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기적 : 6.25 남침 저지와 한미동맹 체결
세계 제2차대전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1945.9 남한에 주둔 중인 미군에 대해 1949.4 남로당 공작원인 국회부의장 김약수 의원 등 13명이 유엔 한국위원단에 미군 철수 주장을 하여 파문이 일었다. 미국의 국방 예산 축소와 한반도 전략적 가치 저하 등의 이유로 1949.7 미군이 철수하고 1950.1 애치슨 라인(미국 극동 방어선에서 한국, 대만 제외) 발표로 북한의 남침 야욕을 자극하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가난은 벗어나지 못해 외국 원조로 연명하는 한국은 군비 증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미국은 소련을 의식하여 군사 원조는 최소 규모로 하고 경제개발을 주문했다.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1948.10 출동 명령을 받은 4연대(정식명칭 14연대) 지창수 상사 등 좌익 군인이 반란(여순 병란)을 일으켜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군부 내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작업을 벌여 국군 10%에 해당하는 좌익 세력을 퇴출하여 6·25전쟁 때 군대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4연대 반란으로 부대명에 숫자 4는 퇴출. 4소대(×)...4사단(×)]. 북한은 주한 미군이 철수하자 본격 남침 준비를 하고 1950.4 소련과 중국의 남침 승인과 군사 지원 약속을 받았다.
보릿고개 시절 농촌 학교는 보리와 벼 수확 철에는 가정실습 명목으로 며칠간 휴교하였다. 국군은 북한 도발 가능성에 1950.4.29. 비상 경계령을 발령했다가 군량미 절약과 모내기 철 농사 지원을 위해 6.20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고 휴가, 외출이 전면 시행되고 전군 장교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다. 6.25 새벽 4시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 구간에서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6.28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개전 당시 북한군은 국군보다 병력 2배, 포와 전투기 등은 월등히 많았고 국군에 없는 탱크도 242데 달했다.
이승만(존칭 생략)은 미국과 일본 주둔 맥아더 사령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인민군이 6.26 저녁에는 창동, 미아리 방면까지 진출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6.27 새벽 피난을 떠났다. 북한군이 서울 진입 2시간 이내 한강교를 폭파하여 한강 도하를 저지하는 육군작전계획에 따라, 6.28.02:30 한강교를 폭파했다. 6.28.03:00 KBS에 인민군이 들이닥치자 황급히 피난하면서 자동송출 장치를 끄지 않아 대통령 선무(심리전) 방송이 계속 송출되었다. 서울에 체류한 북한군은 죄수를 석방하고 민간인을 살상하고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북한군이 서울에 3일간 체류하여, 미군 참전 시간과 후퇴한 국군을 수습하여 한강 이남 방어선 구축 시간을 벌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 지원 명령으로 일본 주둔군 24사단 스미스 부대가 7.5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안성으로 후퇴하였다. 6.28 유엔은 한국에 파병을 결의하고 16개 회원국에서 전투병력을 파견하고 물자지원 39개국, 의료 지원 5개국이 참여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은 7월에는 대전, 전주, 광주, 여수까지 점령했고 8월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연합군과 대치헸다.
유엔 연합군 14만 명은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방어선을 치고 인민군 98000명을 맞아 6주간 필사적인 방어전을 벌였다.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미 정부에서는 정세가 심각해지자 사모아 등에 임시 정부 설립 방안도 검토했다. 그러나 9.15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진하여 9.28 서울을 수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북진하여 인민군 잔당들을 진압하자 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지리산 등으로 잠입하여 휴전 후에도 게릴라 활동을 했다.
연합군은 1950.10.1 북진을 시작하여 10.19 평양을 점령하고 10.26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950.10.25. 46만여 명의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역전하였다. 동부전선 전투에서 미군이 장진호 철수 작전에 성공하고 1950.12.11 흥남 철수를 완료했다. 1951.1.4. 서울 후퇴로 평택-제천-삼척 방어 라인을 형성하고 반격하여 1951.3.15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에서 전선이 고착하자 1951.7.10.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개최되었다. 전쟁 중에도 이승만은 1952.1 독도 수호를 위해 동해안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실효 지배하였다.
휴전하면 통일도 못 하고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또다시 남침할 것이 명확했다. 이승만은 미군을 잡아두기 위하여 1953.6.18. 미군이 관리 중인 거제 등 7개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인민군 포로) 26,930명을 석방하여 휴전을 방해했다. 이에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이승만의 협조 없이는 휴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미국은 경제 원조와 한국군 증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동의하고 1953.7.27.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6.25 전쟁 기간 중 참전국의 무기, 군수 등 전쟁 직접 비용 300억 달러(2024년 가치 4,000억 달러)는 미국이 분담하고 나머지 경비는 참전국이 분담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의 경제 원조와 국방력 증강을 할 수 있었고, 미군 주둔으로 한국은 70여 년간 전쟁 위험에서 벗어났다.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외자를 유치하고 경제개발에 전념하여 오늘날과 같은 경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미군 주둔은 번영의 마중물로 미군 주둔이 많은 국가 순위는 일본, 독일, 한국, 이탈리아, 영국이다. (끝)
[ 에필로그(이승만에 씌어진 누명) ]
⓵ 6·25 때 런(run)승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이승만은 적군이 서울 진입한 후에 피난하였다. 사단장(사단 본부)도 전투 현장 수십km 후방에서 전투 지휘를 하지만, 대통령은 훨씬 더 후방에서 전쟁 지휘를 해야 한다. 김일성은 평양 함락 일주일 전에 피난하였다.
⓶ 이승만은 서울 사수 방송을 하고 자신은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갔다고 비난한다. 진실은, KBS에서 황급히 피난하면서 자동송출장치를 끄지 않아 6.27.22:00 군사 원조가 온다는 선무 방송이 계속되었고, 한강 다리는 육본 작전계획에 의해 군에서 폭파했다. 이후 폭파 책임을 지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사형을 당했으나, 1964년 사후 재심에서 정당한 작전명령 수행임을 인정받아 무죄 판결로 복권되었다.
⓷ 이승만이 1960.3.15 부정선거를 했다고 비난한다. 사실은,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유세 도중 사망하여 이승만(85세)은 대통령에 무투표 당선되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이승만(85세) 이후를 노리고 경찰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로 장면 후보를 이겼다. 기타 이승만의 일본 망명 타진설, 한강교 폭파(피난민 부교로 이동)로 8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은 거짓. (끝)
1. 춘천전투 : https://www.youtube.com/shorts/8vaWD3qVBUM
2. 6.25 노래 : https://www.youtube.com/watch?v=WNH3FXbS7e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