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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대구 서부정류소에서 진주로 그리고 다시 산청군 원지로 이동한 후 적벽산과 원지를 보며 한장 담아 본다
오늘은 진양댐을 지나 촉서루 그리고 경남 의령 진입로 까지 가야만 하는 64km대장정길이다.
그리고 남강을 내려오면서 함양 수동면에서 위천과 만나면서 위천 상류에서 공사를 하는지
흙탕물과 합류되고 유림면 대궁리에서 축사 오물이 흘러 들어 남강물은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지만
뱀사골, 국골,추성계곡,달궁에서 오는 지리산 북북의 모든 계곡에서 맑은물이 내려오는 임천강이 함양군 생초에서 합수되
물은 다시 깨끗해지지만 산청을 지나면서 그저 그런 강물로 변한다.
원지마을을 지나면서 남강구간 드디어 진양댐을 구경하는 날이다.
17년 1월 3일
앞은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경호교이다.
본격적인 진양댐의 최상류로 보면 될것 같다.
거리가 멀어서 물 색갈이 어떤지 확인 불가지만
좌측으로 산청군 단성면의 검무봉이 고개를 들고 있고
우측으로 탑있는 곳은 남강 태극길의 망해봉이 지척이고
멀리 원지의 백마산과 적벽산 그리고 우측으로 엄혜산
잔디가 곱게 깔린구간이라 달리기 딱좋은데 이슬이 많아 런닝화에 물기가 가득하다.
목곡교
단성면 목곡마을과 사월리를 이어 주는 다리
이곳에서 둑방길은 이어지지만 망해봉에서 이어지는 길이 없어 농로따라 진행한다.
망해봉 고개마루를 지나서
끝없이 이어지는 잔디길
단성면 대관교를 지난다.
관정리와 대평리를 이어주는 다리
대관교에서 지나온 남강 둑방길
좌측은 비닐 하우스 단지
많은 염소들중 한마리 붙잡아 파는 모습도 보였고
진양댐과 멀리 진주의 광재산이 나홀로 우뚝한 모습
다리위에서 보는 진양호의 물색갈은 그저 그렇고
뛰어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것 뭔지...
다리에서 남쪽방향
미세 먼지가 가득하고 살엄음이 살작 얼어 있어 겨울임을 실감한다.
대평리 비닐하우스 대략 1천개 정도의 대규모 하우스 단지이다.
대부분 딸기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
대평면 딸기 단지
남강 하도 매립지 대평지구 농지조성사업으로
농지로 개발,분양하여 효율성 제고 및 수몰민의 영농기반을 구축하여 주민의 소득증대와
지역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대평 비닐하우스 재배단지
2004년에서 2005년도에 조성
출입금지
사진 한장 찍으려고 주인분께 양해를 구해본다.
도둑이 많아서 인터넷에 여기 주소는 올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는데...
수경재배 딸기농사
비닐 하우스 귤이 먹음직 스럽다.
몇년후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귤을 사서 먹을날이 올것 같다
지금은 시험 재배중
농가 구경하고 진주시 청동기 문화 박물관으로
대평리 비닐하우스
집에와서 인공 위성으로 비닐하우스 단지 얼마나 될까 보니 대략 1천개 정도
앞에 도랑물은 얼마나 맑은지 깊은 바닥까지 고스란히 보였고
물풀 사이로 연신 돌아다니는 작은 피라미가 전향적인 농가의 풍경 그대로였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 와서
청동기 시대때 고인돌 옮기는 모습
청동기 시대 대평리 사람들 옷복장
청동기 시대때 밥상
지금 우리집 보다 더 잘 드셨던것 같다.
밥상위에 조기눈을 보니 지금 내눈이랑 똑 같은듯 완전 조기눈이다.
움집
가야할 대평교
진양호가 크기때문에 어디로 갈지 미리 지도를 보고 연구를 해야한다
진양호의 버드나무 군락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길 없지만
수달이 산다고 온통 현수막과 안내판이 설치 되어있다.
물은 완전 낙똥강 수준인데 뭔 수달이 여기에 산다고 홍보를 하는지
한여름이면 이곳 부근도 녹조라떼 수준으로 변하는건 불보듯 뻔한곳이다.
지리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웅석지맥의 대평고개
오늘도 요런 짜잘한 고개마루 몇개를 지난다.
천왕봉-웅석봉-백운산 진양호까지 54km의 산줄기
진수대교에서 본 진양호
눈에는 안보이지만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맑은 덕천강이 남강으로 합수되는 지점이 저멀리에 있다.
지리산 북부의 임천강(48km) 그리고 천왕봉에서 흐르는 덕천강(46km) 맑은물이 이곳에서 완전 똥물이 되어 있으니
참 답답한 현실이다.
진수교
인증 담고
가화천 백악기 시대 화석 산지
문제의 가화천
멀리 유수 철교가 보이고
조금만 더가면 낙남정맥길을 건너는 유수교가 있는곳이다.
영조때 만들어진 산경표에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역시 산을 넘지 못한다고 했는데...
가화천은 본래 낙남정맥산길에서 발원해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이었으나 남강의 홍수 방지를 위해서
낙남정맥을 싹둑 짤라 북으로 흘러 남강으로 합류하던 삼계천을 합처 현제의 모습이 되었다.
역류라는 말이 실감나며
산줄기를 가위로 자르듯한 정맥길은 낙남정맥 유수교와 한남길의 아라뱃길 두곳이며
철교 넘어 낙남 정맥길의 산길이 애처롭게 보인다.
북동으로 흘러 남강으로 가야할 물이
홍수 조절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역류해서 남으로 흐르는 가화천
물은 똥물 수준이라...
마루금 짤라 먹었으면 물이라도 깨끗해야지
진양호의 홍수가 나면 사천만으로 초당 6000천톤을 방류하는 진양호 수문
지리산을 출발해 낙동강 하구까지 가는 246km의 낙남정맥길이 저것 하나로 인해 맥을 끊어 놓았다.
맥은 잘리고 산자분수령 원칙이 깨어지고 강은 산맥을 거슬러 올라가니 그강이 바로 가화천이다.
옛문헌의 산경표와 지금 잣대로 보는 정맥길
간척사업을 해서 국토가 넓어지는 마당에 산줄기에 모두 포함한다면
낙남정맥은 결국 죽은 산줄기인셈인데...
그리고 이곳을 진양댐으로 볼때 가화천 아래 사천만까지
남강 -낙동강 하구까지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육지속의 거대한 섬 사람들인것이다.
"물은 생명이다"라는 문구가 써있는곳이지만
생명의 근원이라는 이곳 물은 죽었다.
4대강 해서 강물을 살리겠노라 했지만 해놓은것이라고는 자전거길뿐이고
진양호
1796년 정조 20년 정조실록에 장재곤이라는 사람이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해 홍수를 방지하고
농토를 확보할것을 임금께 건의한 내용이 있다.
그당시에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느냐"며 말도 안된다며 무시를 했으나
이후 구한말에 남강을 사천만으로 보내자는 이야기가 다시 제기된다.
영남 춘추(1934년 진주에서 발간된 지방신문)에 남강 홍수를 방지하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 있으니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하는것이다,이는 치수와 8천정보의 땅을 얻게 한다"는 글이 있다.
일제 감정기 1936년에 방수로를 포함한 1차 진양호 공사를 했으나 중단했고, 1949년도에 다시 2차 공사를 시작 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된 뒤에 1962년도에 착공해서 69년도에 완공 되었다.
이공사가 되기전에는 한여름 장마철에 진주와 의령은 해마다 물난리를 당했지만 진양호댐 건설로 물날리는 없어 졌지만
산경표(山經表)의 낙남정맥길을 완전히 잘라먹은 산자분수령을 위배하는 하천으로 남게 남게 된다.
진양호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생항,공업,용수및 관계용수 공급
남강 하류및 사천만 연안의 홍수 피해 방지와 수력 발전 할용할 목적으로 건설된 길이 1,126m높이 21m의 댐이다.
멀리 진양호 동물원과 공원이 보인다. 기존의 진양 기맥의 날머리
진양호가 남강을 대표하는것도 아닌데 남덕유에서 흐르던 산줄기가 의령군 자굴산으로 거쳐
낙동강 합수점으로 가지 않고 진양호(남강 발원지에서110km지점)에서 맥을 다하는곳이라 여거 진양 기맥이라 부른다.
하지만 남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흘러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와
함양군 대산면 장암리 낙동강 함수점까지 78km의 물길을 더 지난다.
물은 생명이다. 진양호에서 인증 담고
댐길이 1126미터 높이 21미터의 남강댐
남강은 흐른다
맑은 물색은 어디가고 연한 국 간장색으로
댐아래부터 경남도청 서부청사 구간 16km는 엄청 지루한 구간이며
의령을 거처 낙동강 합수점까지 자전거길이 형성되어 진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자전거길
천수교
진주성의 서장재 모습이 보이고 멀리 촉서루의 지붕이 보인다.
호국사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이며 원래 이름은 내성사로 불림
임진왜란때 승병의 근거지 였으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됨
절의 규모에 비해서 너무 이쁜 사찰이다.
서장대
진주성 서문에 위치하는 장군의 지휘소
서장대에서 본 남강과 음악 분수대
진주지구 전승비
진주지구 전승비는 미제 25사단 칸 기동부대가 진주지구에 쳐들어온 북한군 제 6사단과 9사단을
진주일대에서 8일간 치열한 공반전을 전개하여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3,1운동비
1919년 3월 18일 진주면 내 각처에서 대규모의 군중이 집결하여
3,1독립운동만세를 전개하여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진주시민들이 겁립하였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간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천안 병천 지평리 김충갑의 아들로 태어나 1578년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 군기시,판간을 거쳐 1591년에 진주 판관이 되었고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대 진주 모사가 병으로 죽자 그직책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측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계를 갖추어 사천,고성,진해 지례,금산 등지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목사로 승진되어 같은해 10월에 침공한 적 2만 대군을 3,800여 병력으로 6일간 공방전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바로
진주대첩이다.이후에 김시민 장군은 병사한다
공북문
쌍충사
이 비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을 세겼다.
제말(諸沫) 장군은 징비록에도 경상도 고성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활약한것으로 기록 되었다
웅천.김해.이령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곽재우장군과 함게 그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星主)목사에 임명 되었으나
성주싸우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 (諸弘錄)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때 전사 하였다.
촉서루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곳에 자리잡은 단층 건물의 팔작 지붕이 웅장한 건물이다.
1593년 7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의 파상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 김천일.최경회,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고 남강에 뛰어 들어 자결한곳이기도 하다.
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
진주성 1차 싸움에서 패한 일본은 2차 진주성 많큼은 꼭 공격해서 이겨야 했으며
일본군 측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주성 1차전 패배의 보복전 심리로 조선측에 승산이 전혀 없으니 잠시만 성을 비워
놓으면 일본군이 임시 점령 했다가 남해로 물러갈것이라 하며 진주성 만큼은 꼭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공격하기전에 민간인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내라 권고한다.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성만 공격하고 물러난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명군와 일본군의 권고를 거부
2차 진주성 싸움은 일본군 10만명과 선박 800척으로 진주성 한곳만 집중 공격 진주성내에는 민관군 모두 6만
*진주 인근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明君)은 진주성을 지키는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했으며.
조선군 곽재우.선거이 홍계남은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많았으나 곽재우는 진주성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한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경험이 풍부한 나의 휘하 병력이 이런데서 개죽음 당하게 할 수 없소!"하고
선거이,홍계남은 곽재우와 함께 가버리면서 충청 부사 황진을 만나서 몇마디 대화를 나눈다.
곽재우:진주는 고립된 성이기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더구나 공(황진)은 충청도의 절도사이니 진주성을 지키다 죽는 곳은
공의 올바른 직분이 아닌듯하오
황진:비록 그렇다 하나 김천일에게 이미 약속을 했으니 죽는다 해도 약속을 깨트릴 수는 없오"하며 진주성에 남는다.
고립무원의 진주성에서 싸워서 이기던지 죽던지 둘중에 하나
*창의사 김천일 군사 3백명
*충청병사 황진 7백명(황희 정승의 5대손이며 활을 잘 쐇다고 한다.)
*경상 우병사 최경회 5백명 (논개 남편)
*의병 복수장 고종후 4백명 의병장 고경명의 장남이며
의병장 고경명(60)은 임진왜란 1592년 7월9일 금산전투에서 차남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고
장남 고종후만 살아 남는다.
이곳 진주성 2차 싸움 1593년에 고종후가 죽음으로써 고경명의 두 아들이 모두 임진왜란에서 전사하며
고경명의 대가 끊긴다.성안의 모든 장수들이 고종후를 살리려고 애들 썼지만 결국 전사한다.
고경명의 딸은 노상룡의 아내가 되어 정유재란때 일본군을 꾸짓고 그 뜻을 굽히지 않다가 살해당함
*부장 장윤 3백명
*의병장 이계련 1백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3백명
*의병장 민여운 2백명
...
의병 2천 8백과 진주 목사 서예원과 김민준.이종인 등 진주 주둔중인 조선 정예군 3천은 진주성을 지킨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6천명의 조선군이 왜군 10만명을 상대로 8일을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조선군,명나라.의병 어느 부대도 진주성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기록에는 진주성안에 있던 피난민과 6만명이 전멸 했으며 성안에 개한마리 남겨 두지않고 도살해 버렸다고 한다.
일본군은 고니시가 말했던대로 전라도를 공격하지 않고 남해로 내려가 버렸고
조선 조정에서 명군에게 진주성을 구원하라 재차 청했으나 다음날 진주성 함락을 알리는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으며
장계가 도착하고 궁에서는 "니가 잘했니 니가 못했니" 또 다시 조정에서 코피 터지게 싸움질이었다.
곽재우의 현실성과 황진의 용감성 두분중 누가 더 뛰어난 분인가 개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죽음을 알면서도 진주성으로 말을 달려 들어간 황진을 택할것 같다.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 영정
논개는 주씨 성으로 전북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이 고향이고
지금의 대곡 저수지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이 김풍헌의 집 민며누리로 팔아 버리자 어머니와 함께 도망을 가게되고
얼마후 장수현감에 붙잡혀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벗게된다.
누명을 벗었으나 갈곳이 없게된걸 안 장수 현감(최경회)은 자기 부인의 병수발드는(침방관비) 일을 맏게 되고
이후 현감 부인이 지병으로 죽게되자 주논개는 현감의 2번째 첩이 된다.
현감의 첩이 되었으니 기생이라는 전설은 아니다.
그의 남편 병마절도사로 제수된 최병회는 1593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10만 왜구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자 몇몇 장수 3명
과 함께 남강물이 흐르는 진주성 아래 의암에서 투신한다
주논개는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의 잔치날 음력6월29일 ( 7월 7일) 기녀로 꾸며 참석하여
왜장 가토 부장인 "게아무라 로구스케"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면서 10일간의 치열했던 진주성 싸움의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논개는 신분상의 이유로 의로운 죽음을 인정받지 못한다.
의암 사적비
선조 26년 6월 29일 임진왜란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민,관,군 6만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논개(義妓論介)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에 홀로 서있고 그여인은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그여인 아닌들 그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오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워 그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義巖)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며
지금 남강은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부유물이 떠다닌다.
의암에서 본 진주성
2차 진주성 싸움 결정적 요인
충청 병사 황진이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
성안의 유일한 베테랑 관군이었던 황진의 죽음은 이미 잘망적이던 전투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이었고
전사한 황진을 대신해서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자 경상 우병사 논개의 남편 최경회가 경비대장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전사한다.
오후에 내린 비로 인해 동문이 무너지자 일본군 성안으로 들어와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
이때 여러 장수들 남강으로 투신 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서예원.최경회 머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침으로써 진주성 전투 승전을 선언한다.
촉서루
촉서루에서 본 논개 사당
진주성의 2차싸움 결과를 보면 참 암담하고 가슴 아픈일이다.
김시민교
다리가 무척 이쁘게 놓여있다.
다리 아래로 지남
멀리 진주 문산면의 월아산과 장군대산
진양호로 인해 물이 낙동강물이나 비슷한 지경이니
참 드럽다
쭉 뻗은 길
낙동강까지 70km
오늘 아무것도 못먹고 참 많이도 달렸다.
아직도 가야할길은 30km 남았으니 멀기만 하고
진주시 집현면의 불티마을
마을 이름이 불티마을
이유는 마을 건너 진주시 대곡면에서 산불이나 불씨를 머금은 불티가 날아와 이곳까지 불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비닐하우스에는 호박과 가지가 생산
진주시 대곡면 와룡리 남강이 좀더 아름다운 구간
시멘트 길이 앞에서 끝나고 비포장길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비포장길
참 좋고 편안한길
2km구간은 편안하고 걷고 싶은길이다.
더러운 물
대곡면 와룡리 돌재방한곳
이곳부터 고운 모래가 남강을 대신하며 흐른다.
산하나를 걷어내고 있는 돌공장 석원 업
공사를 하는지 요란한 기계소리와 돌먼지가 바람에 날리고
강바닥은 고운 모래만 가득하다.
해빠질 무렵
멀리 의령의 진산이 자굴산이 보인다.
앞은 압사 바위
자전거 길은 끊어지고 대곡산으로 올라 가야한다.
짜잘한 산중턱으로 오르막길 올라갈 힘이 하나도 없다.
시멘트 길로 올라와서 본 지나온 남강
대독산성이 있는 대곡산
대곳산성을 찾아 가볼까 했지만 대곡산성 방향에 누군가 글을 써두었다.
누군가 써둔 산성 길 없다고
"산성길 찾지 못했음 길 너무 험함"
얼씨구!~~ 경사났네 하며 대곡산성은 포기하고
지나온 임도길
앞의 마을은 진주시 대곡면 대곡마을
이동네는 오후 3시면 해가 빠지는 동네란다.
이곳에서 상정천 도랑 물이 별로 없어 건너서 진행 한다.
상정천을 건너므로 진주에서 의령으로 행정구역이 바뀜
멀리 산아래 지나가면 닭똥냄새 고약한 메추리 농장을 지나게 되고
오늘 마치는 의령군 화양면 화양 보건소
저녁이 되자 바람도 차갑고...
의령으로 가는 택시를 불러놓고 잠시 기다린다.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
여기까지 대략 64km를 달린듯하다.
오늘 구간중 꼭 가볼곳
진주성이며 진주대첩과 6만 민관군이 전사한 2차 진주성 전투는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페이지다.
전국이 온통 미세 먼지로 가득한날
허파에 미세 먼지 가득 담고자 지난번에 그만둔 의령군 화정면 화정마을에서 다시 이어간다.
여기에 찾아오려면 대구 서부 정류장에서 버스타고 곳곳에 다 서서 시골 할매 할배분들 모시고 가다가 서기를 수십차례
반복하니 무려 2시간 걸려서 의령군에 도착하고 의령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와야한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와서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야해서 물한병 없다.
화정마을-낙동강 합수점 40km 4시간 조금더
17년도 1월 5일
진주 남강댐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자전거길이 잘 되어 진행하기에 불편함이 없지만
강건너 갈때는 지도를 잘봐야 한다.
진주시 대곡면 와룡리 부터 고운 모래가 남강을 가득 채우니
어느 공사장에 들어갈 고운 모래 채취선이 연신 강바닥의 모래를 퍼올린다.
저곳에서 모래 흙탕물이 남강으로 ...
이곳은 의령군
보이는 곳은 군북면 박곡리의 방어산이다.
방어산은 함안의 여항산(전투산),서북산, 661고지와 함께 6,25 전쟁중 격전지로써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곳이며
산이름이 방어산이다.
남강변에 자리하는 의령읍 친환경 골프장
남강은 흐르고
홍의 장군 곽재우
임진왜란중 최초의 의병장이며
전라도의 양대박 장군. 수도의 권율 장군, 남해의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남의 지킨 장군으로 유명하다.
다만 2차 진주성 싸움때 조선군 곽재우 장군,선거이, 홍계남은 진주성까지 갔다가 일본군의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한다.
"내가 죽는건 상관 없지만 뛰어난 의병들이 개죽음 당하는꼴은 못본다며...
그로 인해 진주성의 민,관,군 6만이 전몰 되었기에 곽재우 장군의 짜잘한 왜군과의 싸움에 많이 승리 하였어도 진주성
싸움에 구원 실패는 남강을 걷는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후일을 기약한다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곽재우 장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진주성 안에는 약 6만의 민,관,군과
왜군 10만과의 싸움 그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을 것이며
훗날 곽재우 장군은
"왜군들이 왕릉을 파헤치고 종묘를 불살랐는데 신하된 자의 무덤을 어찌 번듯하게 꾸밀 수 있겠느냐며...
봉분 없는 무덤속에 묻히지만 진주성 2차 전투에서 뛰어난 의병들의 죽음이 아까워 진주성을 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마음을 평생을 두고 사셨거나 죄책감에 봉분없는 무덤을 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해 보게본다.
의령으로 들어가는 관문
정암철교
정암루
서기 1592년 임진년 5월말 왜장 안국사 혜경이 왜군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전라도 침공을 하기 위해 그 길목인 이곳 정암진
을 도하하기 위하여 곽재우 장군과 의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를 하였는데 장군은 늪지와 절벽으로 된 강 언덕 지형을
이용하여 신출 귀몰한 왜군을 저지하고 격퇴하여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차단하였다.
정암루에서 본 의령 관문
의령에서 꼭 봐야 할 솥바위
솥바위의 전설
의령의 관문에는 지리산의 정기를 품은 남강이 흐르고
남강의 물속에는 솥을 닮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름 솥바위라 부르고, 마을은 정암이라 부른다.
정암진은 이곳의 나룻터 였으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의령으로 침임하는 왜적들을 일시에 소탕하여 전공을 세운곳이다.
이 솥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8km안에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삼성그룹,엘지그룹,효성 그룹의 창시자가 출생 하였으니 진짜인듯
솥바위 바로 옆에는 의령 여씨 시조단비
철교에서 본 솥바위
남강 양쪽으로 자전거길이 되어 있지만
솥바위쪽 강가는 한참 돌아가야 하는길이다.
남강 다리를 기준으로 다리건너는 함안 군북면 월촌리다
보는 곳은 월촌리 비닐 하우스 단지
이곳도 대략 천여개의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이다.
법수면 황사리 마을의 백마 수확하는 모습
인사를 나누고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 하나 먹어보라며 주신다.
아무 맛도 없고 이상하게 물컹 거리는 맛
정력에 좋다고 해서 먹긴 먹어 본다.
오늘 처음으로 먹어 보는것
최근에 만들어 놓은 자전거길인듯
이런 농로길이 참편안하다. 나중에 자전거 타고 한번 더 와봐야 할듯한 전원풍경이 참 좋다.
지나온길이 끝이 없을 지경이다.
법수면 대송리에서 본 지나온길
의령군 지정면과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를 이어주는 백곡교
나루터로 가는 짜잘한 산을 넘어야 한다.
워커라인때 지나간 악양둑방길
악양 둑방길의 풍차
빨간 자전거
타고 가고 싶다만 일체형으로 고정되어 있다.
처녀 뱃사공 노래비
6,25전쟁 후 53년 고(故)윤뷰길(가수 윤향기,윤복희의 부친)이 유랑극단 단장으로 으로 함안 가야정에서 공연을 마치고
악양루 근처에 머무를때 악양 나루의 처녀 이야기를 듣고 가슴에 담아 두었던 사연을 59년도에 작사.작곡 윤부길 황정자 노
래의 처녀 뱃사공이라는 노래가 되었다,
이곳 악양에서 낙동강과는 거리가 멀어 처녀 뱃사공의 주인공은 남강변 어느곳에서 뱃사공으로 노를 저었을것 같고
남~강 강바람에~
낙동강 강바람에~ 더 울려 낙동강이 된듯하다.
처녀 뱃사공 노래비를 뒤로하고
바로 옆 악양루 가든 주차장으로 들어와 악양루에 오르려고 했지만 악양루로 가는 나무테크 공사중이란 금글과 함께
굵은 줄로 그물을 치듯 개미새끼 한마리 못가게 막아두었다.한참 서성이고 있을때 악양루가든 주인장이 나와서
공사중이라 못가게 막는다.
어찌 그곳 주변의 풍경이 애사롭지 않아서 다른곳으로 가는 길은 없는지 엿쭈어 보니 전혀없고 공사중이라 못가게만 한다.
알았다면 다시 도로로 나와 짜잘한 산으로 올라 악양루 뒤편으로 최근에 만들어 놓은듯한 정자있는 산으로 가서
임시로 만든 임도길로 내려오니 그곳은 통제한다는 글도 없고 나무테크 공사도 작년에 끝났는지 잘 정돈되어 있다.
악양루 가든 주인장이 자기집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못가게 막으려고 한것 같아 심히
불편해서 함안군 대산면에 전화를 해서 이 불편한 모습을 이야기 하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확인해서
시정할것을 약속한다.
돌아가서 악양루 가든주인장에게 악양루 가든이라는 상호가 아깝다고 한마디 해주고 가려다가 갈길이 멀어
대산면 직원이 빠른 시정 조치해줄거라 믿고 악양루로 가본다.
악양루
악양마을 북쪽절벽에 있는 정자로 조선시대 1857년에 세운것이며
악양루 아래로 함안천이 흐르고 함안천은 남강에 합수되는 지점 절벽위라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앞은 함안천이고 남강과 합수 되는 지점
악양루
악양루 현판은 청남 오제봉의 글씨이며
중국 동호정의 악양루를 모방하여 악양루라 하였다고 실기(實記)에 전한다.
악양루에서 돌아나오는길은 새롭게 자전거길을 이어 주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앞의 짜잘한 산을 지나야 한다.
자전거길은 한참 돌아가는길이고
빠른길은 그저 숲으로 들어가야 하느니..
악양루 가든에서 자기집 주차장으로 지난다고 못가게해서 도로따라 올라와 정자가 보이는 짜잘한 산을 내려와 악양루로
가야한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길은 온통 진흙 투성이라
낙동강 하구까지 9km남았다.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의 경찰 승전탑
북한은 적화 통일을 목표로 6월 25일 소련제 탱크 150대를 앞세우고 남침
경북 일부와 부산 마산을 제외하고 전국토를 점령한다.
유엔군 -미군은 왜관-진동까지 방어선을 구축 하였으며 경남 전라도 경찰 6,800명과 미 25사단 4개사단이 대치하여
최후의 방어선을 만든다.
이곳은 수십차례의 교전으로 치열하였던 전투지로써 미군과 경찰관 수백명이 전사한곳이다.
승전탑 전문
함안지구 경찰 최후의 방어 현황
송도교에서 본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 마산교회
저곳도 마산교회 뒷길로 올라 짜잘한산을 넘어 가야 조금 빠르게 진행 할 수 있다.
마산 교회을 지나 자잘한 산을 내려와
시멘트 잔차길로 간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 구나
남강과 낙동강이 합수되는 지점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 왔다.
바로 좌측은 남덕유에서 이어지는 남강 기맥
정면 화왕 지맥
우측 화개지맥
3개의 지맥이 만나는 곳이다.
길고 길었던 남강의 합수되는 지점과 지맥길
보덕각
이곳은 망우당 곽재우이 전공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영조 5년에 세운 불망비를 보호하려는
비각으로 임진왜란 첫 전투지이자 첫 승전지인 남강변에 건립
쌍절각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절한 손인갑과 그의 아들 손약해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이다.
손인갑은 임진왜란때 합천에서 의병장이 된후 많은 전과를 올려 부산 동래 부사로 제수 되었으나부임하기전 합천 초계 마진 전투에서 왜군을 쫓다 전사한다.
그의 아들 손약해는 부친의 ㅈ너사 소식을 듣고 병사를 수습하여 적진에 뛰어 들었으나 전사한다.
멀리 창녕군 남지읍이 보이고 이곳은 남덕유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136km와 남강 물줄기(186km)가 낙동강525km에 합수되는 지점
쓰라린 임진왜란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이어지는 남강은 역사의 강이다.
황석산 전투에서 도망간 김해 부사 "백 사림"으로 인해 철옹성 같던 황석산 북문이 열려 500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싸웠지
만 모두 순사순절(殉死 殉節)하였고
진주성 1차 싸움에 보여준 진주시민의 진주대첩
그리고 2차 진주성 싸움
조선군 곽재우.선거이 홍계남은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많았으나 곽재우는 진주성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한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경험이 풍부한 나의 휘하 병력이 이런데서 개죽음 당하게 할 수 없소!"하고 가버린다.
임진왜란 기간중 최대규모의 학살인 6만의 진주시민이 모두 일본군에게 도륙당했던날
남편(최경회 장군)의 죽음과 진주성 함락으로 "주 논개"는 일본군 가토 부장인 "게아무라 노구스케"를 안고 남강물에 투신한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안동고을의 유교 서원문화와 함양의 쉬는 정자문화
그리고 6,25 전쟁중 최후의 방어전선인 낙동강
임진왜란때 나라을 지키고자 모두가 꽃처럼 순절한 남강이 만나 낙동강이라 이름으로 흐른다.
남강을 찾고자 하시는 분들은
1,주논개님 묘 -방지산성
2.황석산 산성- 황암사
3.거연정-함양 광풍루 6km 선비길
4.청계정사-남계정사-사근산성 3km
5.백마-적벽산 2km
6,진주성과 의암바위
7,처녀 뱃사공 노래비 악양루-경찰 승전탑 6km
꼭찾아 보시면 좋을듯 하며
황석산성 진주성은 기본으로 찾아봐야 할곳
이제 남강을 뒤로하고 금강 397km을 준비해본다.
첫댓글 남강 3구간~마지막 구간 (임진왜란 진주성 2차 전투 6만 모두 순절하다)장문의 강행기 잘보고 나갑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다음 금강도 기대해봅니다
글 감사합니다.
남강은 이제 끝나고 금강으로 발길을 돌려 계속 진행 중입니다. 수도권 지부에 활성화 많은
감사드립니다.
남강 3구간 마지막 구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멋지고 아름답고
아픔이 흐르는 남강
많이 배우고 잘보고 갑니다~~
남강 3구간을 하면서 곽재우 장군에 대해서 많은걸 배우고
또 다른 강에서 또다른 역사를 배우게 됩니다.
강은 그렇게 말없이 흐르니 저도 조용한 발걸음만 재촉하게 되네요
그리운 분 나중에 한번 봐요
두발로 걸어내신 남강의 아름다운 모습과 아픈 추억들
방장님 덕분에 많이배우고 느낍니다.
항상 건강하게 걸음하시기 바랍니다.
글 감사합니다.
남강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듯 하더군요
지금은 금강을 시작해서 대청호까지 진행했으니
올해안에 긴강은 정리 될듯합니다.
언제나 많은 관심 감사드리며 대간 졸업때 뵙겠습니다.
남강을 걸으며 담아오신 그 사연들이 다시한번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수고 많으셨구요 ,기회가 되면 그길을 돌아보고픈 마음 입니다,
정맥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으니 찾아 보시구요
금남 마지막 부여에서 뵙겠습니다.
방장님의 낙동강탐사를 보며 워커라인 다부동전투 전적비등 6.25동난의 피비린내나는 포연의 흔적을 보았고
남강탐사에서 주논개 의기사, 촉석루, 곽재우비, 호국사에서 왜란때 처절하게 항거했던 선인들의 충혼을 보게됩니다.
전적비,충혼비를 보며 선인들이 지켜온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봅니다.
아무것도 안먹고 60여키로를 걷는 초인이 안되시기 바라며
제삼리 역사에 남을 뜻깊고 유익한 대한민국 강행기, 앞으로 더 많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저의 강행기 재미는 없지만 나름대로 역사를 찾으려고 돌아 다니는데
배울게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2월에 대청호에서 뵙기로 하구요 언제나 좋은시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에 유서깊은역사 한페지를보며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남강 강행기 많은것을느끼고 배웠습니다.
주말이면 펜션잡아 고기에 술에 그렇게 보낸시간이 너무 아쉽게 느껴지는건 왜 일까요.
좋은공부하고 반성도 합니다. 시간내서 추천한곳 저는 걸어선 못가니 이동수단최대동원하여 꼭 가봐야겠내요.
수고하셧습니다,
금강 기대됩니다
남강은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가 많고 한많은 민족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 나는곳이죠
시간 나시면 차량으로 한번 가보셔도 될듯한 곳입니다.
덕유태극종주 꼭 한번 돌아 보시고 자료 부탁드립니다.
공부를 넘많이해서 머리가 뽀사질라 캅니다 ㅎㅎ 잘보고갑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ㅎㅎ 논개와 곽재우 그리고 황석산 전투만 아셔도 되는 길입니다.
2월 세째주 부여에서 기분좋게 뵙기로 하구요
글 감사드립니다.
남강의 물줄기 따라 진양호서 잠시 안식하고 유유히 흘러 낙동강과 합수되어 바다로 이어 지지만, 山川讀法을 보듯 산과 산이 이어져 있고,그 사이에 사람이 깃들어 살고 자연속에 문화와 역사가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네요!
고향에서 가까운 진주,촉석루와 진주성
의 히스토링은 더 몰입하게 됩니다.
남강의 촉석루 맞은편 대나무 숲은
보셨는지요?
진주의 진산인 "飛鳳山"의 봉황이 죽실을
먹고 산다고 해서 조성했다고 합니다.
방장님의 명품 강행기 훗날 누군가가
퍼 날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전에 함 엮어 보이소!
잘 읽고,집어넣고,느끼고 갑니다~~/^ㅇ^/
오늘 금남정맥 졸업 축하드리구요
저는 2월에 금강 졸업할것 같습니다.
아우님의 글 감사드리고 언제나 안전산행으로 몸과 마음 다치지 말았으면 좋겟습니다.
아우님 힘!~
산길도 아니고 강길따라 먼길돌아 남강구간 끝낸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구간도 시멘트길이 많아 발바닦이 불났을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남강구간도 역사의 아픈 상흔들이 많이 있네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시맨트길이 잘조성되어 보다 편리하지만 무릅 고장 날것 같아 걱정이었죠
강줄기 진행 하면서 새로운곳을 많이 알게 되어 좋구요
머리보다 가슴으로 그리는 강이라 더 좋습니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방장님의 걸음은 물 보다 빨리 흐르시는 듯 합니다.^^
남강은 지형적으로 강우가 많은 지역이라 하류에는 홍수의 피해가 많았고, 옛적부터 치수治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수(?)는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맑고, 상류에 오염 원인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맑은데..
하류로 내려갈수록 오염이 심한 강입니다. 그 원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데 수온이 높아진 탓이란 설도 있지요.
수온이 올라가는 원인은 또 무엇일지? 기온탓이니 유속탓이니 유속탓이면 물을 가둔 탓이터이고...
인류는 강을 따라 터를 정하니 강을 알아간다는 것은 삶을 알아가는 것이요.
강을 지킨다는 것은 삶을 지키는 것인지도... 수고하셨습니다.
오염된 강은 결국 사람이 만들고 그물을 다시 깨끗하게 걸러서 먹는 미련이상으로 미련한 인간 본성이라 느껴 지더군요
강물 사랑이 나라사랑 입니다.
윗지방에는 왜란의 흔적은 많지 않은데 ....
4대강 공사로 강물이 흐르지 못해 이런저런 폐해가 나타나나 봅니다.
한방울의 물방울이 바다로 가기까지의 여정을 둘러보는것도 참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한방울의 물이 대0하로 흘러들기까지 숱한 고난의 길이 이어지죠
댐에서 막히면 그물은 썩게 되는데 ... 그물을 다시 먹는 우리네 인생도 그렇구요
한강에서는 대장님과 같이 걸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으니
5월에 한강길에서 뵙겠습니다.
방장님 발길따라 역사 공부 많이 하게 되는군요,
저야 이렇게 발품 팔아 걸어갈 여유도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