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4 - 위화타이레스링위엔에서 국공내전의 그 처참한 상흔을 회상하다!
10월 20일 난징 의 중심가인 씬지에커우 新街口(신가구) 에 있는 호텔에서 지하철을
타고는 난징 남역 1층에 자리한 난징 버스터미널 南京汽车壮途站 에서 내일
黃山(황산) 으로 가는 7시 버스표를 끊은후에 지하철을 타고 중화문 에 내려
10분을 걸어서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 (우화대열사릉원) 으로 갑니다.
“우화대열사릉원” 은 난징 남쪽 중화문 밖 100m 높이 산인데 육조시대인 6세기 전반 梁武帝(양무제)
때에 운광법사 가 경전을 講(강) 할 때 천신이 감동해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내린
곳이라 雨花臺(우화대) 니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우화대열사릉원) 이라 불린
다는데 현대사에서 국민당 정부때 공산당원 10만명이 처형 되었으며 혁명열사 기념관 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동상 앞에 참배하는걸 보니 숙연한 자세에서 애국심 이 높은 것 같네요?
오른쪽길 언덕길로 걸어 올라가니 가게 앞에 관광차 가 서 있길래 탈려고
하니 운전수가 안된다며 저 아래쪽을 가리키며 거기 광장 에서 타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게에서 쇼핑을 마친듯 단체 관광객 이 우르르 타는게 금새 자리가 꽉 차 버리네요?
듣자니 이 산에서만 생산되는 독특한 줄무늬의 돌은 雨花石(우화석)
이라고 불려서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는데 이 사람들은 가게에서 그걸 구경한 것일러나?
만주족 이 이자성의 난을 틈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건국한 淸朝(청조) 는
1661년 건륭제를 시작으로 1795년까지 이어지는 옹정제와 건륭제 치세에
현군들이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신장과 티베트까지 손에 넣으며 성세를 자랑하였습니다.
만주족 滿洲族 은 인구가 100만명에 불과한지라 3억 5000만명 한족 漢族 위에 군림했으니
중국은 광대한 영토와 인구 덕에 자급자족이 가능하므로 서양인과는 무역을 거부
하고 조공 만을 요구하던 높은 콧대는 1840년 아편전쟁 패배 로 일순간에 허물어집니다.
1850년 기독교도 홍수전 의 태평천국의 난 을 청조의 군대가 진압하지 못하니 증국번과
이홍장등 한족 유림 의용군 이 일어나고 침략자인 영국장군 고든이 이끄는 상승군 의
공격으로 1864년 남경을 회복함으로써 14년에 걸친 난을 진압하자 청조의 위신 은 땅
바닥에 떨어지니 한족 지사들이 태평천국군이 내걸었던 멸만흥한(滅滿興漢) 에 나섭니다!
손문 은 1894년 흥중회를 조직하고 1911년 신해혁명 (辛亥革命) 성공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으나 무력을 가진 청조의 대신 원세개 (袁世凱) 가 실권을 차지했고 원세개
사후에 청조의 장군 출신들이 군대를 동원해 세력싸움을 벌이니 북양 군벌 이라고 합니다.
이홍장의 회군에 뿌리를 둔 안휘(安徽)파와 원세개의 신군에 뿌리를 둔 직례파 (直隷派) 만주를
배경으로 등장한 봉천파(奉天派) 등으로, 7개 군벌들이 난립한 혼란한 시대에 국민당 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해 중국 영토를 통일하자는 운동을 하니 북벌 이라
하니 1924년에 맺은 제1차 국공합작 은 국민당과 1921년 탄생한 공산당이 손을 잡은 것 입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합작 은 군벌과 제국주의 에 대항해 국민혁명에 이바지했으니
1920년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 를 발표해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부르주아의 역할 을 중요시한 것이었으니 1923년 쑨원(손문)
- 이오페 선언을 거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공식적인 연합전선 이 형성되었던 것 입니다.
국민당은 “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부조(農工扶助)” 의 3대 정책을 채택하고 공산당원 은
당적을 보유한채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는데 손문 사후에 총통이 된 장개석은
두려움을 느끼니 국민당 총통 장개석은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반공 우파 쿠데타"
를 감행함으로써 국공 합작은 결렬되고 공산당은 수많은 사망자를 내고는 불법화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은 토지혁명 을 추진해 농촌지역에서 세력확장에 주력했으며 모택동 을 지도자로
강서성 “중화소비에트” 를 성립해 난징 정부에 대항하니 10년간에 걸친 1차 국공내전 이
전개되는데 공산당은 장정(長征) 으로 연안으로 쫃겨가 항일민족통일전선 을 제창하자 1936
년 북방군벌 장학량이 공산당토벌 독려를 위해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한 서안사건 이 일어납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 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하자 일치항일(一致抗日) 제2차 국공합작
이 성립되니 공산당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국민당은 합작에 두려움 을
느껴 1938년경부터 적전내전이 시작되어 분열을 거듭하던 중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협상이 결렬된 1946년 6월 국민당은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 을 개시합니다!
미군 의 지원으로 국민당군 은 전투기와 탱크에 대포 등 중무장인데 비해 공산당군은 소총 등 재래식
후진 무기에다가 병력수도 국민당군 430만에 공산당군은 120만으로 월등한 우위라 내전은
곧 끝날듯 보였는데 1947년 3월 국민당군의 후쫑난 이 20만 병력은 북진하여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 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점령지를 늘려 병력을 분산시키는 오류를 범합니다.
게다가 훗날 베트남전에서 보듯이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정부패 와 사익 추구
무능과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반된 민심 이
어우러져서는 1948년 부터는 전세는 오히려 공산당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됩니다.
1948년 가을 린뱌오(임표) 가 지휘한 조선인 이 대거 포함된 동북 인민해방군 이 만주에서
30만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집니다.
그러니까 만주에서 공산당군의 승리에는 "조선인들이 참여" 가 결정적인 역활을 했지요?
인민해방군 은 1949년 1월 31일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 에는 이곳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남경) 을 함락하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공산당군 은 나룻배 를 타고 양쯔강을 건너는데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병력수는 완전히 역전되어 민심을 잃은데다가 패배를 거듭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150만 으로 줄어든데 비해 공산당군은 지원자가 쇄도 하여 400만 병력에 이르렀습니다.
5월 27일 중국 대륙의 최대 도시라는 상하이까지 손에 넣자 장객석은 대만으로 후퇴 하니.....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 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인과 조선인 연합군 만여명을 동북항일연군 이라
했는데 주진, 강건, 김일성, 최현, 최용건, 오백룡, 임춘추 등이 부대장으로 있었으니
1939년 일본군은 50만을 동원해 공격하니 주보중등 소련으로 후퇴해 88여단에 합류합니다.
1946년 6월 만주에서 국공내전 이 발발하자 1930년대 처럼 공산군에 참전한
조선인은 12만명 으로 이중에 살아남은자 들이 상당수 조선으로 인계됩니다.
1949년 7월 선양에 있던 방호산의 166사단이 먼저 넘어오고 이어 8월에는 장춘에 주둔하던
김창혁의 164단등을 합쳐 4만명이 북한군에 편입되어 6.25 남침 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저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승리 했더라면 북한은 고립되어
감히 남침을 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니 통탄스러운데.....
중공의 등장 으로 일어난 6.25 를 생각하노라면 몇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1. 미스터리 : 6.25 하루 전날 국군은 3개월째 계속해온 비상 경계태세를 해제 하고 장병의
3분지 1 을 휴가내지 외박으로 내보내며 트럭도 수선을 위해 후방으로 철수시켰으며
서울에 장교구락부 낙성식 을 열어 수도권 장교들이 대거 참석해 술과 춤으로 파티 를 엽니다.
한국 육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모두 미군 군사고문단 의 강권이라! 그런후 고문단
지휘부는 동경으로 외박차 가버리고, 백선엽 1사단장등 장군들은 12시에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4시간후 6.25 남침이 벌어졌으니.... 춘천의 6사단을 제외한 수도권은 무방비 라?
2. 김일성의 오판 :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보듯 의회의 동의 를 얻어야 하니 전쟁 참가에 1년
이상 소요되는데, 주한 미군을 철수한후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 을 발표하니 미국의 방위선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선으로 한국과 대만을 제외 했으며... 1949년 8월 장개석이 진해에서
이승만과 회담을 하자 놀란 미국은 이승만 에게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면 원조를 끊겠다고 경고합니다.
이러니 김일성은 3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낸다면 미국이 참전하는 일은 없을것 이라고 확신했는데 한국군
이 비상경계태세 까지 해제하고 장병 3분지 1을 휴가, 외박 보내며 장교들이 부대를 떠나 서울에서
술에 취해 잠들자 남침한 것인데... 주말인데도 유엔안보리 가 소집되고 트루먼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즉각 한국파병을 결정하니 그럼 미국이 쳐 놓은 덫 에 경험이 일천하고 어리석은 김일성이 걸려든 것이라?
기다리기나 한듯 규슈에 주둔중인 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부대) 는 전쟁이 일어나지
불과 6일만인 7월 1일 부산에 상륙했고, 딘 사단장도 7월 3일 대전에 들어왔으며
1대대 (스미스부대) 는 북상하여 7월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 를 벌입니다.
사단 전체가 부산에 상륙 한 것은 3개월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닌, 전쟁발발 9일 만인 7월 4일
이니 가히 "전광석화" 라고 할만한데..... 미군의 신속 과감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조선군 은 미 24사단을 대전에서 격파하고 딘 사단장을 포로 로 잡습니다.
3. 맥아더의 오판 :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저 후진국 북한군대는 미군의 모습만 보고도 줄행랑칠
것이라 오판했으며,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은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며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데..... "중공군은 평양이 위험해지자" 압록강을 넘어왔으니 1.4후퇴 로 이어집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포로로 잡한데도 저들은 소수의 정찰대라고 우기며 끝까지 인정을 안합니다?
역지사지 易地思之 라! 임진왜란 때에 7년간 합계 25만에 가까운 대병을 파병했다가
재정파탄으로 인해 망한 명나라 예에서 보듯이, 중국은 세계 최강대국
미군이 중국 국경선에 주둔 하는 상황은 절대로 용인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어려운 처지에도 파병한건 "평양이 왜군에 점령" 되었기 때문입니다!
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중공군이 평택까지 밀고 내려오자 애초에 3.8선 돌파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적이 있었던 영국, 캐나다와 호주 및 뉴질랜드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국을
압박하여 중공에 "현전선에서 휴전" 을 제의하는데, 모택동과 주은래가 이를 거부 하자
미군은 융단폭격 으로 반격하였으니... 만일 받아들여졌으면 대한민국 국경선은 충청도선???
5. 과유불급 : 맥아더가 평양 앞과 원산 선에서 진격을 멈추고 중국측에 더이상 북진하지
않겠으며 그 북쪽에 북한 정권을 용인하겠다고 약속하고 휴전 을 제의했으면....
중공군은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며 김일성은 패배 책임으로 실각하고 허약해진 북한은
훗날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신뢰를 쌓게되면 동독처럼 흡수통일 되었을텐데 원통하네요!
과유불급(過猶不及) 에 역지사지(易地思之) 라!!! 이승만과 맥아더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에 조금만 밀어 붙이면 압록강에 도달해 통일된다며 중공군 개입은 있을수
없다고 오판 했으니.... 이는 매사를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니! "휴전선이 대동강과 원산" 으로 될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입니다!
雨花臺烈士陵園(우화대열사릉원) 은 1927년 제1차 國共合作(국공합작) 이 결렬되면서
공산당원 및 反(반)국민당 세력 에 대한 숙청의 피바람 이 분 곳인데 이후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할때 까지 10만명 에 달했다는데...
기념비에는“死難烈士萬歲(사난열사만세)”라는 毛澤東(모택동) 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고는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우화대열사릉원) 을
나와 택시를 타고는 중화먼 中华门 (중화문) 에 내리니
참으로 거대한 성벽과 육중한 성문 이 보는 사람을 압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