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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옥윤의 딸 정아와 안리 1990년이었다 그 속에는 선생이 일본말로 직접 부르신 노래, <1990년>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패티 김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정아를 위해 오래 전에 만드신 작품이었다. 그러나 막상 1990년에 이르러 사랑하는 정아는 그분 곁에 없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 아픈 상처를 스스로 달래며 <1990년>을 노래하시는 선생의 모습이 뽀얀 안개처럼 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손주 같은 딸이다. 안리는 마치 인형처럼 귀여웠다. 선생은 안리를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인 듯 했다. 전체의 3분의 2쯤 차지하는 아빠(길옥윤 선생)의 전신을 그린 것이다. 선생은 언제나 누구에게 명함을 건네 줄 때면 그 그림을 설명하고 안리를 자랑하신다.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으신다. 밤 늦어야 돌아오셨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선생이 사시는 이케부쿠로(池袋)의 메트로 폴리탄 호텔에 묵으면서 아침 일찍 전화를 해야 했다. 의식하시는 모양이었다. 선생은 늘 일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계셨다. 선생 시대에는 작곡 하나만 가지고는 체면을 유지할 수 없었던 서울 생활이었다. 그래서 떠돌게 된 타국의 생활에서 외로움도 하나의 낭만으로 여기시며 색소폰을 연주하시던 선생은 예술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할머니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행사를 구상하시던 선생……. 그런 선생이 휠체어에 의지한 채 방송에 나타나신 것은 진정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런 모습이나마 오랜동안 지켜볼 수 없을 것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길옥윤 선생은 평생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한사람이었다. 물론 그의 운명적인 슬픔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길 선생은 네댓 살 무렵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큰어머니·큰아버지를 어머니·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아버지를 작은어머니·작은 아버지라 불러야 했다. 있었다. 안 가겠다고 울며불며 버티다가 결국 큰어머니 등에 업혔지만 몸을 거세게 젖히면서까지 저항했다고 한다. 그 순간 본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며 길 선생은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다섯 살 아이가 틈만 나면 본가로 도망을 치자 어른들은 아예 애가 오고 가기 힘든 먼 곳으로 이사해 작은 집과 왕래를 끊게 했다.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미명하에 정말이지 가혹한 일을 한 것이다. 술에 취하면 자꾸 울었던 길 선생의 설움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비로소 알게 됐다. 길 선생은 늘 자신을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철이 들고 사춘기를 겪으며 어느 쪽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것 같다. 자기를 버린 어머니이자 작은어머니가 밉고, 그렇게 싫다는데 굳이 데려간 큰어머니이자 어머니도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재즈가 좋기도 했지만 그가 20대 초반에 밀항을 하면서까지 일본행을 결심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술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뉴욕에 왔다며 연락했길래 오랜만에 딸과 데이트하라며 나는 정아를 예쁘게 차려 입혀서 내보낸 적이 있다. 정아 나이 만 여섯 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양육비도, 생일선물도 보낸 적이 없다. 나는 대학원생이 된 정아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며 아주 먼 미래에 하늘나라에서라도 정아를 만나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얼굴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자신의 혈육에게 그토록 냉정했던 길 선생은 그 사진을 보며 대성통곡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길 선생이 왜 정아와 인연을 끊고 지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아에게 미안할 뿐이다. 1990년 스물한 살이 됐던 내 사랑하는 딸 정아! 정아도 어느새 서른여덟 살이 됐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이제는 정아도 무정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패티김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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