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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 봉운 Family Home cafe 원문보기 글쓴이: ounsarang
연대별 한국주요문학작품 및 작가 (1) -
무궁화
1906∼1920년대
1906
이인직 『혈의누』
『혈의누』
▶이인직
1908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해에게서 소년에게」
▶최남선 (崔南善)1890∼1957
호는 육당(六堂), 대몽최(大夢崔), 공육(公六), 일람각주인(一覽閣主人), 한샘. 1890년 3월 8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2년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익히고,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 제일중학에 입학했으나 2개월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를 편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1907년 모의국회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08년 귀국하여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종합월간지 『소년』을 창간하면서 신문화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에 광문회(光文會)를 창립하여 고문헌 보존과 재간행에 힘썼고, 1914년에는 종합 월간지 『청춘』을 창간하는 등 신문화 초기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의 기초 책임자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이듬해에 출옥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동명사를 세우고 잡지 『동명』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1927년 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회의 촉탁으로 위촉되면서 훼절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938년에는 만주 신경으로 건너가 『만몽일보』의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했다.
1910
이해조 『은세계』
『은세계』
▶이해조
1914
『학지광』창간 (이광수·김억·전영택·한용운)
▶이광수 (李光洙) 1892∼1950
호는 고주(孤舟), 외배, 춘원(春園), 장백산인(長白山人). 아명은 보경(寶鏡). 1892년 2월 1일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02년 부모를 잃은 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을 피해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5년 과정을 마치고 1913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다시 도일하여 1919년까지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안창호의 흥사단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1934년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1939년부터는 카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보였다. 해방 이후에는 반민법에 의해 또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50년 7월 납북되었으며, 1950년 !
10월 25일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 억
▶김 억 (金 億) 1886∼ ?
호는 안서(岸曙), 호적명은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곽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熟) 문과를 중퇴했다. 그 후 오산중학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8.15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하였고, 6.25 당시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출판사 교정원(1952)으로 일하다가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했으며(1953.4), 다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강제 임명되었으나(1956.7), 이후 평북 철산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했다(1958). 그 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영택 (田榮澤) 1894∼1968
호는 추호(秋湖). 늘봄. 평양에서 출생. 부친이 설립한 진남포 보동학교를 거쳐 1910년 평양대성학교를 수료, 서울 관립의학교에 입학했다가 1912년 도일, 공경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와 고등학부를 거쳐 1918년 대학문학부를 졸업, 다시 동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 해에 김동인, 주요한 등의 제의로 최초의 동인지 『창조』의 창간동인이 되었다. 1919년 동경 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고 3월말에 귀국, 한때 진남포에 가서 삼승학교 교장을 지냈다. 1923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면서 작가생활과 기독교 교직자 생활을 병행, 1930년에 미국 태평양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흥사단에도 가입했고, 1935년에는 기독교잡지 『새사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민주당 문교부장, 문교부 편수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신학교,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1961년에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피선되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한용운
1916
신채호 『꿈하늘』
『꿈하늘』
▶신채호 (申采浩)1880∼1936
호는 단재(丹齋). 충북 청주 출생. 20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성균관 수학시절부터 「대한매일신보」주필로 있으면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고, 『을지문덕』, 『이충무공전』 등 영웅전을 써서 민족의식의 앙양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에가입,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고, 1910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해조신문」을 발간했다. 그후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만주의 고루려 유적지를 답사, 국사 연구와 저술에도 힘썼다. 임시정부 수립 때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북경에서 순한문지 『천고(天鼓)』를 발행하면서 「중화일보」에 논설을 썼다. 1926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란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가 1929년 대련에서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중 3년만에 옥사하였다. 순수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당시 식민주의적인 일제의 학설을 배격했으며,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 언론계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1917
이광수 『무정』
『무정』
이광수(李光洙)의 첫 장편 소설. 1917년 1월 1일에서부터 1917년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된 뒤 1919년 신문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우리 나라 근대 문학사상 최초의 장편 소설인 동시에 신소설의 공리적 효용주의를 계승하여 문학적으로 완성을 기도함으로써 근대문학 초기에 개척자적 공적을 인정받은 대표작이다. 『무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김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 개인 교수를 하다가 그녀의 미모에 매혹된다. 그 즈음 그는 또한 어린 시절의 동무요, 또 자기를 귀여워해 주던 박진사의 딸인 영채가 투옥된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 영채는 경성 학교 배학감에게 순결을 짓밟히고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결심하나 동경 유학생 병욱을 만나 자살을 단념하고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된다. 형식 역시 선형과 약혼하고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난다. 세월은 흘러 형식과 선형은 금년 9월에 시카고 대학을 마치면 전후의 구라파를 돌아서, 영채는 동경 우에노(上野) 음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월에 각각!
고국으로 돌아와 모든 문명사상의 보급에 힘쓸 예정이다. 자아의 각성을 바탕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민족에 대한 각성으로까지 확대한 『무정』은 신소설에 비해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구체화하였고, 섬세한 심리묘사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적 윤리에 매인 영채와 신여성인 선형의 사이를 오가는 형식의 의식은 전통과 근대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시대질서를 따른 도식적 구도에 의해 진전된다는 점에서 계몽적 관념에 머물러버린 한계가 있다. 결국 『무정』은 낡은 체제를 해체하고 새 질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과도기적 인간상으로서의 이형식과 예속적 존재에서 독립적 존재로 해방되는 박영채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신소설을 계승 발전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 (李光洙)1892∼1950
호는 고주(孤舟), 외배, 춘원(春園), 장백산인(長白山人). 아명은 보경(寶鏡). 1892년 2월 1일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02년 부모를 잃은 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을 피해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5년 과정을 마치고 1913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다시 도일하여 1919년까지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안창호의 흥사단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1934년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1939년부터는 카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보였다. 해방 이후에는 반민법에 의해 또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50년 7월 납북되었으며, 1950년 1!
0월 25일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19
『창조』창간 (주요한·김동인·전영택)
▶주요한
▶김동인 (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 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1923년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1920년대 중반 계급문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이에 반대하여 문학의 순수와 자율성을 강조하였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사소설의 창작에도 힘썼다. 1939년에는 박영희(朴英熙),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북지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1개월 동안 만주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두 번째의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속 망국인기」(1948) 등의 ?
步資?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전영택 (田榮澤)1894∼1968
호는 추호(秋湖). 늘봄. 평양에서 출생. 부친이 설립한 진남포 보동학교를 거쳐 1910년 평양대성학교를 수료, 서울 관립의학교에 입학했다가 1912년 도일, 공경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와 고등학부를 거쳐 1918년 대학문학부를 졸업, 다시 동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 해에 김동인, 주요한 등의 제의로 최초의 동인지 『창조』의 창간동인이 되었다. 1919년 동경 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고 3월말에 귀국, 한때 진남포에 가서 삼승학교 교장을 지냈다. 1923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면서 작가생활과 기독교 교직자 생활을 병행, 1930년에 미국 태평양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흥사단에도 가입했고, 1935년에는 기독교잡지 『새사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민주당 문교부장, 문교부 편수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신학교,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1961년에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피선되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주요한 『불놀이』
『불놀이』
▶주요한
1920
『페허』창간 (김억·오상순)
▶김억 (金 億) 1886∼ ?
호는 안서(岸曙), 호적명은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곽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熟) 문과를 중퇴했다. 그 후 오산중학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8.15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하였고, 6.25 당시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출판사 교정원(1952)으로 일하다가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했으며(1953.4), 다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강제 임명되었으나(1956.7), 이후 평북 철산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했다(1958). 그 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상순
『개벽』창간 (박영희·김기진·김동인·이상화)
▶박영희 (朴英熙) 1901∼ ?
아명은 거복(巨福), 호는 회월(懷月) 또는 송은(松隱). 1901년 12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에 수료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1년 귀국하여 황석우와 함께 시동인지 『장미촌』을 발간하고, 이듬해 『백조』 동인이 되어 「미소의 허영시」, 「환영(幻影)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하며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곧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1923년에는 김기진, 연학년, 이상화 등과 더불어 파스큘라(PASKULA)를 결성하며 계급의식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24년 『개벽』의 문예부 책임자가 되어 신경향파 건설에 주력하였으며, 1925년 카프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부터 시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에 전념, 소설 「사냥개」, 「철야」, 「지옥순례」 등과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 등을 발표하였다. 1926년 말부터 1927년 초까지 김기진과 `내용·형식"논쟁을 벌인 후 카프의 제 1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여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개념을 주창하였다. 그러?
?1934년 경부터 카프문학에 회의를 느끼고 전향하였다. 이후 친일 활동을 벌임으로써 해방 후에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6.25때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기진 (金基鎭) 1903∼1985
호는 팔봉(八峰). 1903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배재고보를 마치고 일본 입교(立敎)대학 영문학학부에 유학하였으며, 재학 중 연극 단체 토월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문학론에 깊이 빠져들었다. 1923년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무산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이후 잡지와 신문에 무산문예이론을 소개하고 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24년 파스큘라를 조직하고, 1925년에는 카프(KAPF)를 조직하여 계급 문학운동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는데, 그로 인해 1931년과 1934년 일제의 카프탄압 때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였고, 1960년에는 경향신문 주필, 5·16군사혁명 이후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동인 (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 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1923년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1920년대 중반 계급문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이에 반대하여 문학의 순수와 자율성을 강조하였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사소설의 창작에도 힘썼다. 1939년에는 박영희(朴英熙),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북지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1개월 동안 만주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두 번째의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속 망국인기」(1948) 등?
?단편을 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이상화
1921∼1925년대
1921
『장미촌』창간 (황석우·변영로·박영희)
▶황석우 (黃錫禹) 1895∼1960
호는 상아탑(象牙塔). 1895년 서울 출생.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를 중퇴하였다. 『태서문예신보』에 「은자의 가」, 「어린 제매에게」 등을 발표하였고, 1920년 『폐허』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 「애인의 인도」, 「벽모(碧毛)의 묘(猫)」, 「태양의 침몰」 등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박종화, 변영로, 노자영 등과 함께 동인지 『장미촌』을 창간하며 시 「장미촌의 향연」을 발표하였다. 1928년 『조선시단』을 창간하였으며, 이듬해 시집 『자연송』을 발간하였다. 이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시작활동을 중단했다. 6.25 이후 국민대 교무처장을 지내다가 사망 직전 다시 펜을 들었지만 곧 ?으로 사망했다.
▶변영로
▶박영희 (朴英熙) 1901∼ ?
아명은 거복(巨福), 호는 회월(懷月) 또는 송은(松隱). 1901년 12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에 수료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1년 귀국하여 황석우와 함께 시동인지 『장미촌』을 발간하고, 이듬해 『백조』 동인이 되어 「미소의 허영시」, 「환영(幻影)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하며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곧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1923년에는 김기진, 연학년, 이상화 등과 더불어 파스큘라(PASKULA)를 결성하며 계급의식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24년 『개벽』의 문예부 책임자가 되어 신경향파 건설에 주력하였으며, 1925년 카프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부터 시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에 전념, 소설 「사냥개」, 「철야」, 「지옥순례」 등과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 등을 발표하였다. 1926년 말부터 1927년 초까지 김기진과 `내용·형식"논쟁을 벌인 후 카프의 제 1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여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개념을 주창하였다. ?
瀏??1934년 경부터 카프문학에 회의를 느끼고 전향하였다. 이후 친일 활동을 벌임으로써 해방 후에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6.25때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 억 『오뇌의 무도』
『오뇌의 무도』
김억(金億)의 역시집. 1921년 3월 20일 광익서관에서 간행되었다. 167면. 본관 소장본은 1923년 8월에 나온 재판본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인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우리 나라 최초의 현대시집이다. 김유방(金惟邦)의 장정에 장도빈(張道斌),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의 서문과 역자 자신의 서문, 그리고 김유방의 서시가 있다. 내용은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김억이 『태서문예신보』, 『창조』, 『폐허』 등을 통해 발표하였던 역시들을 한데 모은 것으로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가을의 따님」 등 10편, 사맹의 「반주(伴奏)」 등 8편, 보들레르의 「죽음의 즐거움」 등 7편, 예이츠의 「꿈」 등 6편, 기타 시인의 작품으로 "오뇌의 무도곡" 속에 23편, "소곡(小曲)"에 10편 등 모두 8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의 대본은 에스페란토 역본이며 이 밖에도 영어와 일어를 주로 참고하고 "불어도 힘있는 한 참고하였다"고 역자 자신이 밝히고 있다. 재판본에서는 일부 시인의 작품이 삭제되거나 추가되어 초판보다 약 10편이 더 많은 9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같은 작품의 경우에도 끊?
曇愎?퇴고 과정을 통해 적지않게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모두 김억의 철저한 리듬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데, 원시가 지니고 있는 해조(諧調)를 가능한 한계 내에서 한국어의 리듬으로 살려보려 한 그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오뇌의 무도』는 최남선으로부터 끊임없이 모색되어 온 한국 자유시가 그 형태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인정된다. 또한 이 시집 전체에서 느껴지는 가늘고, 여리고, 애달프고 서러운 감각은 권태, 절망, 고뇌를 거쳐 나타나는 병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1920년대 전기 우리 시의 체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 억 (金 億) 1886∼ ?
호는 안서(岸曙), 호적명은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곽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熟) 문과를 중퇴했다. 그 후 오산중학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8.15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하였고, 6.25 당시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출판사 교정원(1952)으로 일하다가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했으며(1953.4), 다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강제 임명되었으나(1956.7), 이후 평북 철산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했다(1958). 그 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22
『백조』창간 (이상화·나도향·현진건)
▶이상화
▶나도향
▶현진건 (玄鎭健) 1900∼1943
호는 빙허(憑虛). 1900년 8월 9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2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세이조중학(成城中學)을 졸업하고, 그 이듬해인 1918년에는 중국에 건너가 상해 호강대학(扈江大學) 독일어전문부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대구에서 이상화, 백기만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를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가 1920년 11월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처녀작 「희생화」는 황석우에게서 혹평을 받았으나, 1921년 빈곤 속에서 나타나는 아내의 따뜻한 애정을 그린 「빈처」와 암담한 현실을 탈출하는 길이 술밖에 없음을 보여준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함으로써 소설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1922년에는 박종화, 홍사용, 박영희, 나도향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유린」, 「할머니의 죽음」과 같은 사실주의적 작품을 발표했다. 1943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김동인 「태형」
「태형」
▶김동인 (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 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1923년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1920년대 중반 계급문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이에 반대하여 문학의 순수와 자율성을 강조하였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사소설의 창작에도 힘썼다. 1939년에는 박영희(朴英熙),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북지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1개월 동안 만주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두 번째의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속 망국인기」(1948) 등의 ?
步資?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염상섭 『만세전』
『만세전』
염상섭(廉想涉)의 중편 소설. 「묘지(墓地)」라는 제목으로 1922년 7, 8월 『신생활(新生活)』에 연재하다가 중단된 뒤 「만세전」이라 개제하여 1924년 고려공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작품의 일부를 수정하여 1948년 2월 25일 수선사(首善社)에서 재간행 되었다. 염상섭은 활동 초기에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함께 3부작을 이룬 「암야」, 「제야」에서 한국적 현실과는 관련 없이 추상적인 관념만을 표백해 놓은 작품을 썼으나, 「만세전」에 와서 구체적인 현실감을 획득함은 물론 문학을 향한 정열이 차분한 관조의 눈으로 대치되기 시작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에 유학 중인 "내"가 아내의 위독 전보를 받고 귀향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 정자(靜子)가 있는 술집에 가서 술도 마시고, 코오베(神戶)에 들러, 전에 들렀던 카페도 가보고, 음악학교 학생인 을라(乙羅)도 만나본다. 귀국하는 동안 짓궂게 미행하는 일본형사에게 시달려 울분도 터뜨린다. 배 안의 욕실(浴室)에서, 우리 나라 노무자를 경멸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없는 설움과 압박과 곤궁 속에 허덕이는 우리 나라 노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한?
㉨貶?휘몰아친다. 집에 와 보니, 아버지는 현대 의학으로는 넉넉히 고칠 수 있는 유종(乳腫)을 재래식 의술에 맡겨 결국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유학 길에 오르려 하나, 집안 식구들의 만류로 발이 묶였다가 일본에 있던 정자로부터 새 길을 찾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에게 돈 백 원을 부쳐 주며, 그녀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 이윽고 그는 불쌍한 아내, 사랑보다는 인정이 앞섰던 안쓰런 아내의 생각을 하며, 질식할 듯한 집안을 박차고 동경(東京)으로 떠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탄압받던 어둡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사회와 생활상의 단면이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잘 묘사된 가작이다.
▶염상섭 (廉想涉) 1897∼1963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橫步).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2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진학문(秦學文)의 추천으로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0년 7월 김억, 김찬영, 민태원,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하고, 김환의 「자연의 자각」의 평가에 관해 김동인과 논쟁을 벌였다. 이후 『동명』, 「시대일보」, 「매일신보」의 기자를 역임하고 「만선일보」주필 겸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1946년 「경향신문」주필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에 해군소령으로 참전했다. 1954년 서울시문화상, 1956년 제3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1957년 예술원 공로상, 1962년에는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예술원 창설과 함께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 3월 14일 사망했다.
이상화 「나의 침실로」
「나의 침실로」
▶이상화
1924
변영로 『조선의 마음』
『조선의 마음』
▶변영로
김소월 「산유화」
「산유화」
발표연대는 미상인 김소월의 대표시다. 전 4연으로 되어 있는데, 1연과 4연은 피다/지다의 대립만으로 아래와 같이 이루어져 있다. "산에는 꽃 피네(지네)/꽃이 피네(지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지네)". 이런 도입과 결구는 산과 꽃과 영원한 순환과 연관을 노래하는 시편인데, 시의 화자는 이런 자연의 섭리를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런 1,4연 속에 새와 자신의 처지가 비교된 2연과 3연이 놓여 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새는 귀의할 수 있는 산에 인간인 자신은 귀의할 수 없다는 뜻을 "저만치"라는 단어와 "호올로"라는 시어로서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이처럼 자연의 무한한 영속성과 그러한 자연의 질서 속에 편입되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운 자각이 전통적인 7.5조 운율에 실림으로써 고유의 애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소월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솜씨 있게 표현하고 있다.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1902년 8월 6일 평북 구성에서 부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스승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뛰어난 재질을 나타냈다. 중학교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1921년 서울 배재고보에 들어갔다. 1923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을 다니다가 9월에 귀국, 한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나도향 등과 사귀다가 귀향했다. 1924년 김동인이 주재하는 『영대』의 동인이 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6년부터 시작 활동을 중단하고 처가가 있는 구성군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경영하는 등 갖가지 사업을 벌이지만 모두 실패하고 가산만 탕진했다.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1932년 김억과 마지막 서신을 교환한 후 1934년 12월 24일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현진건 (玄鎭健) 1900∼1943
1925
KAPF 결성 (박영희·김기진·임화·이기영·최서해·조명희)
▶박영희 (朴英熙) 1901∼ ?
아명은 거복(巨福), 호는 회월(懷月) 또는 송은(松隱). 1901년 12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에 수료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1년 귀국하여 황석우와 함께 시동인지 『장미촌』을 발간하고, 이듬해 『백조』 동인이 되어 「미소의 허영시」, 「환영(幻影)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하며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곧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1923년에는 김기진, 연학년, 이상화 등과 더불어 파스큘라(PASKULA)를 결성하며 계급의식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24년 『개벽』의 문예부 책임자가 되어 신경향파 건설에 주력하였으며, 1925년 카프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부터 시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에 전념, 소설 「사냥개」, 「철야」, 「지옥순례」 등과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 등을 발표하였다. 1926년 말부터 1927년 초까지 김기진과 `내용·형식"논쟁을 벌인 후 카프의 제 1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여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개념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
1934년 경부터 카프문학에 회의를 느끼고 전향하였다. 이후 친일 활동을 벌임으로써 해방 후에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6.25때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기진 (金基鎭) 1903∼1985
호는 팔봉(八峰). 1903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배재고보를 마치고 일본 입교(立敎)대학 영문학학부에 유학하였으며, 재학 중 연극 단체 토월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문학론에 깊이 빠져들었다. 1923년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무산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이후 잡지와 신문에 무산문예이론을 소개하고 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24년 파스큘라를 조직하고, 1925년에는 카프(KAPF)를 조직하여 계급 문학운동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는데, 그로 인해 1931년과 1934년 일제의 카프탄압 때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였고, 1960년에는 경향신문 주필, 5·16군사혁명 이후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임 화 (林和) 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필명은 성아(星兒), 쌍수대인(雙樹台人). 1908년 10월 13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보성중학교를 중퇴하고 1926년부터 시, 수필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문학활동 초기에는 다다이즘에 경도했지만, 1927년 카프에 가입하면서 계급문학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9년 「네 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등 이른바 `단편서사시"를 발표하면서 일약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시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인 1931년 경부터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1932년부터 카프가 해산되는 1935년까지 카프의 서기장 직을 맡았다. 해방 직후 그는 계급문학론을 부정하고 반제 반봉건을 중요 이념으로 하는 민족문학론을 새롭게 제기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다. 좌익활동에 대한 탄압으로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에서 남로당의 문화활동을 주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 와서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그 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선동 !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기영 (李箕永)1895∼1984
호는 민촌(民村), 필명은 민촌생(民村生). 1896년 5월 6일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다. 1922년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했다. 1924년 7월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편지」가 3등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26년에는 『조선지광』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펼쳤다. 그는 대체로 농민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을 썼는데, 「홍수」와 「서화」는 작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1931년에는 카프 제 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으나, 1934년의 카프 제 2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한효, 윤기정, 송영, 한설야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가 1946년 월북하여 북한문단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북한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오랫 동안 역임하며 『두만강』등을 발표하다가 1988년 8월 9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서해 (崔曙海) 1901∼1932
본명은 학송(鶴松). 함북 성진에서 한방의의 아들로 출생. 성진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부친의 가출로 소년시절을 모친과 함께 궁핍하게 보내다 1917년 간도로 이주하여 유랑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 이듬해 홍수로 가산마저 잃게 되자 가족을 해산, 상경했다. 문학활동은 15세때 『학지광』에 투고한 산문시가 게재되었다고 전하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이 추천되면서부터이다. 이광수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에 들어가 3개월간 승려생활을 한 바 있으며,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탈출기」,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등의 대표작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신경향파의 대표작가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 이후 궁핍한 생활과 방탕으로 발병하여 1932년 3월 위문협착증으로 출혈이 심해져 같은 해 7월 6일 관훈동 삼호병원에서 사망했다.
▶조명희 (趙明熙) 1894∼1938
호는 포석(抱石), 필명은 목성(木星), 적로(笛蘆).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였다.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1914년 중퇴했다.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여 몇 달 동안의 구금 생활을 한 바 있으며, 그 해 겨울 일본에 건너가 토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유학 시절에는, 잠시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라는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김우진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는 한편, 1925년 8월 카프가 결성되자 그 창립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하여 원동(연해주) 지방의 조선인 교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소련작가동맹 창건시(1934)에는 그 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부터 하바로프스크 시에서 작가동맹 원동 지부에서 일했으며, 잡지 『노력자의 조국』 책임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7년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중앙 아시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으며, 일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1938년 4월 15일(혹은 1942년 2월 20일)에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 복권되었다.
전영택 「화수분」
「화수분」
1925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된 전영택의 단편소설. 일인칭 주인공인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화수분이라는 행랑아범의 가족비극을 차분한 필치로 그려내려간 전영택의 대표작이다. 나는 어느 첫 겨울 추운 밤 행랑아범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해 가을에 아범은 아내와 어린 계집애 둘을 데리고 행랑채에 들어와 있었다. 아홉 살 난 큰계집애는 도무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인데도 굶기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어멈이 어느 연줄로 강화로 보내버렸다는 말을 듣고 아비는 슬피 운다. 행랑아범 화수분은 원래 양평의 남부럽지 않은 농부의 아들로 잘 살았으나 가세가 기울어 집을 나왔고 형에게 얹혀 살면 살 만도 했으나 부끄럽다고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화수분은 형이 발을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추수하러 양평으로 간다. 어멈은 남편이 쌀말이라도 지고 올 것을 기다렸으나 추운 겨울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멈은 어린 것을 업고 길을 떠나는데, 마침 화수분도 어멈의 편지를 받고 서울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화수분이 어떤 높은 고개에 이르렀을 때 희끄무레한 물체를 발견하는데, 그것!
은 자신의 아내와 딸 옥분이었다. 어멈은 눈은 떴으나 말을 못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나무장수가 지나다가 그 고개에서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가운데 아직 막 자다 깬 어린애가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서 시체를 톡톡 치고 있는 발견하여 어린것만 소에 싣고 간다. 이렇듯 소재 자체가 당시의 신경향파 작가들이 즐겨 다루던 가난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어떤 사회적인 분노를 앞세우기보다는 인간의 원시적인 온정을 불러 일으키는 선에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인도주의의 한 반영이라 할 만하다.
▶전영택 (田榮澤) 1894∼1968
호는 추호(秋湖). 늘봄. 평양에서 출생. 부친이 설립한 진남포 보동학교를 거쳐 1910년 평양대성학교를 수료, 서울 관립의학교에 입학했다가 1912년 도일, 공경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와 고등학부를 거쳐 1918년 대학문학부를 졸업, 다시 동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 해에 김동인, 주요한 등의 제의로 최초의 동인지 『창조』의 창간동인이 되었다. 1919년 동경 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고 3월말에 귀국, 한때 진남포에 가서 삼승학교 교장을 지냈다. 1923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면서 작가생활과 기독교 교직자 생활을 병행, 1930년에 미국 태평양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흥사단에도 가입했고, 1935년에는 기독교잡지 『새사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민주당 문교부장, 문교부 편수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신학교,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1961년에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피선되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최서해 「탈출기」
「탈출기」
1925년 3월 『조선문단』에 발표된 최서해의 단편소설이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출세작으로, 화자인 자신이 가정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수신자인 김군에게 편지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가난에 시달리 못해 고국을 등지고 간도땅으로 살길을 찾아 나섰던 빈농이 차디찬 현실에 꿈이 좌절당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1920년대를 전후한 민족수난사의 한 단면을 박진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로서 최서해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신경향파의 각광을 받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5년전 나는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기름진 땅이 흔하다는 간도땅으로 간다. 그러나 빈 땅은 없었고 중국인에게 소작인 노릇을 하려 해도 빚 갚을 길이 막연한 현실이었다.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며칠씩 굶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임신한 아내가 거리에서 주운 귤껍질을 먹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더욱 열심히 살 결심을 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다. 갓난아이는 젖을 달라고 울고 겨울이 닥쳐온다. 그는 두부장사를 하려면 땔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나무를 하다가는 ?
娟呼??잡혀가서 매맞기가 다반사였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자신이 세상이나 어머니나 아내에 대하여 충실하게 살았지만 세상은 자신들을 모욕하고 학대만 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을 희생하면서 어떤 집단에 가담하게 된다. 이 과정이 회고체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 이 작품인데, 식민지 시대 우리 문학의 한 특성인 유민(流民)문학의 한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최서해 (崔曙海) 1901∼1932
본명은 학송(鶴松). 함북 성진에서 한방의의 아들로 출생. 성진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부친의 가출로 소년시절을 모친과 함께 궁핍하게 보내다 1917년 간도로 이주하여 유랑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 이듬해 홍수로 가산마저 잃게 되자 가족을 해산, 상경했다. 문학활동은 15세때 『학지광』에 투고한 산문시가 게재되었다고 전하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이 추천되면서부터이다. 이광수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에 들어가 3개월간 승려생활을 한 바 있으며,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탈출기」,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등의 대표작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신경향파의 대표작가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 이후 궁핍한 생활과 방탕으로 발병하여 1932년 3월 위문협착증으로 출혈이 심해져 같은 해 7월 6일 관훈동 삼호병원에서 사망했다.
김동환 『국경의 밤』
『국경의 밤』
1924년 3월 20일 반국판 124면으로 한성도서주식회에서 발행된 김동환의 서사시집이다. 김억의 서와 서시가 실려 있고, 표제작 「국경의 밤」이외에 「북청물장수」등 1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국경의 밤」은 밀수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슬픔을 빌어, 살벌한 두만강의겨울 밤을 배경으로 일제의 강압 밑에 눌린 민족적 비애를 표출시킨 서사시이다. 그 첫대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순사가/왔다-갔다-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물레 젖는 손도 맥이 풀려서/파하고 붙는 어유(魚油)등잔만 바라본다/". 이렇게 애태우는 아낙내의 심정이 서사적으로 묘사되는데, 장차 사건이 벌어지게 될 배경과 주요 인물을 소개하는 이런 수법은 소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뒤이어 아내의 시점으로 과거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일종의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김동환의 이 작품은 한국 서사시의 최초의 예이면서 서사시?
?가능성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문학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환 (金東煥) 1901∼?
호는 파인(巴人). 함북 경성(鏡城) 출생. 서울 중동중학을 거쳐 일본 동양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수료했다. 1924년 처녀시집 『국경의 밤』을 발간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된 대표작 「국경의 밤」은 최초로 서사시의 형식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되어 당시의 시단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첫 시집 발표 후 한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기자로 활약하다가 1929년부터 종합잡지 『삼천리문학』을 주재하면서 경영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경영난으로 폐간했으며, 해방 후 다시 잡지를 복간하였고 시론에 손을 댔다. 한국동란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김소월 『진달래꽃』
『진달래꽃』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1902년 8월 6일 평북 구성에서 부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스승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뛰어난 재질을 나타냈다. 중학교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1921년 서울 배재고보에 들어갔다. 1923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을 다니다가 9월에 귀국, 한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나도향 등과 사귀다가 귀향했다. 1924년 김동인이 주재하는 『영대』의 동인이 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6년부터 시작 활동을 중단하고 처가가 있는 구성군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경영하는 등 갖가지 사업을 벌이지만 모두 실패하고 가산만 탕진했다.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1932년 김억과 마지막 서신을 교환한 후 1934년 12월 24일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김동인 「감자」
『감자』
김동인(金東仁)의 소설집. 1935년 2월 2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되었다. 「감자」, 「태형 - 옥중기의 일절」, 「명화 리디아」, 「눈을 겨우 뜰 때」, 「어즈러움」, 「피고」, 「딸의 업을 이으려」, 「명문(明文)」 등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감자」는 1925년 1월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발표된 소설로서 한국의 초기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며, 「붉은 산」과 더불어 김동인의 소설 가운데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김동인은 1925년에 「소설작법」을 『조선문단』에 4회 연재하며 시점론을 발표한 바 있거니와, 「감자」는 그가 현대소설의 대표적 구성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객관적 일원론을 소설에 적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감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했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다. 그가 자기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자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 때문에 칠성문 밖 빈민굴에 쫓겨가 살면서 생활을 이을 수가 없어 송충이잡이 등 어려운 일을 하다가, 마침내 왕서방(중국 사람)네 채마 밭에 감자를 도둑질한 것이 들키!
어 몸을 팔게 된다. 그 뒤부터 왕서방은 수시로 복녀를 찾아왔다. 그러던 차, 왕서방이 어떤 처녀를 구해 장가를 들게 되는데, 이를 안 복녀는 질투심에 불타 칼을 품고 신혼의 방에 뛰어들었으나, 결국에는 왕서방의 손에 생명을 잃고 만다. 사흘 후, 복녀의 시체는 뇌일혈로 죽었다고 하여 남편의 손으로 공동 묘지에 묻혔다. 작가 자신은 「감자」에 대해 "무지의 비극"을 그린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감자」는 황폐화한 당대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환경에 의한 인간성의 파괴와 현대 사회의 배금 사상의 위력을 그림으로써 작가의 비관적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수록 작품 중 「태형」은 김동인 자신의 직접 체험을 소재로 쓴 소설로서, 1919년 3월 5일 모친의 전보를 받고 귀국한 김동인이 아우 동평의 부탁으로 써준 격문이 빌미가 되어 구속되었다가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이때의 옥중 체험을 소재로 쓴 것이다.
▶김동인 (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 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1923년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1920년대 중반 계급문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이에 반대하여 문학의 순수와 자율성을 강조하였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사소설의 창작에도 힘썼다. 1939년에는 박영희(朴英熙),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북지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1개월 동안 만주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두 번째의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속 망국인기」(1948) 등의 ?
步資?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나도향 「벙어리 삼룡」
『벙어리 삼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