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모(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울경 모임) |
회의자료 |
․ 일 시 : 09. 12. 7(월) 18:30 ․ 장 소 : 사무실 회의실 |
전화 : 051) 302-8801 팩스 : 051) 302-8803 |
회비 : 계좌번호 (부산은행) 031-12-065269-9 정분옥 | |
기금모금 :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건립기금 모금 부산은행 031-01-032121-0 박정모 |
1. 경과보고
가. 11월 월례회 - 일 시 : 2009. 11. 2 (월) 18:30
․ 주요내용
- 임 혜 경 고문 : “국민정신교육의 표본인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강연
- 새로 오신 회원 : 김미자‧김정순‧김정옥‧김주현‧박선임‧이병규‧정용원 이사(7명)
- 고액회비 및 찬조금 내신 분 (11월) - 10/20, 11/13, 11/14행사 협찬포함
금 액 |
내신 분 | |
3,158,000 |
1 |
정분옥 회장 |
350,000 |
1 |
정병호 상임고문 |
100,000 |
4 |
김선진 자문위원, 김동선‧ 박수용 부회장, 거창지부 |
50,000 |
1 |
김상섭 이사 |
30,000 |
3 |
임혜경 고문, 배일부 자문위원, 김동섭 부회장 |
10,000 |
2 |
김종일 ‧ 신상섭 이사 |
- 물품협찬
∙ 정분옥 회장 : 단감2box, 홍시2box, 사과1box, 박대통령사진수록2010년
달력 400부
∙ 김정순 자문위원 : 서양란 1점
- 회의자료 설명 및 자료제공
∙ 회원님들의 건의사항에 대한 답변서 ‧ 중국건국 60주년의 明과音
∙ 박정희 대통령 서거30주기 국제학술회의 주요내용
∙ 천만 원짜리 개망신 (정운찬 및 노무현 정권 시의 실세들)
나. 양산시 지부 11월 월례회 - 09.11.9(월) 18:40 천일도매 횟집
다. 최회원 중앙회장 및 중앙임원 초청 간담회
- 일 시 : 2009. 11. 13 (금) 19:00 ∙ 장 소 : 다이아몬드 호텔
라. 박정희 대통령 탄신92주년 숭모제 참석결과 - 별첨(3페이지)
마. 육영수 여사 탄신84주년 숭모제 - 09.11.29(일) 10:30 옥천 문화원
바. 사이버위원회 결성 - 09.12.3(목) 19:00 다이아몬드 호텔
∙ 카페명칭 : 박 정 모 (주소창에서 한 칸씩 띄우고 들어감)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president-park
∙ 위 원 장 : 곽진월 (웨딩케익), 카페지기 : 김정애 (새싹밝은)
∙ 운 영 자 : 사무처장, 위원장, 유승춘, 신상섭, 김수진
=============================================================================
2.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건립 기금 모금현황
- 관리계좌 : 부산은행 031-01-032121-0 박정모 2009. 12. 6 현재
수 입 부 |
|
지 출 부 | |||||||||||||||||||||||||||||||||||||||||||||||||||||
과 목 |
금 액 |
과 목 |
금 액 | ||||||||||||||||||||||||||||||||||||||||||||||||||||
기 금 |
14,320,000 |
- |
- | ||||||||||||||||||||||||||||||||||||||||||||||||||||
이 자 |
4,695 | ||||||||||||||||||||||||||||||||||||||||||||||||||||||
계 |
14,324,695 |
계 |
- | ||||||||||||||||||||||||||||||||||||||||||||||||||||
※ 1,400만원 정기예금 기금 내신 분 (순서 - 금액별, 직위별, 가나다순) : 44명
|
3. 동전 모으기에 동참하신 분 : 17명 2009. 12. 6 현재
계 : 77,690 +이자7 = 77,697 | |||||
김상훈 고문 김점수 중앙위원 강순자 부회장 손찬이 부회장 구맹회 이사 권희동 이사 |
2,120 25,800 2,140 12,380 2,610 160 |
박영수 이사 박한수 이사 변종길 이사 윤상수 이사 이차희 이사 장복녀 이사 |
4,300 4,640 5,440 1,600 990 1,250 |
진해지부 김재곤 사무처장 이현주 재무국장 김도원 여성부장 전용기 홍보부장
|
4,150 2,000 2,020 4,240 1,850
|
=======================================================================================
박정희 대통령 탄신92주년 기념참배 및 회원단합대회 결과
• 일 시 : 2009. 11. 14 (토) 10:30
• 장 소 : 구미생가 주차장 특설무대
- 부산출발 1호차 - 07:00 교대 앞
2호차 - 07:00 교대 앞 양산경유
• 주요행사 - 뺏지 (두 분 사진 단추 형 버튼) : 1,500개 달아 드리기
- 행사 후 성주군 한개 마을 (전통 민속마을) 관람
- 11. 13 (금) 19:00 최회원 중앙회장 초청 임원간담회
• 참석자 : 버스 2대 (85명) + 승용차 1대 (5명)
구 분 |
성 명 |
|
구 분 |
성 명 |
고 문 |
정병호(상임고문), 김상훈 |
|
중앙회 |
최회원(중앙회장) 김영백, 성기철, 이준형, 장호근 |
자문위원 |
박상식, 배일부 |
|
거창군 |
정기환 지부회장, 신천팔 사무국장, 박 동 이사 外 2명 |
회 장 |
정분옥 | |||
부회장 |
강순자, 금상철, 김동섭, 김연순, 문양수, 추종구 |
|
양산시 |
박영수 지부회장, 안상호 자문위원, 이영학 부회장, 유시영 사무국장 外 12명 |
이 사 |
감영돌, 고해숙, 권사동, 권희동, 기노식, 김동규, 김미야, 김미자, 김민정, 김송자, 김정순, 김종석, 김태복, 김한녀, 박범서, 박태호, 백병기, 손연자, 이상연, 전창규, 정영태, 차재현 |
|
동구 |
도이락 지부회장, 노장복‧ 박주권 유창근∙이용우∙임옥출∙장일동 조민규∙조순옥 이사 |
부서장 |
김재곤, 원효영, 이현주, 이균헌, 함희분, 전용기, 정경란 |
|
연제구 |
김경달∙김도형∙김삼자∙김선귀∙김성혜 김옥연∙박만순∙반계순∙유원상∙이재현 이종광∙이창옥∙이철모∙정순희 최귀수 이사 |
• 결 산
수 입 부 |
|
지 출 부 | ||||
과 목 |
금 액 |
내 역 |
|
과 목 |
금 액 |
내 역 |
참가비 찬조금 |
1,560,000 1,325,000 995,000 100,000 100,000 100,000 30,000 |
정분옥 회장 김동선 부회장 박수용 부회장 거창지부 배일부 자문위원 |
|
차량임차 식대(중식) 음료대 外 과일대 떡 꽃바구니 사진현상 잡비 |
1,200,000 220,000 413,900 370,000 100,000 100,000 50,000 65,000 |
2대 주먹밥 술,안주,다과 등 감,홍시,바나나 등 아침대용 행사장 비치 10/26,11/14일자 생가체험관 |
지출계 |
2,518,900 |
| ||||
행사이익 |
366,100 |
본 회계 전입 | ||||
계 |
2,885,000 |
|
|
계 |
2,885,000 |
|
=========================================
30년 전 박정희가 남긴 유산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과거에 난 그가 한국을
부유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패기 있는 젊은 세대를 관찰하고 난 후, 나는 박 대통령에게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한국인의 가슴에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스며들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의 목표가 세계무대에서 정상에 서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기업은
이런 목적을 달성했다. 삼성과 LG와 현대차를 보라,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매우 광범위한 분야에서 야망을 갖고 있다. 산업분야, 국제기구, 나노과학,
생명과학 등의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경제적 성취가 갖는 중요성에 동의한다.
그는 30년 전에 사망했다. 그가 숨지면서 그의 권력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사회와 민간산업, 그리고 나아가 미래세대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게다가 이러한 성장과정은 한 국민이 스스로에게 한국은 더 이상 가난
하거나 약자일 필요가 없으며 한국도 더 낫게 변화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이런 자신감을 자연스럽게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수 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많은 국민은 한국이란 나라를 스스로 피폐한 제3세계
국가로 인식했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한국의 미래에 비판적
이었다. 내가 1963년 미국 특파원 시절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 점을 언급하자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이 내보이는, 비생산적이고 부정적인 특성은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과거의 외세침략과 재난의 결과” 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목표는 경제를
튼튼히 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 뿐 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불어 넣어 주려했다.
- 피터 현 (언론인‧ 작가, 前 뉴욕헤럴드 트리분지 특파원)
‧ 2009. 10. 26 조선일보 시론에 게제 된 내용
==============================================================================
강요에 의한 친일(親日), 순일(順日)자도 악덕친일자로 매도한 두 단체의 비교표
구 분 |
친일행위자 | |
명 칭 |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 (21,000여 쪽의 25권) |
친일인명사전(3권) |
수록된 인원수 및 주요인사 |
2009.11.27 - 1,005명 발표 김동인, 김성수, 김은호, 김활란, 노기남, 모윤숙, 방응모, 백낙준, 백선엽, 서정주,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종찬, 최남선 등 ※박정희대통령 제외 - 구체적인 친일 행위의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여 |
2009.11.8 오후2시 효창공원(백범묘소)에서 4,389명 인명사전 발간보고대회 박정희대통령, 김동인, 서정주, 안익태, 이광수, 장 면, 장지연, 최남선, 홍난파 등 ※ 박정희대통령 - 1939년(당시22세) 만주국 군관지원 혈서와 소위 계급으로 인하여 해당된다 함 |
단체명 |
‧ 친일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 대통령 소속기관, 위원장 : 성대경 (초대 강만길) |
‧ 민족문제연구소의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 좌익성향의 민간단체 |
만든 근거 및 동기
|
‧ 2002. 2월 김희선 당시 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있던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이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을 발표가 동기가 됨. 이 명단은 광복회가 작성한 692명과 ‘민족정기모임’이 자의적으로 16명을 추가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음. | |
‧ 2004. 5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통과 (김희선 의원 발의) |
‧ 1991. 2월 반민족문제연구소 설립 ‧ 1999. 8월 친일인명사전편찬 기자회견 | |
구성인원 |
‧ 2005. 5월에 ‘친일규명위’ 출범 - 위원장(장관급),강만길(고려대명예교수) - 조사관 50여 명은 누구인지 베일에 가려있음 - 사무처장 정운현 (오 마이뉴스 편집 국장 출신) 과위원장 포함 11명 (대통령4, 국회4, 대법원장3이 추천 했기 때문에 당시 정부와 여당과의 가까운 인사로 구성) |
‧ 친북, 반미, 좌익운동단체에 행동방향을 제공하는 씽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좌익단체들의 핵심멤버들로 구성 됨 -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 인명사전편찬위원장 윤경로 - 기타 김승교, 강만길, 故김남식, 백낙청, 리영희, 표명렬 外 다수 ‧ 2009.11.8일 백범묘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및 김희선, 정청래 등 좌익세력 300여 명이 몰려와 ‘친일굿판’을 벌임 |
‧ 2009.11.28 성대경 위원장, 노경채 상임위원, 김삼웅 위원 3명이 노무현 묘지 앞에서 ‘진상규명보고서’ 봉헌식 가짐 - 국가예산 377억 원 사용하여 국민에게 우선 보고 아니함(달랑 종이 한 장으로 설명함) | ||
문제점 |
1. 국가기관(친일규명위)이 광복직후 반민족행위 실태를 가장 잘 알았던 1948년의 반민 특위(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와 그 기준을 이어받은 광복회의 판단을 무시함. 2. 초기부터 구성원들의 성향이 좌익성향으로 우파진영을 겨냥했다는 사실 - 대상인사 중 좌익인 여운형, 허 현, 이극로, 신상묵(신기남 부), 김일련(김희선 부), 정진철(정동영 부)등 많은 좌익인사는 빠짐. 3. 관련법안제정부터 출범, 활동과정에 이르기까지 편향적인 역사관을 지닌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무리하게 추진 됨 - 친일‘고무줄잣대’ 4. 매국노와 독립지사를 팔아넘긴 악질 밀정등인 사람과 위협과 강요에 의한 소극적으로 협력한 인사들과 한데 묶어서 규정함은 공평성 객관성을 잃었다. |
======================================================================
‘친일인명사전’ 발간 문제 있다.
- 2009. 11. 8 (일) 14:00, 백범묘역(효창공원 내)에서, 4,389명 명단 발표
1. 문제점
① 민족문제연구소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좌익세력임.
② 구성원들은 역사학자도 공정한 재판관도 아닌 검증되지 아니한 민간단체.
③ 조사관의 이름, 성향, 경력 미공개로 신뢰성 없음 (1948년 반민특위는 공개 됨)
④ 판정결과에 대하여 민‧형사 소송을 못하게 특별법( )으로 막고 있는
치외법권임. 소송을 할려면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해야 함.
2.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인사라고 들고 나온 새로운 내용 (수시로 자의적으로
해석함)
- 1939년 (당시22세) 만주국의 군관에 지원하면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와 채용지원서류가 1939. 3. 31 만주신문에 게재되었다고 주장.
→ 만주군은 일본관동군의 통제를 받았지만 100% 일본군이 통제 못함.
3. 그들이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
- 그들은 대한민국을 난도질한데 대한 반성보다는 박정희를 자기네 식구인
좌익들을 괴롭힌 몹쓸 사람으로 이미 규정해 놓고 친일파, 독재자라고 주장함.
4. 확실한 친일파인데도 좌익인 자기식구라고 빠진 사람들
① 징병기피자, 위안부 대상자를 잡으러 다닌 신상묵(신기남 부친)일제 헌병오장.
② 독립지사, 반일행위자에게 가혹한 고문을 한 김일련(김희선 부친)만주국 특무경찰.
③ 농민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 간부인 정진철(정동영 부친)
④ 여운형은
-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일본의 친선단체)’ 상담역 맡음
-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친일단체)’에 내빈으로 참석 찬조연설
- 1940년 동경으로 건너가 육군성 다나카소장, 우익정객인 오오카와, 고노에 등을
만나 일제의 괴뢰정권 수반인 중국의 왕정위를 도와 장개석과의 화평교섭 중재
- 1943년 ‘경성일보’에 세 번의 “학병권유” 논설기고
- 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에 명예회원으로 등재
- 1945년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재산 및 생명
보호를 위하여 일본의 아베총독이 준 약 2,000만 엔의 거액 정치자금을 받음
※ 친일인명도 중요하지만 ‘친북좌파인명사전’이 더 중요하다.
=======================================================================
획일적 ‘친일파’ 기준...
역사해석의 독점권을 가진 당신들은 누구냐?
대담 - 엄상익 (변호사, 억울한 친일파를 위한 변론인)
-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억울한 친일파도 있고, 친일의 기준이 모호하군요?
“3.1운동의 재판자료를 읽어보면 당시 33인 민족대표 중에는 ‘합방이 되면 일본
시민과 똑같이 대우받고 살기가 좋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10년이 넘었는데도
차별하고 있다’ 고 말합니다. ‘완전히 독립을 주면 해낼 수 있겠느냐’는 일본재판장의
물음에는 “갑자기 독립을 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단계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참정권을 다오’ 라고 답변합니다. 아, 민족의 지도자의 의식이 이런 거였구나
깨달았죠. 강군(强軍)이 된 일본에 비하여 우리는 구식무기로 무장투쟁이 이 시대
상황에서는 ‘친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순일(順日)’이었지요. 자식을 키우고
학교에 보내야 했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너무 강조했을 때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논리에 빠집니다.
‘역사의 정의’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당대 현실이나 각 개인의 내면을 하나하나 보지 않고, 획일적 잣대에 맞추는 것은
결코 ‘정의’일 수가 없습니다. 정부수립(1948년) 직후 만든 ‘반민특위’에서도 ‘우리는
일제 시대를 살아 봤으니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다 용서 할 수도 있고 모두다
친일파로 몰 수 도 있다’며 그런 철학적 토의가 있었지요. 당시 판결문을 보면
선배들의 번민과 고뇌를 느낄 수 있어요. 그 때는 당사자도 증인도 살아있고 자료도
더 많이 남아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일제 때 무슨 직급이상 관료를 했거나, 내선
일체에 동조한 글을 썼거나, 국방헌금 10만 원 이상 했으면 친일파’라고 획일적인
기준에서 하고 있어요.”
-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린 작업 일수록 일정한 기준은 필요한 게 아닌가요?
“문제는 이 작업을 방해하는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에게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주는게 옳으냐는 겁니다. 소송을 하면서 ‘당신들은 누구냐’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
이냐’고 많이 따졌어요. 이들은 공정한 역사학자도 재판관도 아닙니다.
과거 ‘반민특위’구성원들은 독립운동을 하거나 학병에서 달아났던 강한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 때는 이름도 다 공개됐습니다. 지금 위원회의 조사관의
신분이나 성향, 경력에 대해 알 수가 없어요. 판정결과에 대해서는 민‧형사 소송을
못하게 특별법으로 막고 있어요.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격권이 침해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엉터리 사수를 하면 형사도 고소당하고 처벌받지만 여기는
치외법권입니다.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해야 하는 겁니다.”
=======================================================================
- 인물행적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전체를 모두 봐야 한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태도도 중요하지 않은가요?
“겉으로 드러난 한 인간의 태도만큼이나 그 내면도 살펴야 하지요. 1942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던 시기에 김동인은 ‘천황모독죄’로 징역8개월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천황 별거 아니다’고 한거죠. 또 당시 일제를 위해 사람들을 독려하는 여운형을
보고 ‘친일파’라고 글을 써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요. 그런 김동인이 매일신보에는
‘대동아공영권 괜찮다’는 식의 글을 썼어요. 한 작가의 상반된 두 행동을 두고 어떻게
무게를 잴 건가요?”
- 당신(엄상익)의 기준으로 하면 도대체 ‘친일파’를 분류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자료에는 친일을 해 준 조선 인사들에게 작위와 은사금 등 대가를 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일본이 인정한 친일인사들이 있어요. 소위 나라를 팔아먹는데
결탁한 매국노와 일제 앞잡이로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우리를 해치면서까지 일제에
달라붙은 사람들이 그 대상입니다. 친일파를 이들로 한정해야 합니다.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의 기준을 잘못 잡으면 돈과 재능이 없는 사람이 노동력
을 내서 비행장터를 닦은 것도 친일이고, 일제의 ‘산미증산정책’에 따라 열심히
농사 지은 것도 친일이 되겠지요.”
- 생계형 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고,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한다는 기준은 있지 않습니까?
“이광수나 최남선은 ‘조선 젊은이여 학병에 나가라’는 글을 썼지요. 우리 청년들이
병역을 마쳐야 동등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얻자는 쪽이었지요. 당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5세면 인생 끝’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어요.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다 죽고 나면 일본 땅에 조선인들이 모두
들어와 살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 빨리 일본에 협조해
일본의 시민이 되는 게 살 길이라고 이광수나 최남선은 봤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친일파의 대명사가 됐지만, 나름대로 우리민족의 살 길에 대한 고뇌가 있었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인도의 간디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
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 2009. 11. 9 대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