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5년 1월 30일(경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에게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왕이 남색 옷에 백마를 타고 의장도 없이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백관들이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왕이 산에서 내려가 가시를 펴고 앉았다. 얼마 뒤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가 달려 왔다. 왕이 물었다.“뭐하는 자들인가?”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였다. "아마도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읍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였다. "오늘 일은 오로지 황제와 두 대인을 믿을 뿐입니다.” 용골대가 말하였다.“지금부터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빨리 갔으면 합니다.”(줄임)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가진 자가 방진을 치고 좌우에 서 있었다.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본딴 것이었다. 왕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렀다. 용골대 등이 왕을 진문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였다.“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왕이 대답하였다.“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 등이 데리고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청나라 사람을 시켜 큰 소리로 소리 치게 하였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인조실록>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 산성을 나와 서울 잠실에 있는 삼전도로 가서 항복을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이렇게 치욕스럽게 항복을 한 경우는 없었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3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청으로 끌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