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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학술 발표회 책자 [2013년
서산문화발전연구원 제25회 정기학술발표회-방만춘ㆍ고수관ㆍ심정순ㆍ심화영ㆍ박첨지놀이](충청남도 서산:서산문화발전연구원 주최, 2013년 3월 29일
13:30~18:00 서산문화원 문화감상실 개최) 1~30쪽에 실린 논문의 초고입니다.
충남 서산시 해미 출신 조선시대 판소리
명창 방만춘·고수관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 저자)
---------------------------------------------- 1. 머리말 2. 판소리 명창
방만춘 3. 방만춘 후손 판소리 명창 방진관·방응규(방응교) 4. 판소리 명창 고수관 5. 방만춘·고수관 관련 음반과
사진자료 6. 방만춘·고수관 자료 보존 방안,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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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組, 1800~1834년 재위) 무렵 활동했던 판소리 명창들 가운데 대표적인 8명을 꼽아 흔히
‘8명창’이라 귀명창들은 일렀다. 근래에는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 1849~1863년 재위) 무렵에 활약한 대표적인 여덟
명창을 ‘후기 8명창’이라 이르게 되면서 순조 무렵에 활동하던 8명창을 ‘전기 8명창’이라 구별하여 지칭하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8명창’이라 하면 전기 8명창을 가리키던 말이다. 근대에 와서는 구한말~일제시대에 활동한 큰 명창 5명을 선정하여 흔히들 ‘근대 5명창’이라
하였다. 8명창 이전의 명창 가운에 가장 이름이 있는 이는 우춘대, 최선달, 하은담이다. 전기 8명창의 이름은 귀명창마다
꼽는 명단이 달랐다.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신만엽, 김제철, 고수관 이상 일곱 명창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결같이 8명창으로 꼽는다.
그리고 다른 명창 한명은 귀명창마다 다르게 꼽는데 그것은 방만춘, 주덕기, 황해천, 송광록, 박유전 중에서 한명을 꼽는다.1>
후기 8명창 시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명창으로는 박유전, 정춘풍,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송우룡, 정창업, 김창록, 장자백,
김찬업, 이창운, 김정근 등이 있다. 후기 8명창 역시 귀명창들마다 조금씩 달리 당대의 대표적인 명창 8명을 꼽았다. 근대 5명창은 흔히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말한다.2> 주목되는 것은 전기 8명창 중에서 방만춘, 고수관이 충청남도 해미
사람이고 근대 5명창 가운데 이동백, 김창룡이 충청남도 서천 사람이라는 점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해미, 서천은 유독 대명창을 많이 배출한
판소리 성지라고 할 만하다. 서산 내포제 시조창 문화가 해당 지역의 해미에서 큰 판소리 명창이 탄생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시조창과 같은 정가가 판소리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운, 정춘풍, 김정근, 김여란,
김소희 등 많은 옛 명창들이 정가를 기본, 필수로 익혔다.3> 또한 먹거리가 풍부하고 사람과 돈이 많이 모이고 풍랑 사고가
빈번하여 굿을 필수적으로 했던 서해안에서 큰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해미, 서천 지역에서 대명창이 많이 나온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명창들이 대부분 세습 무속인과 혈연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2. 판소리 명창 방만춘
방만춘 명창에
대해서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30~31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방만춘(方萬春)은 거금(距今)
120년 전 순조 시대에 충청남도 해미읍에서 출생하였다. 유시(幼時)부터 총명하고 그 성악의 재질은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의 대성을 기망케
하였다. 11세에 해미군 일락사에 가서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약 10년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그 중에도 적벽가를 전공하고 공부를
마친 뒤에 22세 때에 서울로 와서 처음으로 성명을 드날였다(드날렸다). 수삭 두유하다가 다시 뜻한 바 있어 황해도 봉산군 어느 절에
가서 4년간을 고심탁마 할 때에 성음 수련으로 주야 없이 목을 써서 성대가 극도로 팽창하여 발성을 못할 경우에 이르렀다. 그 괴롭고
답답함을 어찌 형언할 수 있었으랴. 하로(하루)는 절 기둥을 안고 목이 터지도록 전력을 다하여 소리를 몇 번이나
질넜다(질렀다). 그러나 목은 여전이 터지지 아니하여 나종(나중)에는 죽도록 힘을 써서 소리를 질너(질러) 놓고는 기력이 자진하여 그
자리에 꺼꾸러지고 말었다. 때마침 절 목공이 산에서 나물(나무)를 하다가 뜻밖에 절이 문허지는(무너지는) 둣한 웬 굉장한 소리가
들니므로(들리므로) 깜작(깜짝) 놀나(놀라) 곧 쫓아 나려와서(내려와서) 본즉 여러 사승들은 다 외출하고 방씨만 홀로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앉었을 뿐이다. 뇌성한 일도 없고 웬 소리가 그리 굉장하게 났느냐고 물른(물은) 즉 방씨는 괴이하게 생각하면서 모르는 일로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가 기둥을 안고 목을 터치기 위하여 죽을 힘을 써서 소리를 질러 목이 툭 터지는 바람에 굉장하게 울녀(울려)
나왔든(나왔던) 것이나 기력이 진(盡)하여 정신을 잃고 꺼꾸러졌으므로 자기 스스로는 전연 몰랐든(몰랐던) 것이다. 이리하여 성량은
웅장하게 발달되고 공부는 성가에 이르렀다. 그 후에 봉산읍 음률가로 시문에 소양이 있는 이와 가치(같이) 적벽가와 심청가를 고전에서 윤색
개작하였다. "적벽가의 초고는 여러 사람의 다년 전독하는 동안에 파열되어 겨우 수장지편이 여존하여 있고 심청가는 그 사손이 보존하여
있다 한다." 모흥갑, 송흥록과 병시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모는 고동상성으로 송은 귀곡성으로 방은 아귀상성 살세성으로 당세 독보
하여서 지금까지 유명하다. 적벽가에 특장하였거니와 적벽화전의 장면을 할 때에는 그 광경은 좌석이 온통 바닷물과 불빛 천지로
화(化)하였다 한다. 그 더늠으로 적벽가 중 적벽강화전의 일절을 좌게(左揭)하노라.” (적벽가 중 적벽강화전의 일절이 원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창극사] 출판시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정노식의 기록에 따르면 방만춘은 적벽가와 심청가를
고전에서 윤색 개작하였고 그 창본을 후대에 전해 주었다 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기록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서 적벽가,
심청가 이렇게 두 바탕에 방만춘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방만춘이 얼마나 대단한 명창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노식은 방만춘의 더늠으로 판소리 적벽가 중 <적벽강화전> 대목을 꼽았는데 이동백, 김창룡, 조학진의
<적벽강화전>이 방만춘 더늠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정노식은 방만춘의 소리 독공 일화를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방만춘 세대에 이르러 명창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창법이 다양해지고 급격히 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초인적인 노력으로
형성된 당대 명창들의 독보적인 개성이 모흥갑은 고동상성, 송흥록은 귀곡성, 방만춘은 아귀상성 살세성이라고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특히 8명창
중에서도 방만춘을 모흥갑, 송흥록과 함께 묶어서 거론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방만춘, 모흥갑, 송흥록, 이 세 명창의 공통점은 모두
고음을 잘 구사했고 멀리까지 우렁차게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높고 크고 멀리 소리내는 창법은 옛 판소리의 특징이기도 하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소리를 멀리까지 힘차게 내질러야 했기 때문에 잔기교는 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호걸제나
덜렁제와 같이 힘차게 질러대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그런 소리제가 야외 소리판에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따라서 옛 명창들은 붙임새나
장단 공부보다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지를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가장 주력했을 것이다. “권오성의 원담소리, 방덕희의 우레목통, 조관국의
한거성”이라고 한 [게우사]의 기록과 “모흥갑의 덜미소리는 십리 밖까지 들렸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그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근대 명창들까지 구사, 존재했던 통성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한 점과 맥을 같이 한다. 김명환이 증언한 이날치 소리가 어디까지
들렸다, 송만갑이 소리하고 나면 천장에서 먼지가 다 떨어졌다, 장판개가 소리를 하면 방안의 문고리가 흔들렸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김명환의 말 중에서 “통성으로 하는데 어떻게 체조를 헐 것이요”라고 한 것처럼 멀리까지 힘차게 지르기도 바쁜데 어떻게 많은
기교를 부릴 수 있겠는가. 단순한 기교와 담백한 곡조, 그리고 멀리까지 크게 지르는 것이 판소리 초창기엔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초기 호걸제와 중고제 역시 그러했으리라 본다. 1995년부터 발표된 이러한 필자의 글은4> 이후 여러 논문 등에 인용되어 지금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아구성(아귀성)은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목청을 좌우로 젖혀 가며 힘차게 내지르는 소리이다. 오래된 고제 창법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날엔 점차 구사되지 않고 있는데 판소리를 아주 많이 듣게 되면 이런 소리가 좋아진다. 성우향 명창의 춘향가 중 <어사와
장모>, 심청가 중 <심청이 선인 따라가는 데> 등의 대목에 아구성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성우향의 춘향가 중
<어사와 장모>에서 장모가 “이 한량이 아닌가?” 하고 묻고 어사가 “아아아, 아니 그 이 서방 아니로세”라고 대답할 때 나오는
‘아아아, 아’ 하는 부분이 아구성이다. 그리고 성우향의 심청가 중 <심청이 선인 따라가는 데>에서 해당화 한 송이가 떨어져 심청
얼굴에 부딪히니 꽃을 들고 하는 말 “송무제 수양공주 매화장은 있건마는 죽으러 가는 몸이 언제 다시 돌아오리”의 ‘송’ 부분이
아구성이다.(‘한’으로 와전되어 불림) 아구성도 소리꾼의 공력에 따라 거의 못내는 사람이 있고 아주 진하게 낼 수 있는 명창이 있는데
현존 명창 가운데 성우향이 가장 강력하고 동치미 같이 시원한 아구성을 내는 명창으로 평가된다. 예전 명창 중에는 방만춘, 그리고 모흥갑,
정응민이 이 아구성에 특기가 있었다.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중에는 정응민제 보성소리, 한승호 판소리에 이 아구성이 많이 들어있다.
상성, 살세성은 가늘고 높게 유유히 민첩하게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5> 따라서 녹음이 안남아있고 글로 표현이 되어 있는
‘아귀상성 살세성’을 잘했다는 방만춘은 고음을 잘 구사할 수 있는 미성을 타고 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판소리에서는 전통적으로
너무 고음, 미성으로만 치우치면 미학적으로 결여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방만춘은 가늘고 높은 고음에서 단조롭고 건조한 느낌이 나지 않도록 폭이
넓고 투박한 아구성을 연마하여 스스로 첨가한 것 같다. 고음은 무척 힘 안들이고 잘 내는데 살갑지 못하고 듣기 안좋은 ‘와가리성’이
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맑고 가볍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소리 명창들은 예로부터 목소리의 중요한 구비 요건으로 ‘구성지고 허벅진
성음’이 있어야 된다고 하였다.6>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방만춘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고음 발성 능력에다가 피나는 독공을 통해서 진하고
풍성한 아구성을 겸비한 것으로 판단된다. [게우사]에 기록된 ‘방덕희의 우레목통’은 방만춘일 가능성이 있다. [게우사]에 당대 여러
판소리 명창들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방만춘 이름이 거론될 위치에 방만춘 이름은 없고 방덕희가 적혀있고 방덕희라는 명창은 그 외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방만춘의 본명은 방덕희일 것이고 ‘萬春’은 명창으로 알려지면서 지어진 그의 판소리 분위기를
나타낸 아호, 예명일 것으로 생각된다. ‘萬春’이 그의 판소리 예명이라면 그는 매우 밝고 화사하고 따뜻하며 완성도 높은 판소리를 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하겠다. 방만춘의 출생, 사망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방만춘이 정노식이 [조선창극사] 책을 출판한
1940년으로부터 120여년 전에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182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방만춘의 작고 시기는 발견된 기록이 아직
없어서 가늠하기 어렵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152쪽에 의하면 신학조(申學祚, 일명 짝귀 或 초립, 동편, 전라도 출생) 명창이
방만춘 이후 세살성으로 유명했다 한다. 이러한 언급으로 보아 신학조가 방만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노식은 신학조의 소리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어쩌면 방만춘의 소리 특징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신학조의) 창법은 단가와 판소리를
진진한 좌담 비슷하게 하되 꼭 장단에 맞어서 음률적으로 하다가 어느 지경에 이르러서 특조을(특조를) 발하여 사람을 경탄케 한다. 이것이
전무후무하리 만큼 다른 광대와 특수하였다 한다. 또 보통 중머리로 하는 데를 진양조로 하고 진양조로 할 데를 늦인 중머리로 하기를
항용한다. 다시 말하면 언제던지 남과는 달리 하여서 꼭 천편일률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뒤박우어서(뒤바꾸어서) 창작적 색채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였었다.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거니와 춘향가와 심청가에 특장하였고 역대 명창의 각 더늠에 소장하고 따라서 비평이 자재하였다
한다.”([조선창극사] 152쪽)
신학조가 “역대 명창의 각 더늠에 소장하고 따라서 비평이 자재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신학조가 방만춘과 같은 초기 명창들의 고제 소리에 대해서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7> 근대 서산 명창 심정순의 판소리
스승은 누구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심정순의 모친이 방모씨이며 심정순의 딸 심화영이 방영래에게 춤을 익히고 방모씨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심정순 일가가 판소리 명창 방만춘이 살았던 해미 인근에서 생장하였으므로 심정순의 판소리 스승이 방만춘, 방응규(방응교), 방진관, 방영래
가문의 명창일 가능성이 있다. 방만춘, 방진관이 심청가와 적벽가를 특기로 했고 심정순도 심청가와 적벽가 음반을 두드러지게 많이
취입하는 등 잘 불렀다는 공통점도 그러한 심증을 뒷받침한다.8> 이러한 필자의 글이 학술대회에서9> 발표될 당시 토론자로
나온 한국예술종합학교 손태도 교수는 공감하면서 다른 명창들의 판소리에는 없는 소리를 심정순과 방진관이 공통적으로 적벽가 음반에서 불렀다는 사실을
들어 필자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심정순의 1925년 가야금병창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미발견 유성기음반 닙보노홍
K518-B의 “간밤에 꿈을 꾸니”라는 소제목과10> 방진관의 1936년 판소리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어젯밤의 꿈을
꾸니) 유성기음반 Victor KJ-1093-B 동판 원반을 복각한 컴팩트디스크11> 녹음을 비교하여 그러한 공통점이 확인된 것이었다.
따라서 방만춘의 판소리는 일가족인 방응규, 방진관에게 이어졌고 이 방씨 일가와 혼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심정순, 심상건,
심재덕, 심매향, 심화영, 심태진 가문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판단된다. 방진관이 고음의 미성을 잘 구사하는 명창이었다는 문헌 기록,
유성기음반에 남아있는 심정순의 목소리가 매우 청아하다는 점은 상호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심정순이 1911년에 녹음한 판소리 춘향가
중 <천자뒤풀이> 유성기음반(ROYAL RECORD NIPPONOPHONE 6098)은 지금까지 단 1장 발견되어 국악음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유성기음반이 1980년대 후반부터 필자 제공으로 복사의 복사를 거쳐 학계에 널리 퍼졌고 심정순 관계 여러 논문에 이 녹음이
모두 인용되었고 2012년 복원 공연도 시도된 바 있다. 이 심정순의 <천자뒤풀이> 유성기음반, 그리고 함께 공개된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심정순 가야금병창 춘향가 중 <사령 춘향 부르는 데>와 <어사또 발행가> 유성기음반(NIPPONOPHONE
6076~6077, 1911년 녹음)은 심정순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심정순의 <천자뒤풀이>(상사허던 우리 님)는 다른
명창들의 <천자뒤풀이>(자시에 생천, 또는 천개자시)와 완전히 다른데 심정순의 <천자뒤풀이>도 방만춘 계보의 소리제일
가능성이 있다. 방만춘의 대표적인 더늠으로 빠른 장단인 적벽가 중 <적벽강화전>이 기록되었고 방만춘의 판소리 맥을 이어간
것으로 생각되는 심정순의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데> 소리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게 전개된 점으로 봐서 방만춘이 빠른 장단의
소리에 능숙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방만춘의 후손 방진관의 판소리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정가풍이라는 것을 필자가 처음 밝힌 바
있고12> 이러한 사실은 이후 여러 논문 등에 인용되어 지금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따라서 방만춘의 판소리에도 정가풍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본고 머리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서산 내포제 시조창 문화가 해당 지역의 해미 출신 방만춘 명창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즉, 방만춘은 적벽화전을 소리하면 좌석이 온통 바닷물과 불빛 천지처럼 됐다는 정노식의 기록 등으로 봐서 빠른 장단으로 매우
박진감 있게 소리를 하기도 하고 대목에 따라서는 그와 상반되게 이면에 맞게 느리고 진중한 정가풍도 잘 구사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로 봐서 방만춘은 예로부터 명창들이 강조하는 음악적으로 조였다 풀었다 하며 긴장감을 특별하게 극도로 고조시키고 이완시키는
판소리의 흥미와 특징을 여실히 지니고 있었던 진정한 명창이었다고 하겠다.
3. 방만춘 후손 판소리 명창
방진관·방응규(방응교)
전통춤 인간문화재 강선영 명인이 방응규(方應奎) 명창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은 방응규에 대한 강선영
명인의 증언 내용이다.
강선영이 한성준 무용 학원에서 춤을 배울 당시 그 곳에서 방응규가 2년간 판소리를 가르쳤다. 방응규는
충남 서산 사람으로서 판소리 명창이고 춤은 추지 못했다 한다. 강선영은 방응규가 방진관(方進寬)하고 동일 인물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방응규가 한성준 학원에서 강선영이 춤 추는 걸 보더니 ‘씨 도둑은 못해. 그래도 (강경수가) 맥은 남겼구나. 그렇지 이제 한성준 있고
너 있고. 그래 그분(강경수)은 그래도 뭔가 남기고 갔어’ 하고 말했다. 방응규는 한성준보다 몇 살 연상이었다. 예전엔 1,2살만
차이가 나도 선배로 깎듯이 대우해서겠지만 한성준이 방응규를 아주 정중하게 모셨다 한다. 당시 이동백, 방응규 모두 흰머리였고 한성준은 검은
머리였다고 한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6mm 비디오테입 관리번호 MI6V-0380~0381, 2003.3.17.16:00~18:00.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리시온빌딩 707호 태평무 사무실에서 강선영 증언, 대담·촬영:노재명)
정노식 저서 [조선창극사] 31쪽 방만춘
명창 편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방만춘 명창이 다듬은) 적벽가의 초고는 여러 사람의 다년 전독하는 동안에
파열되어 겨우 수장지편이 여존하여 있고 심청가는 그 사손(嗣孫)이 보존하여 있다 한다.”
이 기록에 적혀있는 방만춘 사손이
방진관·방응규일 가능성이 있다. 박동진 명창 등의 증언에 의하면 방응규 혹은 방진관이 방만춘의 손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박동진
명창의 말에 따르면 방응규와 방진관은 동일 인물이 아니고 방응규는 방만춘의 손자로서 해미 사람이라 한다. 박동진이 어려서 방응규의
소리를 들었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나이든 명창들이 그 소리를 고제, 충청도제라고 했다 한다. 이동백은 방응규의 소리를 가리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비방했다 한다. 방응규가 춤 추는 건 박동진이 보지 못했다 한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6mm 비디오테입 관리번호
MI6V-0282~0283, 1995.5.17.15:00∼15:30/1999.8.19.16:50∼18:10 노재명이 박동진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국악학자 이보형은 방진관과 방응규가 동일 인물인지는 아직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황인데 같은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정광수
명창은 방진관, 방응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방진관은 잘 모르는 사람이고 방응규는 한성준 집에서 소리를
들어봤다. 방응규 판소리는 중고제가 아니고 그의 스승은 누군지 모른다. 방응규는 소리를 잘했고 한성준이 발굴하여 방송 등 서울에서 출세시키기
위해 내세운 명창으로서 엇붙임을 특색있게 잘했다. 정광수 나이 27~29세 때 방응규는 60대 노인이었다. 방응규는 요즘 판소리
심청가와 반대로 심청이가 수궁에서 나올 때 <소상팔경>(범피중류)을 했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마이크로카세트테입 관리번호
MIMICRO-0038, 1999.11.24.10:20~10:40 노재명이 정광수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한승호의 말에 따르면
방진관은 잘 모르고 방응규는 충청남도 홍성, 광천, 서천 쪽 출신이라 한다. 방응규는 한승호 나이 10대 때 80여세 노인이었으며
판소리와 무용을 하였고 그의 스승이 누군지는 한승호가 모른다고 한다. 한승호의 말에 따르면 방응규는 충청도 판소리를 한 명창으로서
한승호가 평소 못듣던 단가, 춘향가, 적벽가 중 <삼고초려>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담백하게 불렀고 소리를 맺고 끊지 않고
매조지(매듭) 없이 사설을 계속 달고 나가는 식이라 얼씨구 할 데가 없었다 한다. 방응규는 요즘 판소리 심청가와 다르게 심청이가
수궁에서 나올 때 <범피중류>를 했다고 한다. 방응규는 중고제가 아니었고 충청도 판소리를 구사하였는데 입을 딱딱 벌려서 소리를 하지
않고 치아를 딱 다물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마이크로카세트테입 관리번호 MIMICRO-0038,
1999.11.24.10:00~10:20 노재명이 한승호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이 한승호와 노재명 대담시 한승호 명창이 방응규
성음을 방창하여 들려준 바 있는데 그 소리가 방진관의 판소리 유성기음반 녹음과 매우 유사했다. 또한 한승호가 방응규 생존시 들었던
소리 중에서 적벽가 중 <삼고초려>는 방진관이 유성기음반으로도 녹음한 바 있어서 방진관과 방응규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만일
같은 이라면 본명, 예명, 두 이름을 사용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방진관과 방응규가 동일한 명창이라서 그런지, 방진관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한승호 명창의 말대로 일부분은 치아를 다물고 소리를 해서 그런지 발음이 불분명하여 사설을 알아 듣기가 어렵고 그래서 이면 표출의 한계가
있다. 방진관의 녹음에서 발음이 정확치 못하고 성음이 손상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령의 나이 영향, 혹은 아편 중독의 영향이 일부
작용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허나 방진관의 판소리 유성기음반에는 엄청난 소리 공력이 들어있다.13> 방진관은 예전 판소리
명창들이 행한 구실 가운데 하나인 홍패 고사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홍패 고사는 전통사회에서 광대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집에 불려 가서 그
집안의 부귀를 하례하는 덕담을 외우는 것이다. 이보형의 조사와 충청남도 서산 원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충청남도 해미에 판소리 명창
방봉관(1890년대 출생)이 살았다 한다.(1988년 충청남도 서산 원로 주민들·국악학자 이보형 대담 내용, 이 증언 원본 카세트테입:이보형
소장, 이 복사본: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디지털오디오테입 관리번호 MIDAT-0324) 그리고 충청남도 해미 읍내리에 줄타기, 해금,
판소리, 춤 명인 방만득(1900년경 출생)이 살았다 한다.(1988년 충청남도 서산 원로 주민들·국악학자 이보형 대담 내용, 이 증언 원본
카세트테입:이보형 소장, 이 복사본: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디지털오디오테입 관리번호 MIDAT-0323) 초기 판소리 명창 방덕희,
방만춘, 그리고 방응규(방응교), 방진관, 방봉관, 방만득, 또 심화영에게 춤을 가르쳐 준 방영래 명인14> 모두 충청남도 해미 쪽의 국악
명가문 일가친척일 가능성이 있다. 1931년 9월 21~22일자 [매일신보]에 기록된 경성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 ‘팔도
명창대회(조선극장 중계)’에 출연하여 판소리를 공연한 충청남도 공주 명창 방만향(方萬鄕)도 방만춘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근대 태평소 등 관악기의 대명인 방태진(方泰珍, 본명:方泰根, 충청남도 당진 사람, 1901년~?)도 방만춘 명창의 일가친척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방태진과 방만춘 후손 방응규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닮은 데가 있다. 판소리 명창 방성춘(본명:방지순)은 1948년 전남
광산군(현재 광주시)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방성춘의 부친 방재옥과 모친 제예돌은 국악을 하지 않았고 방성춘의 모친 제예돌의 이모가 판소리를
잘했다고 한다. 방성춘의 모친 제예돌 고향은 전남 화순군 춘양면이라 한다. 방성춘은 옛 명창 방만춘, 방진관은 잘 모른다고 한다.(2006년
4월 4일 노재명이 방성춘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15> 강선영의 증언에 의하면 방응규는 한성준보다 몇 살 연상이었고 정광수의
말에 의하면 정광수 나이 27~29세 때 방응규는 60대 노인이었으며 한승호의 말에 따르면 방응규는 한승호 나이 10대 때 80여세 노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명인명창들의 증언 내용과 방응규 사진, 방진관 유성기음반, 방응교 신문기사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판소리 명창
방진관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는 방만춘의 손자 방응규는 대략 1860년대에 출생하여 1940년대 초반까지 생존한 것으로 판단된다.
방응규 흑백사진이 1장 남아있고 방진관 이름으로 발표된 유성기음반 가사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유성기음반 가사지에는 거의
대부분 취입자의 흑백사진이 실려 제작되었으니 앞으로 방진관의 유성기음반 가사지가 발견된다면 방응규 흑백사진과 비교하여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지
여부가 명확히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방진관 이름으로 취입된 유성기음반 목록이다.
심청가 중 <심청이 용궁을 나오는
데>~<화초타령>(5:28) 1936년 2월 29일 녹음 Victor KJ-1064(KRE111) 沈淸傳 娘子出宮(上)
方進寬 伴奏洞簫·伽倻琴·奚琴·杖鼓 Victor KJ-1064(KRE112) 沈淸傳 娘子出宮(下) 方進寬
伴奏洞簫·伽倻琴·奚琴·杖鼓
적벽가 중 <삼고초려>(6:20) 1936년 3월 4일 녹음 Victor
KJ-1089(KRE145) 三國誌 三顧草廬(上) 方進寬 Victor KJ-1089(KRE146) 三國誌 三顧草廬(下)
方進寬
녹음방초(3:06) 1936년 2월 28일 녹음 Victor KJ-1093(KRE104) 短歌 綠陰芳草
方進寬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아내 생각)(3:07) 1936년 3월 5일 녹음 Victor KJ-1093(KRE150) 三國誌
曹軍自嘆 方進寬
이 녹음들은 전부 1993년에 필자가 고증·기획·해설·사설 채록·사진 제공·복각 작업을 하여
장시간음반(LP)과 컴팩트디스크(CD)로 제작되었고16> 이것이 이후 작성된 방진관 관련 논문들에 모두 인용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되고
복각, 발표된 방진관 음원은 이 복각 음반물이 유일하다. 방진관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유성기음반이 취입된 것은
1936년 2월 28~29일과 3월 4~5일이다. 많지 않은 녹음 분량을 이렇게 며칠에 걸쳐서 취입한 것은 방진관이 당시 나이가 고령이었고
일본까지 가서 녹음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36년 이 때를 전후로 한 시기의 신문에는 방진관, 방응규
이름은 안보이고 방응교(方應敎)라는 국악인이 라디오 방송을 한 기록이 많이 있다. 한성준이 방응규를 방송 등에 소개했다는 정광수의
증언이 있으므로 신문에 기록된 라디오 국악 방송 출연자 방응교가 방응규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방진관 녹음은 일본 빅타음반회사 창고에서
동판 원반으로 발굴되었고 그의 유성기음반 실물은 오늘날 거의 발견되지 않고 매우 희귀한 상태이며 녹음을 들어보면 굉장히 고형의 판소리로서 취입
당시 많이 팔릴 수 있는 음반이 아니었다. 전통무용가이자 피리 악사이며 판소리 고수로서 음반회사에 유능한 국악인을 많이 소개했던
한성준이 대중적이진 않지만 사라져 가던 고형의 중고제 판소리를 최대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유서깊은 중고제 명가문 출신 고령의 방진관을
음반회사와 방송국에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방진관의 음반 녹음은 오늘날까지 잘 전해졌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방송 녹음은 6.25 전쟁
등으로 인해 오늘날 단 하나도 남지 못하고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일제시대 신문에 기록된 방송 목록에 의하면 방응교라는 이름으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소리한 곡목은 단가, <노인가>, 판소리 심청가, 적벽가 중 <삼고초려>, 흥보가, 가야금병창이다.
<노인가>는 심정순이 동일한 그 곡명으로 1911년에 유성기음반(NIPPONOPHONE 6096)을 취입한 바 있고 필자가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단가일 것으로 짐작된다. 방응교라는 이름으로 방송된 판소리 중에서 역시 심청가와 적벽가의 비중이 많은데 이러한
사실은 방만춘과 심정순이 심청가와 적벽가에 능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고 방진관이라는 이름으로 유성기음반에 취입된 판소리가 심청가와 적벽가라는
사실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방응교라는 이름으로 방송된 곡목 가운데 판소리, 가야금병창이 있는데 이는 판소리,
가야금병창을 두루 잘했던 심정순과 같은 음악 활동 성향이 나타나는 점이다. 이처럼 전통사회 충청권에서는 가야금병창을 즐겨 연주했고 인기
종목이었다. 신문 기록에 의하면 방응교라는 이름으로 라디오에서 방송한 것은 1933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이다. 그의 추정
생몰연대(1860년대~1940년대 초반)로 봐서 생의 최후까지 80여세의 나이에도 방송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4. 판소리
명창 고수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32~33쪽에 고수관 명창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수관(高壽寬) '딴쳔일수' 고수관(高壽寬)은 순헌철(純憲哲) 3대를 역과한 인(人)이다. 충남 해미 출생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만년까지 거생하였다. 소장은 춘향가인데 염계달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 한다. 송모염(宋牟廉)의 좀 후배이나 역(亦)
그들과 병견하여 일세를 용동한 대가이였다. 성음이 극히 미려하여 딴 목청을 자유자재로 발휘함은 타인의 만만 불급처이였다 한다. 문식이
꽤 있고 첩이한 재조가 있어 소리 좌석의 서화나 기타 광경을 적응하도록 의외에 임시로 만들어 불러서 간관을 경탄케 하는 일이 예사였으며 당년에
대구감사 도임초 연석에 불려가서 소리를 하는데 춘향가 중 기생 점고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고전 중에 있는 기명으로 호창하지 아니하고 다수한 시재
기생의 이름의 의의를 시적으로 만들어 불러서 좌석을 경탄케 하여 일시 회자하였었다 한다. 춘향가 중 가진(자진) 사랑가가 그의 더늠으로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이제 그 1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허둥둥 내 사랑아. (중략) 어허둥둥 내 사랑 내
간간이로구나.’ 운운. 송만갑 전도성 방창. 고씨 만년에 화류병에 걸려서 코먹은 소리(鼻音)로 상기 사랑가를 하였으므로 비음으로
방창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고수관 이름 옆에 정노식은 '딴쳔일수'라고 기록하였는데 ‘딴 목청’, 엇청에 능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춘향과 몽룡이 사랑하는 대목에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소리할 때 각기 다른 목소리, 엇청으로서 두 사람의 말과 모습, 느낌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렇게 노래 도중에 중간중간 등장 인물들의 대사 부분의 청을 실감나게 잘 바꿨다는 것이다. <자진사랑가>
같이 빠른 중중모리 장단에서 순간적으로 이 엇청을 잘못 구사하면 성음이 미끄러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고수관은 그 청 바꾸기를 최고 잘했다는
것이므로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혼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빠른 노래 중에 감쪽같이 묘사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를
능숙하게 하면 거의 소리 묘기라 할 만하다. 정광수 편저 [전통문화 오가사 전집](서울:정광수, 1986년) 123쪽에서 정광수는
춘향가 중 <몽중가> 후반부 “일보이보 나온다” 하는 엇모리 소리를 지목하며 ‘이 대목 고대(古代) 전통’이라는 기록을 해놓았다.
즉, 고제 내지는 중고제라 할 수 있는 오래된 고형의 소리라 하겠다. 정광수의 창본 기록을 통계내 보고 증언을 종합해 보면 정광수의
판소리 다섯바탕 엇중모리 대목에는 거의 대부분 중고제가 있고 엇모리 대목에도 중고제가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 된다.(예외:정광수는 [전통문화
오가사 전집] 90쪽에 “예 내 사정 들어보오 회동성참판 영감께서”하는 엇중모리 대목은 ‘애련성’이라고만 명시해 놓았음) 이는 필자가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글(1995년) 등을 통해 제시한 바 있는 ‘김정근이 창시했다는 상궁접은 엇중모리 장단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언급, 그리고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보이는 ‘고수관(딴쳔일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고제 명창 김정근이 만든 상궁접이
엇중모리일 가능성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듯 정광수가 언급한 것처럼 여러 엇중모리, 엇모리 대목에 중고제가 들어있으므로 엇중모리, 엇모리와 같은
엇박자 계통의 소리가 중고제의 한 특징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염계달의 창법을 많이 모방한 고제 명창 고수관이 ‘딴
목청’에 능했다는 기록도 주목되는 것인데 이 엇청 또한 엇박자 장단의 소리와 마찬가지로 고제에 가까운 특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엇청, 엇중모리, 엇모리와 같이 기존의 소리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기교, 창법들은 각기 고수관, 김정근 이후 성행했다고
보여지며 그 이전 명창 권삼득이 ‘세마치 장단으로 일호차착이 없이 소리 한바탕을 마치는 것’ 등과는 사뭇 다른 당대 신기능에 해당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이는 권삼득을 비롯한 초창기 광대들 이후 출현한 후배들에 의해 판소리 기교에 있어 다양성이 부여되고 판소리의 변이 현상,
소리가 다각도로 발전해 간 과정을 나타내 주는 일면이라고 하겠다.17>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고동지 수관이는 동아부자
염표남묘 은근 문답하는 거동 근과농상 백낙천’이라 하여 농부 부부가 정답게 대화하는 것에 비유하여 고수관의 판소리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이는
고수관의 더늠인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의 정다운 느낌과 같다. 고수관의 더늠 <자진사랑가>는 이동백, 김창룡,
송만갑, 심매향, 김초향, 이화중선, 김추월, 박록주, 심상건(가야금병창) 등 여러 명창들이 방창하여 녹음을 남긴 바 있다. 그
중에서도 고제에 정통했던 김창룡이 1930년에 고수관 더늠이라고 아니리로 밝히면서 <자진사랑가>를 녹음한 다음과 같은 유성기음반이
매우 주목된다.
김창룡 판소리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2061 Columbia 40149-A(21070) 名唱調 사랑가 돈타령 金昌龍
이 대목은 판소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랑가, 사랑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자진사랑가>이다. 이 음반에서 김창룡은 “고수관 고 선생 제였다”라고 하여
<자진사랑가>가 고수관의 더늠임을 밝히고 있다. <자진사랑가>는 ‘자진~'이라는 말 그대로
<긴사랑가>보다 급히 몰아가며 부르는데 장단 속도가 <긴사랑가>(진양조)보다 훨씬 빠른 중중모리로 짜여져 있다.
<자진사랑가>는 추천목으로 불리워져서 경쾌하고 흥겨운 느낌을 준다. 추천목이라 이른 것은 그 소리의 느낌이 마치 추천(그네)을 탈
때의 형상을 나타내는 듯하기 때문이다. 추천목은 염계달(廉季達)이 개발하였다. 춘향가 중 <그른 내력>, 수궁가 중 <앞내
버들은>과 같이 추천목이 쓰이는 대목을 감상할 때 그네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감상하면 이해가 빠르리라 생각된다.
고수관의 더늠인 <자진사랑가>의 음악 특징이 염계달의 추천목과 같다. “고수관이 염계달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창극사]에 기록된 이동백의 증언에 의하면 “염계달은 권삼득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권삼득→염계달→고수관’으로 음악 영향이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수관의 더늠인 <자진사랑가>는 권삼득의 소리제에
뿌리를 두고 탄생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자진사랑가>에서는 앞서 불리워지는 <긴사랑가> 때보다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무르익으면서 둘 사이가 무척 가까워진다. 이제 점잖은 태도는 버리고 서로 농담도 해가며 안고 업고 누워 사랑가를 부른다. 춘향은
이도령이 먹으라고 권하는 음식을 먹기 싫다면서 내숭을 떨기도 하고 아양을 떨기도 한다. 춘향의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성음과 이도령의 자신만만함을
나타내는 성음이 암수로 대비되면서 잘 어우러지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엇청을 잘 구사했다는 고수관의 특기가 극대화 되는 지점이다.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 복각 CD음반(노재명 고증·기획·해설·사설 채록·사진 제공·복각 작업, LG미디어
LGM-K001, 2CD, 1934년 녹음, 1995년 제작)에 김창룡이 <자진사랑가> 초입 부분을 약간 녹음한 것이 있다.
그리고 김창룡 자신의 독집 음반에는 두 차례 사랑가를 취입하였다.(졔비標朝鮮레코드, Columbia) 그 만큼 사랑가는 김창룡이
특기로 내세웠던 대목 중 하나이며 일제 때 인기있었던 대목임을 알 수 있다. 김창룡이 1930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녹음한
<사랑가>(Columbia 40149-A)는 1925년에 제비표조선레코드에서 그가 취입한 <사랑가>에 비해 매우 짧게
녹음되었다. 콜럼비아 독집 음반에서 김창룡은 고수관 제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맛만 보여주는 정도로 간략하게 녹음하였다. 유성기음반 한 면에
<사랑가>와 <돈타령>을 함께 이어서 녹음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창룡의 1930년 <자진사랑가>
유성기음반(Columbia 40149-A) 녹음의 사설을 채록하면 다음과 같다.
김창룡 1930년 판소리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고수관제) 유성기음반 사설 초판: Columbia 40149-A(21070) 名唱調 사랑가·돈타령 金昌龍
鼓韓成俊 재판: Regal C155-A(21070) 名唱制 사랑가·돈타령 金昌龍 鼓韓成俊 (아니리) 고수관, 고 선생 제였다.
(중중모리)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로다. 아마도 내 사랑. 네가 무엇을 네가 먹어? 네 무엇을 네가
먹어? 둥굴둥굴 수박 웃봉지 떼띠리고 강능 백청을 드르르 부어 은사시 걸어 너를 주랴?” “아니 나는 그거 싫소.” “그러면 네 무엇
먹으랴느냐? 으흐으흐흐으 내 사랑이로다. 어허 둥둥 내 사랑아. 모과를 주랴? 석류를 주랴? 시금털털 개살구 애기 서는 데 네 먹으랴느냐?”
“아니 나는 그도 싫여.” “그러면 네 무엇 먹으랴느냐? 외 가지 단 참외 네 먹으려느냐?” “아니 나는 그도 싫소.”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로다. 너 어머니 너를 낳아, 너 어머니가 너를 낳아 날 호리랴고 네가 생겼구나. 으흐으흐흐으 내 사랑이로다. 둥둥둥 내 사랑이야.”
1824년 명창들이 낸 상소문 [갑신완문(甲申完文)]에는 고천관(高千寬)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고수관과 동일 인물인지 형제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관련 명창인 것으로 보인다. 고수관은 딴 목청을 자유자재로 발휘했고 즉흥적인 작사·작편곡에 능했다고 하니
예로부터 판소리를 판의 분위기에 따라 달리 할 줄 알아야 진정한 명창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판소리계 가치관에 적합한 명창이었다고 하겠다. 그 만큼
음악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겠다. 고수관이 선배 명창 염계달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는 정노식의 기록이 주목된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염계달은 경기도 여주군 또는 충청남도 덕산군에서 출생했으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살았고 충청북도 음성에서 판소리 공부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여주는 음성, 충주와 접해 있으며 행정구역이 충청도였다가 경기도로 편입된 곳이다. 염계달의 주된 활동 반경으로 봐서 억양이
충청도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1827년 명창들이 낸 상소문 [정해소지( 丁亥訴志)]에는 염계량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염계달과
동일 인물인지 형제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관련 명창인 것으로 보인다. 1939년 7월 7일자 [조선일보] “조선 소리
내력기(하)”에서 심재덕은 염계달(원문에 ‘염수달’이라고 오자로 잘못 기록되었음)이 충남 덕산(德山) 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노식이
이러한 심재덕의 기록을 참고하여 [조선창극사](1940년)에 염계달의 출생지를 경기도 여주군 혹운 충남 덕산군이라고 표시한 듯하다. 국악학자
이보형은 염계달 명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염계달은 그의 더늠이 판소리에 여러 개 전해져서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염계달이 ‘경드름’과 ‘추천목’이라는 소리제를 내어서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염계달이 냈다는 추천목 대목은 판소리 춘향가
광한루 장면에서 <네 그른 내력>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추천목은 경기민요 <한강수타령>과 같이 라(la)로 종지하는
반경드름이 판소리화 된 것 같습니다. 이 대목의 선율이 고수관제 <자진사랑가>와 비슷한 것으로 봐서 고수관이 염계달에게 배워서
추천목으로 소리를 짠 것 같습니다.”18>
정노식은 중고제, 호걸제가 염계달, 김성옥의 법제를 많이 계승하였다 했는데
그렇다면 염계달 소리가 김성옥의 소리와 더불어 중고제, 호걸제의 표준처럼 인식되었다 할 것이다.19> 김창룡은 염계달의 대표적인
더늠으로 판소리 춘향가 중 <돈타령>을 꼽아 이를 방창하여 1930년 유성기음반에 녹음한 바 있다.(Columbia 40149-A,
Regal C155-A) 국악학자 이보형은 고수관 명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고수관 제자에 대하여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고수관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가 전해지는데 이 대목은 오늘날도 고수관의 소리제로, 추천목으로
소리합니다. 고수관이 한시를 잘해서 춘향가 중 <기생 점고> 가사를 즉흥적으로 지어 불렀다고 하는 것이 [조선창극사]에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 신자하와 함께 유람한 기록이 보입니다. [조선창극사]에는 고수관이 성음 변화를 잘 시킨다고 하여 별명이
‘딴청 일수’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이상하게 변해서 충청도 민간 전설에는 고수관이 환술을 잘하는 이로 나옵니다. 여러 가지 청을 잘
부린다 하는 말이 환술을 잘 부린다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지요.”20>
국악 집안 출신이 아닌 판소리 명창은 특별히
‘비가비’라고 전해져 오는데 고수관이 비가비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고수관 역시 국악 전문 집안 출신일 것으로 보인다. 고수관
이외에 고씨 중에서 옛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난 이가 거의 없다. 흔치 않은 성이고 고씨 성을 가진 옛 국악인이 많지 않고 전통사회에서 경기,
충청도가 같은 음악 문화권으로 국악인들이 왕래하며 활동하였으므로 경기도 세습 무속음악 피리·대금·해금 악사 고재덕(高載德,
1889~1952년)이21> 고수관의 일가친척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가야금병창 명인 오태석의 부친인 판소리 명고수
오수관(吳壽寬)은 판소리 명창 고수관(高壽寬) 이름과 유사한데 우연일 수도 있지만 판소리계의 저명한 고수관 명창 이름을 존중하고 영향을 받아
일부러 비슷하게 작명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수관의 출생, 사망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방만춘이 1820년 무렵에
태어났고 [조선창극사]의 방만춘 편 다음 페이지에 고수관 편이 기록된 것으로 봐서 고수관이 방만춘보다 약간 어리거나 비슷한 연령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고수관은 1820년대 초반에 출생했을 것이다. 고수관의 작고 시기는 발견된 기록이 아직 없어서 가늠하기 어렵다.
[조선창극사]에 고수관은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의 좀 후배로서 그 세 명창과 병견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대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수관이 얼마나 뛰어난 명창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점이다. 그리고 고수관이 문식이 꽤 있었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도 주목되는 이색적인
장점이었다고 하겠다. [게우사]에는 고수관 명창의 아니리를 그의 특기로 주목해 기록되어 있다.
5.
방만춘·고수관 관련 음반과 사진자료
방만춘, 고수관은 오래전 명창들이라 사진, 음원은 기록된 것이 없다. 방만춘, 고수관과
관련된 음반과 사진자료를 여기 한데 모아 보았다.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1) 방만춘 후손 방진관의 1936년 판소리
유성기음반들을 필자가 1993년에 장시간음반과 컴팩트디스크로 음원 고증·기획·해설 집필·사설 채록·복각 제작 작업을 한 것. 방진관의 녹음을
통해 방만춘의 판소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12인치 장시간음반(LP) 관리번호 MI12LP-0700~0701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 소리: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고수:한성준·지동근 외.
(주)서울음반 SXCR-101(1LP) 디자인:유형배, 심의번호:9309-G600, 음반 고증·기획·해설·사설채록:노재명(해설서 6쪽
수록), 1928~1939년 녹음, 1993년/1994년 1월 31일 유성기원반(마스터) 복각 제작. 뒷면) 1.단가
녹음방초(3:06)(방진관) 2.심청가 중 심청이 용궁을 나오는 데~화초타령(5:28)(방진관) 3.적벽가 중 삼고초려(6:20)(방진관)
4.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아내 생각)(3:07)(방진관)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컴팩트디스크(CD) 관리번호 MICD-0426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 소리: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고수:한성준·지동근 외.
(주)서울음반 SRCD-1142(1CD), 디자인:유형배, 심의번호:9309-G600, 음반 고증·기획·해설·사설채록:노재명(해설서
22쪽 수록), 1928~1939년 녹음, 1994년 1월 31일 유성기원반(마스터 동판) 복각 제작. 7.단가
녹음방초(3:06)(방진관) 8.심청가 중 심청이 용궁을 나오는 데~화초타령(5:28)(방진관) 9.적벽가 중 삼고초려(6:20)(방진관)
10.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아내 생각)(3:07)(방진관)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2)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문헌.
방만춘 후손 방진관이 1936년 2월 29일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용궁을 나오는
데>~<화초타령> 유성기음반(Victor KJ-1064) 광고. 일본 빅타음반회사 1936년 9월 신보 광고
책자(1936년 8월 15일 발행) 앞표지와 8쪽. 1936년 당시 함께 취입된 방진관의 단가, 판소리 녹음은 모두 기악반주로 되어
있는데 반주자들 성명이 유성기음반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퉁소·가야금·해금·장고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는데 연주를 들어보면 퉁소는 정해시,
가야금은 심상건, 해금은 김덕준, 장고는 한성준이라고 판단된다. 이들은 당시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이러한 구성으로 기악합주, 민속성악 반주를
많이 하였다.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3)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문헌. 방만춘 후손 방진관이 1936년 2월 28일과
3월 5일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한 단가 <녹음방초>와 판소리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아내 생각)
유성기음반(Victor KJ-1093) 광고. 1937년 3월 22일자 [조선일보]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4)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문헌. 방만춘 후손 방진관이 1936년 3월 4일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적벽가 중 <삼고초려>
유성기음반(Victor KJ-1089) 광고. 1937년 2월 24일자 [조선일보]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5)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문헌. 방만춘 후손 방진관이 1936년 2월 29일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용궁을 나오는
데>~<화초타령> 유성기음반(Victor KJ-1064) 광고. 1936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6)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 충청도 출신의 중고제 판소리 명창 방응규 모습. 초기 판소리 명창 방만춘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7)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0002
1911년에 녹음된 심정순 명창의 중고제 판소리 춘향가 중 <천자뒤풀이> 유성기음반(ROYAL RECORD
NIPPONOPHONE 6098). 심정순의 이 <천자뒤풀이> 유성기음반은 지금까지 상기 사진에 있는 음반 단 1장만
발견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이 녹음이 필자에 의해 널리 제공되어 여러 논문에 인용되고 2012년 복원 공연 등에 활용되었다.
심정순의 이 <천자뒤풀이>(상사허던 우리 님)는 다른 명창들의 <천자뒤풀이>(자시에 생천, 또는 천개자시)와 완전히
다르다. 심정순 일가의 판소리는 방만춘 계보의 소리제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심정순의 이 <천자뒤풀이>도 방만춘제일
가능성이 있다.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8)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컴팩트디스크(CD) 관리번호 MICD-0193~0194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5) 심상건 가야금산조와 병창' CD음반(노재명 고증·기획·해설 집필·사설 채록·사진자료 제공,
엘지미디어/LG소프트 LGM-AK005, 2CD, 1928·1930년 녹음, 1995년 제작) 충청남도 서산
심정순·심상건·심매향·심재덕·심화영·심태진·심수봉 국악 명가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 기록이 1995년 이 CD음반 해설서(글:노재명)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이 복각 CD음반 해설서를 통해 심정순 일가 인적 사항, 음원 목록, 전승 계보, 대담자료, 분석, 사진자료 등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 심정순 일가의 사진자료들은 이 CD음반 해설서에 처음 발굴, 소개된 후 널리 퍼져 많이 인용되었다. 심정순 일가는 방만춘
계보의 판소리를 전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방만춘의 판소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심정순 일가의 국악 녹음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방만춘 관련 음반·사진자료(9) 서산 국악 명가문 - 심정순·심상건·심매향·심화영 전통음악 모음집 CD음반.
지구레코드 JCDS-0802(1CD), 2007년 12월 1일 제작. 선곡·유성기음반 음원 제공·고증·음반 해설: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 복각. 심정순의 모친이 방모씨이며 심정순의 딸 심화영이 방영래에게 춤을 익히고 방모씨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심정순 일가가
판소리 명창 방만춘이 살았던 해미 인근에서 생장하였으므로 심정순의 판소리 스승이 방만춘, 방응규, 방진관, 방영래 가문의 명창일 가능성이 있다.
고수관 관련 음반·사진자료(1) 고제에 능했던 김창룡 명창이 1930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 유성기음반. 고수:한성준. 여기에 고수관제 <자진사랑가> 녹음이 담겨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2061 Columbia 40149-A(21070) 名唱調 사랑가 돈타령 金昌龍
고수관
관련 음반·사진자료(2)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컴팩트디스크(CD) 관리번호 MICD-0185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2) 판소리
명창 김창룡·그 손녀 김차돈’ CD음반(노재명 고증·기획·해설 집필·사설 채록·사진 제공·복각 작업, 엘지미디어/LG소프트 LGM-AK002,
1CD, 1995년 제작) 김창룡의 고수관제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 1930년 녹음 수록.
고수관 관련
음반·사진자료(3)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가사지. 김창룡이 고수관 더늠이라고 아니리로 밝히면서 녹음한 <자진사랑가> 유성기음반
가사지. 1930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된 김창룡의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고수관제) 유성기음반의 가사지.
고수:한성준. Columbia 40149-A(21070) 名唱調 사랑가 돈타령 金昌龍
고수관 관련 음반·사진자료(4~5)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 충청남도 해미 판소리 명창 방만춘, 고수관 등에 관해서 조사 연구한 노재명 저서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서울:도서출판 채륜, 2012년) 출판 기념 공연. 이애리·이은우 심화영제 가야금병창 단가 <백구타령>(장고:신성수) 장면.
2012년 10월 16일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문화원에서 열린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 행사 단체 사진.
주최:문화체육관광부·충청남도·서천군, 기획:국악음반박물관, 해설:노재명.
6. 방만춘·고수관 자료 보존 방안, 맺는말
필자는 본고에서 충청남도 해미 명창 방만춘·고수관의 생애와 판소리 특징에 대해서 조사, 분석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다루어
보았다. 그리고 방만춘·고수관의 판소리 맥을 이은 명창과 후손들에 관해서도 조사, 기록하였고 방만춘·고수관 관련 음반과 사진,
문헌자료를 모아 정리해 놓았다. 이밖에도 앞으로 방만춘·고수관 및 그 일가친척의 판소리 창본, 전통가무악 유적지, 활동 기록 문서,
의상, 악기, 유품 등에 관한 조사·발굴·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향후 방만춘·고수관 및 그 일가친척의 전통가무악
자료 전시회, 관련 박물관 건립, 고제·중고제 심층 분석과 복원 공연, 교육 자료, 작곡 소재, 다큐멘터리 영화 재료 등에 널리 활용되었으면
한다. 이 모든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의 안전한 보존이라 하겠다. 소장처가 파악된 자료에 대해서는 우선 원본이 훼손되지 않게
열람용 및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디지털 복제 등의 추진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자료의 검색과 활용이 수월하도록 데이터베이스
작업도 함께 이루어진다면 관련 분야 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방만춘·고수관의 판소리를 이해하고 전승이 끊어진 예술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해당 자료뿐 아니라 이동백, 김창룡, 김창진, 김세준, 김차돈, 심정순, 심상건, 심재덕, 심매향, 심화영, 심태진, 방진관, 백점봉,
한성준, 지동근 같은 충청도 중고제 명창, 명고수들의 유성기음반도 참고자료로 함께 수집, 활용 연구해야 온전한 성과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방만춘·고수관의 판소리와 관련이 깊은 내포제 시조창, 이어인련 은산 별신제 가무악, 신수덕 무가, 한성준 충청도
전통춤과 피리시나위, 박팔괘 충청도 가야금병창, 유공렬·이기중·박동진·나성엽 충청도 판소리, 박록주의 충청도 정춘풍-박기홍제 판소리, 김숙자의
충청도 김석창-김덕순제 판소리 등의 자료도 함께 병행하여 수집 보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자료들이 방만춘·고수관 같은
중고제 지역 초기 명창들의 판소리와 충청도 전통가무악 뿌리를 규명하고 잊혀진 충청도 전통가무악을 되살리고 미래의 충청도 향토음악을 창출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 1>
김희라 대담·정리 “국악학자 이보형 대담자료(2) 판소리 전기 8명창” [판소리 명창 제2호](경기 양평: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2010년
12월 15일) 7~9쪽. 2>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357~358, 364쪽. 3> 노재명 글,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2) 판소리 명창
김창룡·그 손녀 김차돈'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02, 1CD, 1995년) 5쪽.
4> 노재명 글,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2) 판소리 명창 김창룡·그 손녀 김차돈'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02, 1CD, 1995년) 3~4쪽. 5>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354~355쪽. 6> 노재명이 만난
명인명창 “판소리·고법·아쟁·거문고·작곡 명인 정철호” [판소리 명창 제2호](경기 양평: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2010년 12월 15일)
74쪽 정철호 증언 등. 7> 노재명 저서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서울:도서출판 채륜, 2012년) 239~241쪽.
8> 노재명 논문, "심정순 일가 전통가무악 자료 현황과 보존 방안" [전통예인 심정순가(家)의 춤·소리문화] 서적(서울:연낙재,
2012년 11월 28일) 35쪽. 9> 노재명 논문 "심정순 일가 전통가무악 자료 현황과 보존 방안" 발표 당시.
2012년 11월 28일 오후 2시 서산문화원 문화감상실에서 열린 ‘전통예인 심정순가(家)의 춤·소리문화' 학술대회(행사
주최:연낙재·한국춤문화유산포럼, 행사 후원:충청남도·서산시) 10> 노재명 글,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5) 심상건 가야금산조와
병창'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05, 2CD, 1995년) 16~17쪽에 실린 심정순
유성기음반 목록. 11> 노재명 글·사설 채록,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서울음반 제작, SXCR-101, 1LP, 1993년
/ SRCD-1142, 1CD, 1994년) LP 해설서 7쪽과 CD 해설서 22쪽에 실린 방진관 판소리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아내 생각) 사설. 12> 노재명 글,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2) 판소리 명창
김창룡·그 손녀 김차돈'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02, 1CD, 1995년) 5쪽.
13> 노재명 글·사설 채록,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서울음반 제작, SXCR-101, 1LP, 1993년 / SRCD-1142, 1CD, 1994년) LP
해설서 2·4쪽과 CD 해설서 5·10~11쪽에 실린 방진관 명창의 판소리에 대한 분석 글. 14> 노재명 글,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5) 심상건 가야금산조와 병창'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05, 2CD,
1995년) 25쪽에 실린 심화영 증언 내용. 15> 노재명 저서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서울:도서출판 채륜, 2012년)
242~246쪽. 16> 노재명 글·사설 채록,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음반 해설서](노재명 고증·기획, 서울:서울음반 제작, SXCR-101, 1LP, 1993년
/ SRCD-1142, 1CD, 1994년) 17> 노재명 저서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서울:도서출판 채륜, 2012년)
40~41쪽. 18> 김희라 대담·정리 “국악학자 이보형 대담자료(2) 판소리 전기 8명창” [판소리 명창 제2호](경기
양평: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2010년 12월 15일) 13쪽. 19> 노재명 저서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서울:도서출판 채륜, 2012년) 236~238쪽. 20> 김희라 대담·정리 “국악학자 이보형 대담자료(2) 판소리 전기
8명창” [판소리 명창 제2호](경기 양평: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2010년 12월 15일) 15~16쪽. 21> 이자균
논문, “유성기음반의 명인명창 열전(1)” [한국음반학 제2호](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2년) 413쪽에 실린 고재덕 생몰연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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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30 | |
첫댓글 티무르님 마지막 글인데 살아계시긴한가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