 지혜, 용맹을 신의를 갖춘 장수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들이 계백이 그의 가족을 살해한 행위를 어떻게 평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공통된 의견을 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다. 우선 가족을 전부 살해하였다는 오늘의 인권으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이다. 가족을 자기의 소유물로 인식했던 시대의 처사였다. 가족을 살해한 순간부터 계백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패전을 이미 마음 속에 담은 장수가 어찌 승리할 수 있겠는가?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겠는가? 결사대의 용맹을 강조함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도미전은 한국의 기록에 처음으로 기록된 군주의 성폭행범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4대 개루왕이 그 주범이라고 기술했으나 이는 백제를 거의 망하게 한 폭군 개로왕대의 설화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신증동국여지슴람에도 소개된 것이다. 여기서 왕이라고 해서 일반백성의 부인을 농락한다는 것은 인권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비록 국왕이지만 역사적 단죄를 한다. 또한 도미 부인이 자기의 종을 단장시켜 왕으로 온 사람을 성접대하였다는 것도 당시 사회구조가 신분제 사회였지만 이는 인륜상 도를 넘어서는 행위였다. 이런 설화를 그대로 기술한 김부식도 이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한듯 하다. 도미전은 설화내용을 역사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사기 권 47
계백(階伯)은 백제인이다. 벼슬하여 달솔(達率)이 되었다. 당나라의 현경(顯慶) 5년 경신(백제 의자왕 20: 660)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대항하면서 말하였다.
“한 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두 나라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 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드디어 가족을 모두 죽였다. 황산의 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서하였다.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
드디어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냈다. 신라 군사가 이에 물러났다. 이처럼 진퇴를 네 번이나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삼국사기 권45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을 신고 저자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로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왕은 매양 그렇게 말하였는데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가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할멈이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에서]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상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되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말하였다.
“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말고 꼭 국가의 말을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의 언덕에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은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흐르는 화살[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삼국사기 권48
설씨녀(薛氏女)는 [경주] 율리(栗里)의 평민 집의 여자였다.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잘 닦아졌다. 보는 사람들이 그 고움을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正谷)으로 국방을 지키는 수자리 당번을 가야 하였는데 그 딸은 아버지가 병으로 쇠약하여졌으므로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고 또 자신은 여자의 몸이라서 아버지 대신 갈 수도 없었으므로 한갓 근심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집이 대단히 가난하였으나 뜻을 키움이 곧은 남자였다.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대에 나가야 함을 설씨가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설씨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뜻과 기개를 자부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하여 주시오!”
설씨가 대단히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이를 고하니 아버지가 그를 불러 보고 말하였다.
“듣건대 이 늙은이가 가야 할 일을 그대가 대신하여 주겠다 하니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이 어리석고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자식을 주어 그대의 수발을 받들도록 하겠소.”
가실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었어도 이는 저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가 혼인날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였다.
“혼인은 인간의 큰일인데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이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잡아 예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거울을 둘로 쪼개어 각각 한 쪽씩 갖고 “이는 신표로 삼는 것이니 후일 합쳐 봅시다!” 하였다.
가실이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설씨에게 말하였다.
“이는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후에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떠나면 이를 기를 사람이 없으니 청컨대 이를 두고 쓰시오!”
드디어 작별을 하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 다른 사람으로 교대를 시키지 못하여 어언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지금 이미 그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 하겠다.” 하니 설씨가 말하였다.
“지난번에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리기 위해 가실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이 이를 믿고 군대에 나가 몇 년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이 심할 것이고, 더구나 적지에 가까이 근무함에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여 마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항상 물릴까 걱정할 것인데 신의를 버려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리요? 끝내 아버지 명을 좇을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늙어 그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짝을 짓지 못하였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동네 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하였다. 결혼 날이 되자 그 사람을 끌어들이니 설씨가 굳게 거절하여 몰래 도망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쳐다보면서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가실이 교대되어 왔다. 모습이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앞에 나아가 깨진 거울 한 쪽을 던지니 설씨가 이를 주워 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사람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후일 서로 함께 결혼을 언약하여 해로하였다.
4, 맺음말
삼국사기의 열전은 삼국사기가 기전체 역사서이므로 이를 통해서 김부식의 편찬의도와 역사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열전의 구성을 통해서 김부식의 국가관을 이해할 수 있고, 열전에 든 인물을 통하여 국가의 방어, 정책의 조언 문학자와 예술가, 그리고 효녀, 국가에 생명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대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한 고승들의 열전을 쓰지 않았다.
또한 그가 쓴 고문체 문장이 열전에 유감없이 발휘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를 신라중심으로 파악하려 하였고, 이 점은 본기는 물론 지, 그리고 열전에서도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군주의 정치도 잘 해야하지만 군신의 절대적 보필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열전은 이런 면을 밝히기 위해서 편제되었을 것이다. 열전에는 김부식이 직접 쓴 사론 5편이 있어 그의 사학사상을 이해할 수 있고, 편찬체재, 열전의 구성을 통해서도 김부식의 역사관과 국가간, 인생관을 찾을 수 있다. 요컨대 그의 국가관은 왕정을 잘 보필하고 외적을 막아냄에 영웅적 지도자의 필요성, 생명을 바친 열사들의 힘이 국가 유지의 원동력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혈족주의적 고대국가체제에서 능력본위의 중세적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읽을 수 있다. (2013.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