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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변혁의 시대에 핀 문화의 꽃]
비운의 혁명가 허균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최초의 한글 소설을 남긴 문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였다.
그는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허엽의
아들이다. 자는 단보이고 호는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등 여러 가지를 썼다.
그의 어머니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의 딸로서 명문 출신이었으나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따라서 허균은 비록 서출은 아니었지만 이복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면서 다분히 서얼들이 겪는 고통을 맛보았고, 이러한 경험이
후에 (홍길동전) 속에서 서얼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양반 출신임에도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뛰어난 문인 집안 출신답게 허균 역시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둘째형 허봉의 친구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지만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 6개월 만에 파직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등을 지내고 1604년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계속 불교에
몰두하였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받고, 그에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세 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던
조정은 그를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였는데, 이번에는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직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또 다시 네 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당한 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기생 계생을 만나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냈고,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쌓아
인간 관계의 폭을 넓혔다. 그러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종사관이 되어
영접했으며,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하지만 1610년에
있었던 과거에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와
관련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시 실세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1615년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책임자가 되어 두 번이나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이 즈음 허균은 그 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서얼 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 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이 혁명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우선 한성을 장악할 것을 결심하고
수하들을 시켜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소문의 내용은 '북방의 오랑캐(여진족)들이
쳐들어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점차 민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 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남대문에 전란에 관한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에는 황급히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균은 민심의 동요가
더욱 심해지면 그 틈을 노려 한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탄로나고 말았다. 1618년 8월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가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한 것이다.
현응민으로부터 모반 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의 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핵심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리고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허균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 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렵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다섯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글로 된 (홍길동전)을 남김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대업을 이루었다. 허균의 혁명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홍길동전)은 당대에만 하더라도 누구의 저작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18세 아래인 이식이 그의 (택당지) 잡저 부분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것을 통해 후대에 밝혀졌을 뿐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 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 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자 양반 가정의 서얼 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 소설이다. 또한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 사상을 담고 있으며,
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 분신법, 승운법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도교
소설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 혁신을 꿈꾸는 사회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하여 비교 문학적으로 고찰한다면 중국 명대의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도적의 의적 행위에
관한 것은 (수호전)과 흡사하고, 분신법으로 팔도 감영에 방을 붙이고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속이는 것은 (삼국지연의) 제68회 좌자의 분신법에 의하여 조조를
희롱하는 것과 상통하며, 도술을 부리고 구름을 움직이는 것은 (서유기)를
본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모델은 조선 국내에 있었던 것 같다. 즉,
연산군 6년에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름난 화적 홍길동과 명종
대의 의적 임꺽정, 선조 29년 7월에 임란 와중에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종실의 서얼 이몽학의 난 등에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조합시킨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도국 같은 이상국의 건설에 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허균 역시 이상향을 꿈꾸던 대표적인 선비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중기 사회의 양반과 민중들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얼 문제를 비롯한
사회 계급의 불평 등에 대한 것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회쟁점으로 부각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 전반에 걸쳐 (홍길동전)은 혁명 사상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또한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사회 변혁 사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길동은 후대의
박지원에 의해 (허생)으로 재탄생되어 혁명의 사상을 잇게 되었고, 민간에게는
사실적 인물로 전해져 전라도 영광의 홍길동 마을에 대한 전설을 낳고 공주
유구에는 홍길동이 쌓았다는 산성 전설을 남기게 되었다.
허균이 남긴 소설은 (홍길동전) 이외에도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남궁선생전), (장생전) 등이 있다.
동방의 편작 허준과 (동의보감)
허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 우수사를
지낸 허곤의 손자이며 용천에서 부사를 지낸 허윤의 아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1546년 김포에서 무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의간으로 내의원에 봉직하게 된다. 이후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이 높았고 동양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조선 의학의 우수성을
청과 일본에 과시하기도 했다.
의과에 급제한 이래 그는 1575년 2월에 어위로서 명나라의 안광익과 함께 입진하여
실력을 증명했으며, 1581년에 고양생의 (찬도맥결)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
4권을 편성함으로써 맥법 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이후 그는 어의로 활동하며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해
선조로부터 당상의 가자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임란 때는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남아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각지로 흩어지는 바람에 작업은
일시 중단 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
500여 권을 고증하게 했는데, 그는 내의원에서 어의로 종사하면서도 편집일에
전념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완성시켰다. 이 책은
그 당시의 의학 지식을 총망라한 임상 의학의 백과 전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핵,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대 강편 아래에 질병에 따라 항, 목을
정하고 그 항목 밑에는 해당되는 병론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하게 열거하여
각 병증에 관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병증에 따르는 단방과 침구법을 부기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용화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이 편집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경편의 진액항에 한증(땀병)의 처방을 보면,
먼저 그 맥법과 원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자한, 도한, 두한, 심한, 수족한,
음한, 혈안 등 8목으로 분류되어 있어 임상의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약집방서), (의방유취)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 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천원옥색), 신농의 저작이라는
(본초), (소문), (영추경) 등 83종의 고전 방서들과 (상한경), (맥경), (단계심법)
등 한, 당 이래 편집된 70여 의방서가 인용되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 능력의
우수성으로 인해 동양 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 의학서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저작으로
이 책처럼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허준은 이 책을 완성한 이후에도 세조 때 편찬한 (구급방)을 (언해구급방)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의 (창진집)을 (두창집요)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하고
간행하였다. 또 노중례의 (태산요록)을 (언해태산집요)로 개칭하여 간행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편집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동의학사에 이 같은 많은 업적을 남기고 1615년 11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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