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만호(洪滿浩) 약력;
1940년 흑룡강성 해림 출생.
중앙민족대학 한어문학과 졸업.
흑룡강신문사 기자,주필,사장 력임.
기자문선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기타 수필, 단편소설, 실화문학, 번역 작품 다수.
실화문학 “세계를 향하여”(중문) 흑룡강성기업인실화문학 응모 1등상 수상. 《<동해>의 침몰》등 천지문학상 등 수상.
----------------------------------------
단편소설
리혼의 변수
홍만호
리혼을 아이들의 소꿉장난으로 아는 세월에 그들도 마침내 리혼을 선택했다. 리혼의 종착역에 이르기까지는 갈등과 고뇌와 아픔이 엇갈렸지만 정작 결정을 짓고나니 결말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했다.
남편은 한철민, 50세, 조선족, 중한합자목제품유한공사의 부사장. 안해는 진설매, 46세, 한족, 시인민병원의 간호장.
별로 유족하진 않아도 별로 그리운 것 없이 오손도손 20년 가까이 살아온 부부다. 그런데 근년에 가탈이 생겨 삐걱거리다가 마침내 헤여지기로 결정하였다. 남편은 가정은 가정대로 유지하면서 숨은 애정행각을 계속하고싶었지만 넘을수 없는 벽에 부딪치고말았다. 가정을 유지하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안해가 드디여 결심을 내리고 리혼의 무기를 내들었던것이다.
그들은 협의리혼을 선택했다. 협의는 순탄하고 깔끔했다. 첫째, 자식문제. 아들은 남편이, 딸은 안해가 맡기로 한다. 둘째, 집문제. 안해에게 주기로 한다. 셋째, 집이 낡은것을 감안해 남편이 집을 안해의 요구대로 수리해주기로 한다. 수리비는 남편이 책임진다. 넷째는 없다. 두 자식을 공부시키느라 아득바득하다보니 분할할만한 적금도 없었다.
리혼협의는 구두로 합의되였다. 담판이 아니라 한쪽에서 부르면 한쪽에서 쓰는 식으로 진행되였다.
얼핏 보아도 남편쪽이 손해본것 같지만 남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리혼의 장본인이 그였으니까.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1
행동으로 리행해야 할 그들의 협의는 집수리로 압축된다.
이 집은 그들이 부대에서 전근되여 이 도시로 온후, 남편 한철민의 새 직장 시선전부에서 마련해준것이다. 그때만 해도 교외이던 이곳은 농촌이나 다름없었지만 진설매의 새 직장 시인민병원과 가까운 편이여서 그들은 이 집을 선택했다. 집은 삼간단독주택이고 정원까지 있어 조용하고 아늑했다. 둘은 이 집을 알뜰히 꾸리고 정원도 정성들여 가꾸었다. 앵두며 능금도 심었다. 그런데 지금은 낡았다. 워낙 로씨야식 건물이여서 골조는 또치까처럼 튼튼했지만 내부구조는 시골집 그대로였다. 설매는 집구조며 장식을 현대식으로 확 바꾸어놓으려 했다. 침실, 거실, 주방 그리고 샤와기를 갖춘 화장실 그리고 튼튼한 울타리…녀자가 혼자 살자면 이 모든것이 필요하다고 설매는 주장했다.
리혼이 결정되자 철민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옭아매던 쇠사슬에서 풀려나온듯 홀가분한 감을 느끼였다. 몇달간 계속된 랭전상태는 지긋지긋한 감옥생활 그 이상이였다. 말없이 살림을 꾸려가며 빈틈없이 남편의 뒤바라지를 해오던 안해에게 그런 매몰찬 구석이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다. 하긴 성정이 서근서근해도 대바르고 자존심이 강한 안해였다. 중국말대로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일은 참지 못하는” 사람이였으니 그의 외도를 보고 넘길수 없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울며불며 싸우지도 않았다. 욕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애걸같은것은 더욱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달을 지켜보다가 딱 부러지게 결판을 냈고 그는 속절없이 계하수가 되여버린것이다. 돌에 머리를 얻어맞은 물고기처럼 어리벙벙하던 그에게 찾아든 해방감도 잠시, 마침내 모든것을 잃은듯한 허탈감이 그를 휩쌌다…
그래서인지 집수리를 요청한 안해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안해의 요구를 그 이상으로 들어주며 마지막 선물을 유감없이 남겨주려 했다. 그는 설계를 손수 했다. 부대에서 토목일을 해본 그는 건재구입을 도맡았고 시공을 지휘하면서 틈만 있으면 일도 같이 했다.
모래, 벽돌, 세멘트가 속속 실려들어와 쌓였다. 일군들이 집안의 간벽을 치기 시작했다. 집은 삽시간에 공사장으로 변하였다. 그의 마음도 공사장으로 변하였다…
저녁, 일군들이 돌아가자 집안은 조용해졌다. 철민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정지로 들어섰다. 소래에 더운물이 담겨져있고 옆에 새 수건이 걸려있었다. 전에 없이 손님대접이라도 하는것 같았다. 철민은 세수를 했다. 방으로 들어갔다. 온돌에 앉은뱅이상이 놓여있고 상우에는 그가 좋아하는 랭채안주가 반기고 맥주 한병이 상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있었다. 당뇨병에 무난하다는 캔맥주였다. 한때는 모임이 있을 때 다른 맥주는 해롭다며 캔맥주를 가방에 챙겨가지고 다니며 그를 섬기던 안해였다. 그 맥주가 오래간만에 등장한것이다.
설매가 앞치마바람으로 나타났다. 불기우리하게 탄 철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힘든 일을 하지 않던 사람이 일군들과 함께 막일까지 마다하지 않는 그가 측은해보였다. 설매는 조심스레 맥주를 따르고 주방으로 나갔다. 철민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시원하였다. 맥주 한병이 금방 굽이 났다.
이때 설매가 만두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맥주는 그만해요. 한병뿐이예요.”
캔맥주도 한병으로 제한하던 그때의 그 본새가 다시 연출되였다. 철민이도 그때처럼 순순히 따랐다.
철민은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맛이 류달랐다. 일을 하여 시장한 탓일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만두맛이 별다른데?”
“글쎄요.”
언젠가 먹어본것 같은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귀소예요.”
나귀고기소만두! 그제야 생각났다. 그들이 결혼하여 첫 설을 맞이하던 그믐날밤, 설매가 빚은 만두가 바로 나귀고기소만두였다. 입에 넣으면 향긋한 맛을 내며 살살 녹는게 별미였다. 만두의 고수인 그녀는 이곳으로 온 뒤에도 가끔 만두를 했지만 이런 만두는 처음이였다.
“어떻게 이렇게 귀한것을…”
“마침 만나서 사왔어요.”
설매는 별것 아니라는듯 천연스럽게 말했다.
당뇨를 걱정하여 나귀고기에 일부러 나물을 많이 곁들인 만두소, 그제는 각 방을 쓰던 랭전의 나날에도 채식위주의 당뇨식단만은 계속되였다는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야근길에 오르는 안해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저도 모르게 시리였다.
리혼협의를 리행하는 첫날, 두 당사자는 헐리고 뜯기는 이 집처럼 마음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랭전의 막이 내리면서 찾아온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끼였다.
2
집안의 일부 간벽이 제거되였다. 설계도에 따라 인부들이 간벽을 새로 쌓기 시작하였다.
철민은 종일 장식재료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말복이라지만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다. 거리와 상점을 메운 인파에 밀려다니다보니 온몸이 땀벌창이 되였다. 땀줄기가 등골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건재시장골목을 빠져나온 철민은 마침 목욕탕집을 발견하였다. 그는 무작정 목욕탕집으로 쳐들어갔다. 옷을 훌훌 벗어 옷궤에 넣고 온탕에 뛰여들었다. 땀이 비오듯 솟아올랐다. 그렇게 시원할수가 없었다. 한참 땀을 들이다가 온탕에서 나와 때밀이침대에 누웠다. 때밀이공이 수건을 손에 감싸쥐고 때를 밀기 시작했다.
“때를 밀만 한데요.”
“예, 집수리를 하다보니…”
“여기 수술자리가 있네요.”
때밀이공이 아래배 오른쪽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예, 맹장수술을 했어요.”
맹장수술, 그랬다. 수술후 감염으로 지금도 허물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오래만에 그 말을 떠올린 그는 피씩 웃음이 나갔다. 자다가도 그 뜬뜬한 맹장수술자리에 손이 가면 피씩 웃음이 떠오르던 그였다. 오래도록 잊었던 그 웃음이 오늘따라 다시 그의 입귀에 피여올랐다.
“왜 웃습니까? 제가 뭘…”
“아니요. 그런 일이 있습니다.”
20여년전이였다. 부대에서 임무집행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그는 배가 뒤틀리듯 아팠다. 아침부터 지긋지긋 아프긴 했어도 체한것쯤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것 같았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이윽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는 길가에서 왝왝 토했다. 숙소까지 걸어갈것 같지 않았다. 겁이 더럭 난 그는 뻐스를 잡아타고 군병원으로 갔다. 병원화장실에서 또 한번 토하였다. 급진결과 급성맹장염이였다.
수술이 결정되였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처치실로 불러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원이 다가왔다. 다짜고짜 그의 바지를 내리였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거시기를 잡아쥐였다.
“아니, 뭘 하려는겁니까?”
“…”
간호원은 말없이 고무망치로 그의 거시기를 톡 쳤다. 그 와중에도 그놈이 불끈 성을 냈던것이다.
“아갸갸! 좀 살살 해요.”
“말하지 마세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간호원은 그의 거웃을 면도칼로 밀기 시작했다. 순간 따끔했다. 살을 벴던것이다.
“아프세요?”
간호원은 미안한듯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
“아이, 피가 나네. 아프지요?”
“…”
“왜 대답을 안하세요?”
“말을 하지 말랬잖아요.”
순간 환자가 눈을 떴다. 둘의 눈길이 부딪쳤다.
“호호호…”
이 간호원이 진설매였다. 그들은 이렇게 만났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수술후 수술자리가 감염되여 잘 아물지 않았다. 그래서 보름이나 병원신세를 지게 되였다. 아니, 설매의 신세를 지게 되였다. 식사를 못하는 철민이를 위해 죽을 가지가지 바꾸어 가져왔고 그를 부축하여 병원구내를 거닐기도 하였다. 밥을 먹게 되자 어디서 구해왔는지 김치며 깨잎 같은것도 가져와 그의 입맛을 돋구어주었다.
철민은 설매가 꼭 마음에 들었다. 설매가 병실에만 들어서면 병실이 금세 환해지는것 같았고 아픔이 거짓말같이 사라지는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까지라도 그대로 병원에 눌러있고싶었다. 하지만 병이 완쾌되여 퇴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철민이는 기회만 있으면 병원으로 달려갔고 그것도 모자라 편지공세를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나이 서른이 다된 로총각에게 설매의 출현은 하늘이 준 은총이였다. 사회와 멀리 떨어진 변방오지에서 이대로 홀애비로 늙어버리지나 않겠나 적정하던 그였다. 그러한 그에게 민족따위는 아예 거론할 여지도 없었다…
목욕탕집에서 나온 철민은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미 서글픈 웃음으로 변해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이제는 더는 이어갈수 없는 먼 옛이야기일따름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도착했을 때 마당 한쪽에 조촐한 저녁상이 차려져있었다. 얼음같이 찬 캔맥주 한병에 돼지족발 한접시와 도토리묵 한접시, 고추나물무침 한접시, 역시 그가 좋아하는 반찬들이였다. 그가 맥주잔을 시원히 기울이고있을 때 설매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메밀국수를 얼음같이 찬 육수에 말아 상에 올리였다. 금방 누른듯 졸깃졸깃하고 시원한 칼칼한 랭면을 후르륵거리는 철민은 가슴이 후련히 열리는것 같았다.
하나는 집수리에 모든 정성을 다하고 하나는 갖은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챙기며 시중을 들었다. 옛시절로 돌아간듯한 분위기가 낡은것을 쳐내고 새것으로 바꾸는 이 집에 감돌았다.
3
철민이의 설계에 의하면 남향 한쪽은 거실이고 그옆 서쪽은 두칸으로 된 침실이였다. 그런데 그중 안칸을 지금대로 온돌방으로 해달라는것이 설매의 요구였다. 이젠 굳이 온돌방에서 쉬겠다고 할 사람도 없을텐데 왜 온돌방을 고집할가?
하긴 그 온돌방이 보통 온돌방이 아니였다. 그들이 이 집에 살림을 차린지 얼마 안되여 시골 동생네 집에 사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이 집을 찾았었다.
일찍 남편을 잃고 어렵게 두 아들을 길러낸 어머니는 철민이의 혼사를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이쪽으로 나오면 발에 채우는게 조선족처년데 하필이면 말도 안 통하고 습관도 다른 한족인가 말이다. 더구나 가족의 대를 이어갈 맏이가! 그러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어머니는 이 혼사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찜찜한대로 새며느리를 받아들였고 손자손녀를 갖추갖추 낳아주면서부터는 며느리를 미워할래야 미워할수 없었다. 그래서 맏이네 집으로 나들이를 하기로 작정을 한것이였다.
그날 저녁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설매는 지지고 볶고 하며 푸짐한 밥상을 차렸다. 작식에는 어지간한 조리사 저리 가라 할만큼 자신이 있는 그였다. 아이들까지 하여 다섯 식솔이 밥상에 빙 둘러앉았다. 며느리가 포도주를 한잔 가득 부어 한손으로 어머니에게 올리며 “아마니, 술 먹어!” 하고 공손히 말했다. “어머니, 술 드세요!” 하는 말을 남편에게서 배워 몇번이나 외워둔 그였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를 마주하자 그 말이 까맣게 잊어지고 엉뚱한 말이 튀여나간것이였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확 어두워지며 일그러졌다. 그러잖아도 정지에서 남편이름을 동네강아지 부르듯 불러가며 이일저일 시키던 며느리가 눈꼴 사나왔는데 이건 또 뭐야, 어른에게 한손으로 술을 권하는것도 모자라 술을 먹으라니? 어머니는 기가 찼다. 그래도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는 며느리를 일별하고는 술을 쭉 냈다. 그런데 집을만한 반찬이 없었다. 전부 고기붙이인데 온통 기름투성이여서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메슥할 지경이였다. 어머니는 기름에 튀긴 생선 몇점을 집고나서 귀여운 손자손녀에게 고기채를 듬뿍듬뿍 집어주었다. 걔들만 보면 뒤틀리던 마음도 풀리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잠자리가 문제였다. 온돌에 습관된데다 풍습성심장병까지 있는 어머니는 침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루밤을 선잠으로 설친 어머니는 이튿날아침 숟가락을 놓자바람으로 동생네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계시면 풋정일지라도 붙일수 있지 않을가 했던 설매의 기대는 이렇게 무너졌다.
“안방에 온돌을 놓읍시다!”
설매의 제의로 놓여진 온돌이였다. 그후 설매는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족습관을 익히려고 안깐힘을 썼다. 그래서 어지간한 조선말을 할수 있게 되였고 조선족의 례의범절을 익히였고 조선족음식도 가지가지 할수 있게 되였다. 따라서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차츰 가까와졌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후부터 철민의 태도가 백팔십도로 달라진것이였다. 장국생각이 난다 해서 정성들여 장국을 해놓으면 짜다 싱겁다 타발이고 김치도 해놓으면 제맛이 아니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럴수록 밖에서 식사하는 때가 잦아졌고 일찍 퇴근해도 올방자를 틀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텔레비죤을 볼지언정 부엌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혹 그의 이름을 부르며 뭘 좀 도와달라 하면 “왜 함부로 남편의 이름을 부르냐?” 며 버럭 화를 내군 했다. 이런 일은 시간이 갈수록, 그가 조선족들과의 접촉이 많아질수록 우심해갔다. 그래도 설매는 참았다. 이 민족부부는 젊을 적에는 몰라도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히 제 민족습관을 찾는다는 그런 심리때문일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게다가 이 집의 엄연한 주인으로 남편도 그의 말에 꼬박꼬박 따르는데 습관된 설매였다. 그러니 조선족의 남자대장부주의 같은건 아예 먹혀들지도 않았다. 그는 남편의 변화된 태도를 아이들의 트집쯤으로 알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남편의 이름을 팡팡 불러댔고 그래서 남편이 야단을 쳐도 어느 동네강아지 짖는가 하는 식으로 대수롭잖게 넘겨버렸다. 그것이 남편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그를 더욱 조선족녀성에게로 떠밀게 하였고 드디여 리혼의 불씨로 묻히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꼭 온돌을 놓아야 할 특별한 리유라도 있소?”
철민이가 궁금하여 물었다.
“그저요. 어머니가 손녀를 보러 오셨다가 묵어가실수도 있고 또 제가 늙으면 온돌을 찾을지도 모르구…”
설매의 대답에 철민은 저도 모르게 서글퍼졌다. 그런 앞날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그였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철민이 한참 생각하다가 다소곳이 서있는 설매를 쳐다보았다.
“두칸에 다 전기온돌을 놓기요. 침대를 쓰려면 그 우에 침대만 놓으면 되니까. 불을 땔 필요도 없고 방도 더울테고…”
“그게 좋겠네요.”
철민을 바라보는 설매의 눈이 반짝하였다. 너무도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정답고 자상한 말이였다.
설매는 오래간만에 따뜻한 마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밖에선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철민이 창고에 들어가 비옷을 찾아들고 뒤쫓아갔다.
그날 저녁 집안은 어수선해도 밥상은 여전히 푸짐했다. 상에는 몇가지 밑반찬에 보글보글 끓는 메기탕 그리고 오량액 한병이 놓여있었다…
4
집수리가 막바지에 접어들고있었다. 마침 토요일이여서 설매도 집에 있었다. 설매는 집안거두매에 팔을 걷어붙였다. 철민은 조명기구며 바꾸어야 할 가구들을 사려고 상점으로 갔다. 같이 가보자고 했지만 설매는 철민의 눈을 믿는다며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갔다.
그가 가구상점에서 한창 쏘파를 고르고있을 때 누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녀였다.
“호호호, 선생님, 여기서 만났네요! 요샌 왜 전화도 안 받으세요? 얼마나 걱정을 했다구요.”
“그래? 그럴 일이 있었어.”
철민이 열적게 한마디 했다. 그녀만 보면 마음이 들뜨고 눈이 빛나던 그였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가구를 돌아볼가 해서요. 자기도 가구를 보러 왔지요? 아이, 기차라, 우리 둘의 생각이 어쩜 이렇게 딱 맞을가?”
그녀의 호들갑에 철민은 어정쩡했다. 아니 “자기”는 뭐구, 둘의 생각이 딱 맞는다는건 또 뭔가?
“무슨 말을 하는건데?”
“거 있잖아요, 새 살림을 차리는바에는 낡은 가구들을 싹싹 다 바꿔치우자구요. 제가 그랬잖아요? 잊었어요? 우리 같이 골라봐요. ”
“아니, 새살림이라니?”
“아이, 선생님두 시치미는…”
이건 말 그대로 주인은 떡 줄 생각도 없는데 손님이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러는거요? 내가 처음부터 뭐랬소? 결혼은 안된다구…”
철민은 짐짓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흐물떡거리였다.
“그때는 그때구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그쪽에서도 리혼을 제기했다면서요!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구…”
“좀 이러지 마오. 리혼이 뭐 아이들 소꿉장난인줄 아오?”
이건 철민이가 알고있던 그녀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2년전이였다. 부대로부터 민간사회로, 조선족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은 철민을 어딘가 혼란스럽게 했다. 중한합자회사의 부사장으로 부임되면서 한국인, 조선족들과의 교제가 잦아지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저녁이면 이런저런 모임이 없는 날이 드물었다. 처음에 동부인하는 모임에 그도 안해를 데리고 갔었다. 그러나 안해는 개밥에 도토리격이였다. 안해는 잔뜩 주눅이 들었고 그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후 안해는 자연히 그런 모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때는 때라 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달라지고 “혼외련”바람이 이 도시에도 불어왔다. 시내에는 판에 박힌듯한 부부생활에 권태감을 느끼고 새로운 자극을 찾거나 부부간 한쪽이 남아있어 외로움에 모대기는 중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나이의 그러한 남녀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외로움을 달래고 이성에 대한 갈증을 푸는 모임이 생겨났다.
이런 모임에 끌려다니다가 만난것이 그녀였다. 갓 마흔에 그녀는 나이보다도 젊어보였고 몸매도 쑥 빠진 편이였다. 무엇보다도 첫눈에 반한듯한 숯불같이 이글이글하는 그녀의 정열과 애교가 그의 넋을 빼앗아갔고 그의 몸을 달구었다. 그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가간것 같았고 사위여가던 사랑의 불꽃이 다시 그슴에서 활활 타오르는것 같았다. 그후 그들의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드디여 그녀는 어느때까지 도적련애를 할수 없다며 결혼을 요구해나서기에 이르렀다. 그건 안된다며 철민이는 딱 잡아뗐지만 그녀는 잡은 고삐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한편 철민의 가정은 걷잡을수없이 해체의 위기로 치달았다. 철민이가 죄책감으로 평소이상의 친절을 베풀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설매의 의심을 자아냈다. 마침내 남편의 외도는 들통이 났고 둘은 각 방을 쓰기에 이르렀다. 워낙 말수가 적은 설매는 아예 입을 걷어맸다. 단란하던 가정에는 무덤속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런 랭전상태가 몇달 지속되였다. 남편은 죄진 사람처럼 안해의 눈치만 살폈다. 사랑을 잃은 부부, 그것도 부부인가? 자식을 위해서라도 리혼은 막아야 한다고 남편이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렸지만 그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설매는 드디여 마음을 정하고 리혼을 제기하였다…
“아유, 어쩜 우리 선생님이 화를 다 내시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녀가 철민의 팔을 달싹 끼며 아양을 떨었다.
“화 푸시고 우리 분위기 좋은데 가서 맥주 한잔 하자요.”
“왜 애들처럼 경망을 떨어요?”
철민이 눈을 흘기며 슬쩍 팔을 뺐다.
“지금 집수리를 하고있어. 눈코뜰새없이 바쁘단 말이요. 집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전화도 하지 말고. 내 말 알아들었어요?’
“알-아-들-었-어-요.”
그녀는 눈을 할끗해보이고나서 “바이바이”하고 손을 흔들고 달랑달랑 가버렸다.
그녀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톡톡 튀는 귀여워보이던 그녀의 일거일동이 오늘따라 어쩐지 마음에 걸리였다.
만약 리혼후 그녀와 결합한다면 과연 여생을 같이 해줄 배필이 될수 있을가? 그동안 그녀와의 관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들뜬 련애의 행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하지만 생활이란 그것만이 아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니다. 설령 참된 감정이라 해도 사랑은 시련을 요한다. 성적자극을 위한 만남은 더우기 쟁개비처럼 부르르 끓다가 식어버리기 마련이다…리혼이란 몽둥이에 정수리를 얻어맞고나서야 철민은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랭정하게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날 오후 철민은 기어이 설매를 데리고 상점으로 갔다. 어쨌든 설매가 쓸 물건들이라면서. 설매는 철민이가 골라놓은 가구와 조명기구를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다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모양과 재질, 색상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기호를 그렇게 맞추어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였다.
그날 저녁은 개고기파티였다. 집수리를 마무리지으며 일군들을 청했다. 개 한마리를 사다가 설매가 손수 음식을 장만했다. 개고기 편육, 내장, 개장에 랭채, 식단은 간단해도 푸짐했다.
일군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시고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개장은 처음 먹어본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한 친구는 집을 이렇게 꾸려놓으니 신방 같다며 언제 잔치를 하느냐, 축하하러 오겠노라며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
“그건 비밀이예요.”
설매도 상긋 웃으며 우스개를 받았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철민이도 빙그레 웃었다.
이 집에 오래만에 웃음이 넘쳤다.
5
이튿날, 설매의 제의로 둘은 시골에 있는 동생네 집으로 갔다. 마지막 걸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매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런 그와 함께 동행하는 철민의 마음도 가볍지 않았다.
뻐스는 약 한시간 반 가량 달려 동생네 집이 있는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골목길을 따라 동생네 집울안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한창 따놓은 붉은 고추를 엮고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니 이게 누구야! 말도 없이 어쩐 일이니?”
아들며느리의 인사에 어머니는 몸을 일으키며 반가와 어쩔줄을 모른다.
“너무 오래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설매가 다가가서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어머니는 며느리의 손에 들린 보따리를 받으며 혀를 끌끌 찬다.
“오면 그저 올거지 웬 물건이냐? 어서 들어가자.”
“그런데 도련님과 동서는요?”
“오, 비온 뒤라고 둘 다 산에 버섯 뜯으러 갔다.”
방에 들어가 앉아 설매가 가방이며 보따리를 풀었다. 어머니앞으로 겉옷으로 입는 털세타 한견지, 도련님앞으로 운동화 한컬레, 동서앞으로 내복 한벌, 첫눈에 봐도 다 값진 물건들이였다. 한쪽에 서서 설매가 꺼내놓는 그런 물건들을 보고있던 철민은 가슴이 찡해났다. 언제 저런 물건들을 준비했는지 속깊은 설매가 다시 쳐다보였다.
“어머니, 세타를 한번 입어보세요.”
“그래. 오, 몸에 딱 맞는구나. 이제 독보조에 가면 또 며느리 자랑거리가 생겼구나.”
기뻐서 입이 함박만해진 어머니가 큼직한 종이곽을 보고
“이건 또 뭐냐?” 하고 물었다.
“예, 이건 어머니가 드실 ‘황태리덕’이란 심장보건약이예요. 효과가 좋다니까 드셔보셔요. 100일분인데 다 자시면 또 갖다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런데 이건 또 뭐냐?”
“이건 제 한복이예요. 연길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사온거예요. 어머니께서 제가 한복을 입는 모습을 보고싶다고 하셨잖아요? 한복 입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가져왔어요.”
“응 그래? 잘했다.”
어머니는 신바람이 나서 며느리에게 옷고름 매는 법이며를 가르쳐주며 한복을 입혀주었다.
“어유, 물색도 곱구, 한복이 에미한테 딱 어울리는구나! 신부도 울구 가겠다. 애비야, 너두 먼눈만 팔지 말고 새애길 좀 봐라.”
설매가 짜장 부끄럼을 타며 얼굴이 노을빛으로 타는데 철민이도 한복 입은 안해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활랑거린다. 잔주름이 늘어가는 얼굴, 균형을 잃어가는 몸매, 그저 그렇거니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지 오랜 모습이 이렇게 몰라보게 거듭날줄은 몰랐다.
“아이, 어머니두…”
하며 몸을 비꼬던 설매가 별안간 엉뚱한 청을 들었다.
“어머니 한복을 입은 김에 절 한번 올릴가요?”
하며 방실 웃는다.
“애는, 명절도 아니구…”
어머니는 그래도 싫지 않은듯 좌정을 한다.
“그럼 어디 한번 해봐라.”
설매는 살며시 일어나 몇걸음 물러서더니 두손을 이마쪽으로 올려 포개고 몸을 낮추며 앉는다. 두손을 방바닥에 사뿐 붙이며 웃몸을 숙여 곱게 절을 한달. 잠시후 고개를 든다. 웬 일인지 두눈에 눈물이 반짝인다. 순간 좋아서 입이 귀에 가 붙던 어머니도 손등으로 눈굽을 찍는다. 고부간의 소꿉장난 같은 수작을 처연히 지켜보던 철민은 소리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래, 절도 인젠 제법이구나.”
“어머니, 그간 고마왔어요.”
“이건 또 웬 소리냐? 하긴 내가 못할 짓을 많이 해서 네 속을 무척 태웠지…”
“아니예요…”
설매는 고개를 한쪽으로 꺾으며 일어났다.
“아차, 점심때가 지났네요.”
설매는 한복을 벗어 챙겨놓고 정지로 나갔다. 어머니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한참 지나 설매가 밥상을 차려들고 올라왔다. 찰떡. 쉰떡, 송편에 고사리무침, 콩나물채, 등심구이에 북어탕…집에서 준비해가지고 온것을 료리한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밖에서 들어와 상을 마주하고 앉는 아들을 보고 “너도 참, 밥상이라도 들어올릴거지.” 하며 짐짓 눈을 흘기였다.
“어머니, 술 한잔 받으세요.”
두손으로 받쳐올리는 포도주를 어머니는 흔연히 받아 달게 마셨다.
“자, 나도 한잔 부어주마.”
설매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부어주는 술을 공손히 받아 몸을 옆으로 틀고 잔을 내였다.
“허, 이 북어탕이 정말 시원하구나!”
어머니는 식사를 하는 동안 칭찬을 내내 멈추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며 철민은 이게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하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6
20여일의 수리와 장식 끝에 집은 과연 신혼부부의 새집처럼 알뜰하게 꾸며졌다. 협의대로 리혼수속을 하고 헤여져야 할 날이 다가왔다.
8월 28일 저녁,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좀 늦게 퇴근한 철민은 거실로 들어서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은은한 조명에 각양각색의 고무풍선으로 장식된 방안이 동화에 나오는 요정의 궁전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새로 산 식탁에는 초불 다섯대가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고 중간에는 큼직한 케익과 아름다운 꽃바구니가 놓여있었다. 철민은 식탁앞으로 다가갔다. 케익에는 “아버지의 50세 생일을 축하합니다! 아들딸 올림.” 이란 빨간 글이 새겨져있었다. 꽃바구니의 빨간 댕기에는 “아버지어머니 결혼기념 20돐을 축하합니다!”는 글발이 적혀져있었다.
그제야 오늘이 무슨 날이란것을 알아챈 철민이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내가 이날마저 잊고있었단 말인가? 그는 주먹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이때 주방에서 설매가 음식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연분홍색한복에 흰 앞치마를 두른 설매가 그를 보고 방긋 웃는다. 20여년전 병원에서 첫눈에 반했던 아름다운 그 모습, 그 미소가 떠올랐다.
설매는 케익에 애기초 다섯대를 꽂았다. 불을 붙였다. 불꽃이 나풀거렸다. 그리고 등불을 껐다. 크고작은 초불이 방안을 밝혔다.
“소원을 말하고 불을 불어 끄세요.”
철민은 두손을 마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오디오에서 생일축하노래의 선률이 샘물처럼 조용히 흘러나왔다. 훅- 불이 꺼졌다. 전등불이 켜졌다.
“오늘은 포도주로 합시다. 저도 마실게요.”
“그게 좋겠소.”
설매가 술을 따랐다..
“딸애는?”
“학교에 모임이 있다고 돌아갔어요. 나두 오늘은 둘이 조용히 있구싶었구요. 실은 이 풍선장식이 걔의 작품이예요. 꽃이랑 케익두 걔가 가져왔구요.”
둘은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철민이가 술을 부었다. 잔이 잘랑 하고 부딪쳤다. 잔을 비웠다. 또 잔을 채웠다. 잔이 짤랑 하고 음향을 높였다. 또 잔을 비웠다. 말이 없었다. 내기라도 하듯 술만 조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술 한병이 바닥이 났다.
“미안하오. 집은 마음에 드오?”
“고마와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나도 마음에 드오. 새집을 떠나고싶지 않구려…”
또 침묵이 흘렀다.
“술이 맹물 같구만. 빼주를 가져오우.”
“그러자요. 오늘은 저도 취하고싶어요.”
설매는 오량액을 가져왔다. 술을 부었다. 술이 둬순배 돌아가자 설매가 정교한 종이곽을 철민이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데?”
“열어보세요.”
철민은 곽을 열었다. 붉은 댕기로 묶은 편지였다. 얼핏 보기에도 30통은 됨직했다. 그가 련인이였던, 안해였던 설매에게 보낸 편지였다. 철민은 가슴이 뭉클했다. 이걸 이때까지 보관하고있었다니, 그것도 이렇게 깔끔하게! 세월을 모르는 편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제일 우에 있는 한통을 집어내여 속지를 꺼냈다.
“나의 천사 설매에게…”
그가 처음으로 쓴 련애편지였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말을 다 골라 써도 모자랄 정도로 사모의 순정을 쏟아놓은 편지였다. 철민은 한통한통 꺼냈다. 사랑을 얻고는 온 세상을 얻은듯이 미친듯이 좋아하며 환성을 지른 편지, 첫아이릃 낳을 때 남방출장으로 곁을 지켜주지 못한것을 애타하며 용서를 빌고 위안을 해주고 축하를 해준 사연…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0년, 남편과 자식만을 바라보며 생활의 어려움도 덮쳐드는 병마도 민족간의 장애도 말없이 이겨내며 살아온 가냘프나 억센 안해였다…
험난한 길을 헤치고 산정에 오른 산악인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듯 지나온 나날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물이 앞을 가리였다.
그는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그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설매에게 권하였다. 설매는 잔을 비우고 그 잔을 채워 다시 넘기였다. 철민이 잔을 냈다. 그리고 침묵을 깼다.
“음악을 들을가?”
“어느 곡을요?”
“거 있잖소.”
이윽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뉴브강물결’이였다. 은은한 왈쯔곡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온 방을 채웠다.
이때 전화벨이 울리였다. 북경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의 전화였다. 철민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결혼 20주년을 축하합니다! 곁에서 축하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25주년 은혼, 그리고 50주년 금혼은 꼭 우리 오누이가 큰 상을 차려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즐겁게 지내십시오. ‘다뉴브강물결’소리가 들리네요. 춤을 추고계십니까? 10년전처럼. 아버지 어머니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 어머니를 바꿔주십시오.”
전화을 바꿔준 철민은 돌아서서 눈굽을 훔치였다.
다시 돌아서서 전화를 받고난 설매와 눈길이 마주쳤다. 철민은 두어걸음 다가가 마주서며 춤을 청하는 인사를 했다. 허리를 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설매가 한걸음 다가왔다. 철민은 왼손을 내밀고 오른손으로 설매의 허리를 살며시 안았다. 다뉴브강물결을 타고 춤사위가 펼쳐졌다. 둘은 실내의 공간을 누비며 미끌어져나가다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뉴브강물결이 사품치며 더욱 세차게 출렁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