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고집없는 선객은 화두없는 선객과같아-
-분발 없으면 절밥 먹을수록 위선만 쌓여-
<지난 호에 이어>
니체는 탄식했다.
“언제나 나는 나의 입이 노래하면 나의 귀가 들을 뿐이로다.”
이 얼마나 잔혹하리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고독의 극치인가. 고독속에서 고독을 먹고 고독을 노래하면서도 끝내 고독만은 낳지 않으려는 의지가 바로 선객의 의지이다. 화두는 거북이 걸음인데 세월은 토끼뜀질이다. 어찌 잠시라도 화두를 놓을 수가 있을까.
선객은 옹고집과 이기와 독선으로 뭉쳐진 아집(我執)의 응고체라고 흔히들 비방삼아 말한다. 그러나 비방이 아니라 사실이며 또한 실상이어야 한다.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나(如來)만이 그(衆生)를 제도할 수 있다는 아집까지 버려야 할까. 그래서 수보리(須菩提)는 물었다.
“여래는 여래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아상에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중생을 건지나이까?”라고.
아집없는 선객은 화두없는 선객과 같다. 견성하지 못하고 선객으로 머무는 한 아집은 공고히 하고 또 충실해야 한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연륜을 더했군요.”
“그렇게 되었네요.”
“지난해엔 제자리 걸음도 못한 것 같아요. 금년엔 제자리 걸음이나 해야 할텐데 별로 자신이 없군요.”
“어려운 일이지요. 평범한 인간들은 시간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빈곤해지고 분발없는 스님들은 절밥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나태와 위선을 쌓아가게 마련이지요. 나아가지 못할 바에야 제자리 걸음이라도 해야 할텐데….”
■1월3일 단식기도
생식을 하는 스님이 산신각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생식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된다고 하는데 몸이 무척이나 약했다. 상원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약해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산했다는 스님인데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아 정돈되지 못한 지식이 포화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다. 그래서 두루 깊이없이 박식하다. 극히 내성적이어서 집념이 강하고 몸이 약하니 극히 신경질적이고 여러가지로 박식(?)하기 때문에 오만하고 위선기가 농후하다.
절밥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햇수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도인행세를 하려고 하니 구참 선객들에게는 꼴불견이다. 틀림없는 삐에로다. 남과 얘기할 때는 상하나 선후 구별없이 가부좌를 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느릿느릿 짐짓 만들어서 하고 걸음걸이도 느릿느릿 갈지자로 걷는다. 그러다가도 누가 자기 자존심에 난도질을 하면 신경질이 발작하여 총알같은 말씨로 갖은 제스처를 써 가면서 응수한다. 생식은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하나의 상(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의 언행이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기를 싫어하는 뒷방 조실스님도 이 스님에게는 손을 들고 말았다.
약간 병적인 그의 언행이 대중들로부터 지탄을 받다가 끝내는 버림을 받았다. 개밥에 도토리격이 된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는 아무래도 대중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착상한 것이 바로 단식기도이다. 그의 건강으로 보아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엄동에는 더구나 안 될 일이다.
점심공양을 마친 나는 처음으로 그 스님과 마주 앉았다.
“스님, 단식기도를 하신다면서요? 이 엄동에 냉기 감도는 산신각에서….”“예, 모두가 따뜻한 방안에서 시주밥이나 얻어먹고 망상만 피우면서 시비만 일삼으니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입니다.”
기가 콱 막힌다. 그러나 시비할 계제는 못된다. 그와 나는 여러가지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이 우매한 대중의 업장을 도맡아서 녹여볼까 하는군요.”“그렇습니다. 단식하면서요.”
“고마운 생각이오. 하지만 스님, <장자경>을 독파했다니 한단지보(邯鄲之步)를 기억하시지요? 연나라 소년이 조나라 도성인 한단에 가서 조나라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조나라 걸음걸이를 배우기 전에 자기나라 걸음걸이까지 잊고 필경 네발로 기어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고사 말이외다.”
“예, 알고 있지요.”
나는 서서히 그의 허를 찔러 상을 벗겨보기로 했다.
“서시빈목(西施빈目)을 기억하시지요? 미인 서시가 병심(病心)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마을을 지나가는 것이 예뻐 보이자 그 마을 추부(醜婦)도 흉내로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니 부자는 폐문한채 외출을 금하고 빈자는 처자를 이끌고 그 마을을 떠나갔다는 고사말이외다.”
“그것도 기억하고 있지요.”
그는 아니꼽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스님, 누워서 한시간 취하는 수면은 앉아서 취하는 세시간의 수면보다 승하고, 서서 취하는 다섯시간의 수면보다 수승할 것입니다. 자성(自性)을 무시하고 인간의 작위에 성명(性命)을 맡기는 자는 언제나 허위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오. 구도자를 표방하고 고행을 한다면 양생(養生)을 외면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식으로 재계(齊戒)는 될지언정 심적 재계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고행은 끝내 자기학대가 아니라 자기위주가 아닐까요.”
“무서운 양도논법(兩刀論法)이군요. 마치 문턱에서 두발을 벌리고 입(入)이냐 출(出)이냐를 묻는 것과 같군요.”
“논리적인 시(是)와 비(非)를 떠나 시비를 가려 보자는 거요.”
“표준의 상대성 때문인가요.”
“아니요, 다만 언어의 한계성 때문이지요.”
“그럼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지요. 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학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학대는 자기 훼손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노자도 언급했습니다. ‘위도(爲道)함에 일손(日損)이니 손지(損之) 우논지(又損之)하여 이지어무위(以至於無爲) 하면 무위이무불위의(無爲而無不爲矣)’라고. 손(損)에 손(損)이 거듭하여 손함이 없을때 비로소 득도할 수 있음을 말하는게 아니겠어요. 자기위주면 타인은 벌서 안목 밖이 아니겠어요.” <계속>
첫댓글 상을 버리니다는 게 참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 하지요. 분별망상과 아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만 그 얼마나 좋을까~~~ 그제께 한 강사분이 "그저 다를 뿐이다"라는 넒은 마음으로 살아가 보면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될 텐데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을 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