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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과 이단 신조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가르침
비평 박영관
“안식교는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관해서는 알미니안 주의를
따른다...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 구원을 얻는데도 인간의 행위가 따른다고 한다. 이것은 자력구원설(自力救援說)을 말한다,
..알미니안 주의는 칼빈주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은혜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교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박영관, 이단 종파 비판(I), 255.
박영관씨는 그의 저서인「이단 종교
비판(1)」에서, 안식일 교회를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 로 규정하고 , 그것을 칼빈주의 개혁 교회가 17세기초에 열린 도르트
종교회의(Synod of Dort)에서 이단으로 규정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계속하여 아래와 같이 비평하고 있다.
비평 박영관
“기독교회는 예정, 속죄, 인성.(人性), 은총, 성도의 보존에 대하여 알미니안의 주장을 도르트회의에서 정죄하고 이단으로 추방하였다”.
Ibid., 21.
성서적인 입장
먼저 밝혀 둘 것은, 예정(豫定)에 있어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는
칼뱅주의는 아니지만 성경에 입각하여, 창조와(계4:11)통치와,(시135:6; 잠21:1; 단2:21; 4:35) 구속(롬8:29,30;
엡1:4, 11)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유로운 의지 행사에 속하는 주권(主權)을 믿는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교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나
웨슬리주의는 아니지만, 범죄로 인하여 스스로 의를 이루거나 선을 행하기에 무력해진 인간은(롬3:10-12; 엡2:1-3)구원을 가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할 때(엡2:7-10) 의지로 반응하여 “믿어 순종케”(롬1:5; 16:26) 됨으로서 예정된 구원을 이룰 수
있는(엡1:4-12; 빌2:12)책임이 있는 존재임을 믿는다. 다음은 이에 관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입장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딤전2:4)신 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3:9)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멸망 받도록 작정(作定)하셨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러한 작정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갈바리를 부인하게 한다....“이는 [누구든지]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구절에서 “누구든지”(Who-ever)는 어떤 사람(anyone)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종과 생명을 선택하도록 요청하시는 사실과(신30:19; 수24:15; 사1:16, 20; 계22:17), 한번
은혜를 받은바 된 믿는 사람도 떨어져 나감으로 상실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해진다(고전 9:27; 갈5:4; 히6:4-6, 10:29)..
"Predestination", Seventh-day Adventist Encyclopedia(Washington, D. C.:Review
and He-rald, 1976), 1144.
칼빈 무오설(無誤說)이 아닌 이상, 칼빈의 가르침이라도 성경에 비추어
보아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쳐 믿어야 하며,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에서라도 성경에 일치한 것은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가 아닌
모든 것은 이단으로 돌리는 신학적인 사고(思考)는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으로 알려진것 가운데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왜곡(歪曲)되고 과장된 주장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
칼빈의 가르침이든,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든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한 것만이 진리이다, “주의”(主義-sm)에 얽매이는 것은 성경을 편견 없이 이해하는데 최대의
장애라고 생각하며, 박영관 씨가 일방적으로,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한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도 공정한 기회와
객관적인 이해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어 얼마의 지면을 이에 할애하고자 한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시대
먼저 칼빈주의를
대표한 박영관 씨가 일방적으로 이단의 교리로 규정한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하여는 장본인인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anism. 1560-1609)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한 도르트 종교회의의 역사적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장본인인 아르미니우스는 종교개혁의 난류(亂流)가 유럽에 소용돌이치던 1560년 자유를
애호하던 나라 화란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린 때 그의 홀어머니와 형제들은 카톨릭 신앙을 거부한 까닭으로 그 지방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탁월한 신앙을 인정한 국내 킬빈주의 유지들은 그를 칼빈주의 신앙의 본거지인
제네바에 유학시켰다. 거기서 그는 칼빈의 동료요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서 탁월함을 인정받으며 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사랑
받는 성직자와 신학 교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이미 칼빈의 예정설이 성경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교회로부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 문제를 성경에 비추어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히려 그 자신이
의심 없이 믿어 온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정에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정이 의하여 선택들 사람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제한 속죄론(制限贖罪論)이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신학적인 확신은, 후에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로 알려진 그의 가르침의 골자이다. 지금 잘못 소개되고
있는 어떤 내용들은 그의 후계자들이 왜곡(歪曲)시켜 놓은 것도 있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성경 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하는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늘어나면서 당시 칼빈주의 개혁파가 주도하고 있던 화란은 일대 신학 논쟁의 와중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Walker, 399.
예정론에 관한 논쟁
아르미니우스를 특별히 적대한 사람은 같은 대학의 교수로 극단적인 칼빈주위자인
고마루스(F. Gomanus)였다. 고마루스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Beza)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전 즉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얼마의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관없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심으로서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신다는 타락전
예정설(Suralap-sarianism)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와 인간의 타락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되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받게 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 E. F. Harrison(ed.), Baker's Dictionary
of Theology(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2), 417.
이에 대하여
아르미니우스는 , 인간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하신 선택은 예지(豫知)하신 믿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며, 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했다. . James Nichols(tr.), The Writings of James
Arminius(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56), 526.
그는 이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의」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그러나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성령을 거역하였고, 제공된 은혜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Ibid., 253, 254.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만약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사람이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사람에
의하여 저항 받을 수 있도록 용납하셨다고 논증했다. 그는 요한 복음 3장 16절을 거듭하여 인용하면서, 이토록 확실한 성경의 논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까닭은 은혜의 속성(屬性)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역사(役事)하는 방식 때문임을 밝혔다.. Ibid.
그는 하나님께서 범죄까지도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타락전 예정설이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자신들의 범죄 여부에 관계없이 예정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서 무엇보다도 반대하였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신성모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죄와 상관없이, 피조물들을
이미 예정된 멸망으로 저주받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설명하는 것은 비난의 정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신성모독을 선하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밀드레드 와인쿱, 한영태 역,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7), 49.
그의 합리적이고 성경 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은 그를
펠라기우스(Pelagius)의 가르침을 쫓는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펠라기우스는 5세기초 영국의 수도승이었는데, 인간은 범죄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은 선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적인
자력구원설(自力救援說)을 주장했었다.. Baker's Distionary of Theology, 399, 400.
물론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펠라기우스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아르미니우스 자신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과 일치하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음을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소시누스(Socinus)파라는 무고(誣告)를 당하기도 했다..
Nichols(tr.), 465.
아직까지도 이러한 진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가르침을 행함에 의한 자력 구원 설로
규정하고 안식일 교회까지 이에 포함시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역사적이 과오를 되풀이하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박영관, 254, 255.
이렇게 무고를 당한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 적임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밝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적인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를 열어 주도록 국회에 요청했다.. G. O. McCulloh(ed.), Man's Faith
and Freedom(N. Y.:Abingdon Press, 1962), 21.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과로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1609년 10월, 49세를 일기로 참으로 짧았지만 경건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신학적인 능력과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은 그의 비평 자들에 의해서도 지금까지 인정을 받고 있다. 교회사의 대가인 필립 샤프도, “그는 유식하고 유능한 신학자였으며,
그의 생애를 쓰디쓰게 만든 논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온유함과 그리스도인 다운 정신을 드러냈다....남들에 의하여 정죄를 받았으나 그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다.”. Schaff, 512.
고 평했다. 그의 장래식에서 그에 대하여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그를 충분히 존경할 수가 없고, 그를 존경치 않는 사람은 그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 화란에
살았다.”. Carl Bangs, Arminius(Grand Rapids: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5), 331.
도르트 종교회의 -개신교 종교재판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46명의 칼빈주의 개혁 교회 목사들은 논쟁을 성경 적인 원칙에 의하여 해결하는 온건한 방편으로 다섯 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하는 항변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엄격한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반항변서(反抗辯書)를 제출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칼빈주의에 항의하는 “항변자”(抗辯者 . Remonstrant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중에 소집된 국회에서 다루어진 두 주장을
종합하여 간략하게 대조시켜 보면 아래와 같다.”. 와인쿱, 58. Schaff, 517~519.
.0
아르미니안의 5개조 전제
칼빈 주의 5대 강령
1. 하나님이 예지(豫知)하신 바
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 에 작정하심.(조건적인 선택. Conditonal Election)
1.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二重豫定]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림의 믿는 여부임.[보편적 속죄. Universal Atone-ment]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 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Natueao Inability]
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先行)됨이 없이는 이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 도없다.
선행적(先行的)은총 . Prevenie-nt Geace)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役事)하시는 방식에 인간이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저항이 가능한은헤 , Resis-tible Geace]
4.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 하시지만 ,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懶怠)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487)(아래 각주) [조건적인
견인(堅忍), Condi-tional Perseverance]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488,아래각주)[궁극적인 견인. Final Persev-erance]
. A.
W. Harrison, The Beginnings of Arminianism(1926), 150, 151.
.. 이상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늘날 장로교회 신조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데, 영어 표현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튤립”(Tulip)으로 친하기도 한다.
①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③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Urresistible Grace), ⑤성도의 견인[보 존](Perseverence of
Saints)등이다 라보도 편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서울: 성공 문화사, =1981), 217,218.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두 주장이 쉽사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이 가열되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우선 열렬한 킬빈주의 자로 중앙집권제를 주창하던 총독 마우리스 공(Maurice 公)은 . 1618년 7월
졸지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정적(政敵)으로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며 공화제(共和制)를 주창하던 지방자치 주의 국가 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Van oldenvarneveldt) 와 다른 유력한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투옥하였다.. Walker,400.
그런 다음, 서둘러 같은 해 11월 13일, 이러한 방식의 종교회의를 원치 않는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를 외면하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집한 종교회의가 도르트(Dort)에서 열렸다.
참석한 102명의 대표자들다운데 18명은 칼빈주의 정부가 임명한 위원이었고,
아르미니우스파 대표의 참석은 처음부터 봉쇄되었다. 13명의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는 회의가 시작 된지 여러 주일 후에 죄인의 신분으로 소환되어
무조건 적인 복종을 강요받았다. 의장[J. Bogerman)이나 서 기[F. Himmius)등 모두가 엄격한 칼빈주의 자로 모든 결의는
일방적이였다.. Schaff. 513.
교회사가(史 家) 필립샤프의 말대로, “그리하여 아르미니우스파의 운명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Ibid.
말로 사람에 의하여 예정된 예정론의 예정대로 된 승리였다. 6개월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논란을 계속하다가 이듬해인 1619년 5월9일 막을 내렸다.
결의된 내용은, 예정론의 범위를 그 전까지의 주장
이였던 타락 전의 예정에서 타락 후의 예정으로 바꾸어, 타락후 예정설(inttralapsarianism)을 채택된 것 외에는 이전의 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하고, 아르미니안의 5개항의 건의는 모두 이단의 신조로 정죄하였다.. Ibid. 514.
동시에 회의페막4일
후인 5월13일, 국가를 위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투옥 중이던 아르미니안 정치 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를 대역죄(大逆罪)의 누명을 씌워
처형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로 해양법(海洋法)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로티우스(Hugo Grotius) 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을 성직에서 쫓아냈다.. Walker, 400. Schaff. 514.
이러한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배경 때문에 역사가 중에는 이러한 도르트 종교회의를 칼빈주의자들이 수행한 로마 카톨릭 식의 종교재판이었다고 혹평했다.. Motley, Life
and Death of Barneveld, Vol. II, 309, ckted in Schaff, 515.
그리고 수준 있는
토론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능력과 배려의 고상한 질서를 배신” 하고, “자유를 희생시킨 대가로 정통을다”졌다고, “협소한 신앙고백 주의를
재가(裁可)한” 종교회의의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schaff 515l.
이처럼 혼탁(混濁)한 분위기에서 형성된 도르트
신조를 지금까지 공적인 표준 신조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는 화란 밖에서는, 미국에 있는 화란 개혁 교회뿐이다. Ibid, 5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기본 정신과 성경의 원칙을 저버리고,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외면한 도르트 종교회의 결의 사항을
아직까지도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개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 들의 지성과 정서를 몹시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신앙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