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임진왜란 초기 충주 전투에서 전사한 패장이다. 역사란 원래 승자 중심의 기록이지만 가끔은 패자의 슬픈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전술 차원에서 또는 국가 전략 및 시대상황의 차원에서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립 장군. 그도 충주 전투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기 전에는 화려한 승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22세 때인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莩事) 등을 지내고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됐다.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돼 북변에 침입한 이탕개(尼蕩介)를 격퇴한 다음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오르는 등 화려한 시절도 있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됐다가 이듬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가 돼 빈약한 병력으로 충주의 달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왜군이 예상 외로 물밀듯이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도순변사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왜군을 막게 했다. 그리하여 신립 장군은 4월20일 종사관인 의주 목사 김여물(金汝물)과 함께 도성을 떠나 남하하면서 군사를 모아 8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26일 충주 남쪽의 단월역(丹月驛)에 진영을 설치했다. 이때 왜군 제1군인 고니시(小西行長) 군대가 조령 남쪽의 문경에 도착해 있었다. 신립 장군은 충주 목사 이종장(李宗長)·종사관 김여물 및 휘하 장령(將領) 수명을 거느리고 조령으로 달려가 지형을 정찰했다. 조령의 지형을 정찰한 김여물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적은 대병력이므로 소병력을 가지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불리하다. 적이 통과할 험지(險地)에 복병을 설치, 좌우에서 협격하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한성으로 물러나 한성을 지키자.” 이종장도 김여물의 의견에 동조했다.
“지형이 험한 지역을 아군이 먼저 점령, 방어하는 것이 상책이다. 조령의 험준한 지역을 이용하자. 주변에 기치(旗幟)를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을 피워 적을 기만하며 기병(奇兵)을 써서 적을 제압하도록 하자.” 그러나 신립 장군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적을 개활지로 끌어내 철기로 무찌르면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적이 지금 조령 밑에까지 와 있다는 데 우리가 조령으로 진출하다가 만약 적이 조령에 도착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군은 훈련 상태가 미숙한 신병들이므로 사지(死地)에 빠져야만 투지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므로 배수진을 쳐야 한다.”
신립 장군은 조령 방어를 포기하고 단월역으로 돌아가 그곳에 도착해 있던 순변사 이일·죽령 조방장 변기를 만나 다시 한번 적정(敵情)을 확인한 다음 두 장수를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를 충주성으로 이동시켰다. 27일 밤을 충주성에서 보낸 신립 장군은 평지에서 기병(騎兵)으로 적을 무찌른다는 작전 계획을 세우고 이튿날 이른 아침 전 병력을 탄금대(彈琴臺)로 이동해 남한강과 달천(撻川)이 합류하는 중간 지대의 저습지에 배수진을 쳤다.
그동안 고니시군은 문경에서 하루를 묵은 뒤 27일 새벽 문경을 출발, 종일 조령을 넘어 이튿날 정오 무렵 단월역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군은 조령에 조선군의 복병이 있을 줄로 알고 조심조심 접근했으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조령을 넘었다. 그리하여 고니시군 1만5000명은 그날로 충주성에 진입하려고 북상하다가 탄금대의 신립군과 접전을 벌이게 됐다. 왜군은 주장 고니시군이 중앙을 담당하고 소(宗義智)군이 좌익, 마쓰우라(松捕鎭信)군이 우익이 돼 탄금대를 삼면에서 포위했다.
이들의 선봉이 신립군의 중앙으로 접근하자 신립 장군은 기병 제1진 1000여 명을 출격시켜 적을 제압한 다음 뒤이어 제2진 1000여 명을 출격시켜 왜군을 단월역 쪽으로 격퇴했다. 왜군은 병력을 증강해 재차 신립군의 전방으로 달려들었다. 신립 장군은 제3진 2000여 명을 투입, 또다시 일본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신립군은 병력·무기에서 열세할 뿐만 아니라 전투지역이 습기가 많은 농지·초지였기 때문에 수렁에 말발굽이 빠져 기병의 기동력이 저하됐다. 그런 가운데 신립군은 네 차례나 기병으로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끝내 전세가 기울어지고 말았다. 이에 신립 장군은 전 병력에 최후의 공격을 하도록 명령, 왜군을 무찌르다가 마지막 순간이 닥치자 남한강으로 투신해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종사관 김여물도 적진으로 돌격, 신립 장군의 뒤를 따라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충주 목사 이종장도 마지막까지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했다.
p.s 신립장군은 교과서에 나오는것처럼 허무하게 당한것만은 아니였습니다. 어떤사이트의 모분은 이건 단순히 군사물자와 병사오래버티기의 싸움에서 밀려서 진거라더군요. 그리고 저 8천명중 정예는 5백. 패잔병 3천. 나머진 급하게 징집된 병사라더군요.
첫댓글신립이 배수진을 치는 건 좋았었지만, 신립은 시대의 흐름을 못 읽은 인물입니다. 그 당시 일본은 조총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신립이 데리고 다녔는 군병을 활병들이었으므로 왜병에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비운의 장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리석은 장수라고 할 수 있겠죠~~
첫댓글 신립이 배수진을 치는 건 좋았었지만, 신립은 시대의 흐름을 못 읽은 인물입니다. 그 당시 일본은 조총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신립이 데리고 다녔는 군병을 활병들이었으므로 왜병에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비운의 장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리석은 장수라고 할 수 있겠죠~~
실지적으로 뒤에는 강이 흐르고 앞에는 조총을 든 왜병이 오니, 한마디로 사면초가 였던 거지요...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조선병들은 그냥 생명을 내준 셈이라고 할 수 있죠. 신립의 잘못된 판단이 병사들을 사지로 몰은셈이죠.
만약 신립이 성 위에서 싸웠으면 이겼을 지도 모르죠~~
마쓰님 다음엔 김시민이나 사명대사로 올려주세용
잼있내요.다른 후속편이 기대 됩니다.
신립의 군대중 정예는 활병이 아니라 기병이었습니다. 조령에서 기병의 활동에대한 문제또한 신립이 배수진을 칠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있더군요.
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저도 신립의 작전이 최선의 작전이었다고는 생각안합니다..^^ㅎ
푸해해해 그러니 순신하시라니까..<---뭔말이지...;; 내가생각해도..순신짱..좋아..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