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시 전국 제일의 명문이라는 경기중학교에 합격하고 입학식까지 신나게 놀았다.
새로 배우는 영어는 입학한 다음 알파벳부터 차분히 배워나가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웬걸 급우들 대다수가 알파벳을 읽고 쓰기는 물론 간단한 문장은 해득하는 수준의 선행학습을 하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 가르치지도 않고 영어시험을 치렀는데 꼴찌에서 7등을 기록했었다.
이후 열심히 노력했지만 영어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중고교 6년동안 그럭저럭 중위권에 머물렀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독일어를 배우자 슈베르트의 가곡을 원어로 부를 수 있다는 허영에 빠져독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영어에게는 상대적으로 대접을 소홀히 했었다.
대학교에 올라가서는 미국의 대국주의는 역겹고 아메리카니즘은 천박하다는 반발심에 2학년부터는 영어책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이후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사법시험을 치르는데 있어서도 1차 시험의 외국어시험과목으로 줄곧 독일어를 선택했다.
이렇게 영어와 거리를 두었건만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하려고 하니 영어공부를 다시 해서 고교 3학년 수준의 영어실력으로 복구하는데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대우실업에 입사한 후 섬유수출부, 기획조정실, 구매부 등으로 전전하다가 결국 법제실에서 영문계약서를 검토하는 직책에 정착해서 약 20년을 보내게 되었으니, 영어와의 인연이 참 얄궂다고 느껴진다.
대학시절에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면 영어하고는 관련이 없이 살게 되겠거니 여겼는데 도리어 영어를 밥벌이 수단으로 삼게 되었으니, 영어를 우숩게 알았다가 영어에게 찍혔다고나 할까?
더욱이 나이 마흔을 넘겨 미국에 건너가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땄더니 닭의 벼슬처럼 그것은 실용성(돈 버는데 도움이 됨)은 없이 영어를 잘 해도 보통이 아니라 아주 잘 해야 할 직업적 의무만 나에게 지웠다. 당연히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심해졌다.
영어에 능숙해지려고 때늦게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눈과 손으로 공부한 영어라서 회화에는 늘 어려움과 불안이 따랐다.
나는 듣기에 특히 취약했는데 그 이유야 이십대 후반이 되기까지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두뇌속의 언어해득기관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데 집의 여편네는 내가 평소 남(여기에선 아내, 자신을 지칭함이 틀림없는데)의 말을 주의해서 듣지 않는 습관이 주된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어쩌다가 궁박한 시절에 고립된 한반도 반 쪽에서 살게 되어 우물안 개구리 신세였던 과거도 억울한데 영어 좀 못알아듣는다고 인격에 대한 공격까지 받게 되니 슬프지 않겠는가? 정철선생의 시조를 모방해서 한 구절 읊는다면 "해득 못해 안타깝거늘 비난조차 받으실까?"가 되겠다.
아무튼 이리해서 영어로 회화할 때에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므로 어떤 외국인은 나를 심각한 미스터 박이라고 불렀다.
나는 직장에서 영문을 곧잘 작성한다는 주위의 평을 받기도 했지만 영미 지식인의 유려한 문장에는 발 뒤꿈치에도 못 미칠 미국 중서부 고졸 여비서의 비즈니스 영문 수준이었다.
그래서 오십 중반에 타의에 의한 조기은퇴를 당해 영어로 인한 시달림에서 벗어나자 영어로부터의 자유를 내심 선언햇다. 그런 다음부터는 영어책이라고는 신약성경을 한 차례 읽어본 적이 있을 뿐 완전히 손을 끊었다.
이제는 오십 년 전처럼 영어가 나에게 다시 자신을 공부하고 사용하라고 강요할 여지는 전혀 없다.
내 정도 실력으로는 강사로서 재능을 기부할 수도 없고, 옛날의 펜팔이나 연애편지 대필은 이제 없어졌고, 해외여행을 하면서 영어를 쓸 기회도 없는데 체면 때문에 코로나 탓을 하지만 실상은 호주머니가 가볍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어와 나와의 질긴 악연도 이젠 끝이다.
이제 이별의 마당에서 뒤돌아보니 영어로 인해 시험에 떨어졌다거나 크게 망신을 당했다거나 하는 경험은 없고, 도리어 내가 노력을 한만큼 그만한 결과로서 답해준 것이 바로 영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영어는 나에게 공정하게 대했다고 할 수 있고,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나에게, 내가 고집스레 영어에게 곁을 주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는 이 정도라면 악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일도 아니라고 말할 터이다.
그러나 나는 20년을 바라지 않았던 영어의 통치 밑에서 지냈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공정했다고 해도 웃는 낯으로 영어릏 마주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에 덧붙여 영어는 너무 우월하고 어려운 존재다. 그래서 난 체질적으로 영어가 싫다.
그러니 잘 가라, 영어야!
너 가는 길에 예이츠의 시 한 구절을 낭송해주마.
"The hour of the waning of love has beset us;
And weary and worn are our sad souls now;
Let us part, ere the season of passion forget us,
With a kiss and a tear on thy drooping brow."
"사랑이 시드는 계절이 우리에게 닥쳐와
지금 우리의 슬픈 영혼은 지치고 초췌하다.
우리 헤어지자,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저버리기 전에,
네 수그린 이마에 한 번의 입맞춤과 눈물 한 방울을 남기고." (끝)
첫댓글 기왕 쓰신 '영어 이별사'인데 마지막으로 영어로 작성하셨더라면 錦上添花일텐데, 아쉽네요.
소생도 고교시절 차라리 수학은 그럭저럭 지나가지만 어학은 전혀 취향이 아니었는데, 직장 생활을 하려니 어학을 멀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실상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밝힙니다. 베르다드공은 영어, 독어, 서반어를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구사하고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롭답니다. 그러니 수학은 또 그 실력이 어떻겠습니까? 베르다드공은 너무 겸손이 체질화되었어요.
@normun 외국어를 간신히 시늉내는 정도입니다.
미래는 전혀 예상밖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노년에 이르러 인정하게 됩니다ㆍ소생도 해외건설현장에서 일할 때, 기술 간부들이 조선시대에 진서를 모르면 행세할 수 없었듯이 영어를 못하니 기술자 대접을 못받는다고 한탄하는 푸념을
들었으나, 영어 보다 공학의 수준이 딸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 관리직인 소생도 국제적 시각, 경영 관리 지식과 경험 부족을 실감했습니다ㆍ그런데도 젊음의 혈기로 싸우고 버틴 일을 회고하면 우습기도 합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