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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家 日記
6월 14일(금)맑음
이 산사에 온 지도 벌써 두 달.
뜰 앞에 목련이 피었다. 백주의 이슬이 청엽(靑葉) 위에 대굴거리고, 무한의 순결을 자랑하는 하얀 꽃봉오리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피어오른다. 하늘빛 잎사귀, 눈빛 봉오리, 아름다운 조화 위에 자랑스러운 호화의 기세. 나는 아침 뜰 앞에 서서 그 꽃봉오리를 여러 번 만지다. 그리고 떠나기 어려운 듯이 그 꽃 밑에 한 시간이나 머뭇거리다. 세상에 아름다운 자랑이 여기보다 나을 것이 또 있을까? 신의 거룩한 표정! 모든 성스러운 최고의 미! 첫여름에 피는 목련은 이같이 아름답다. 로댕의 한 떨기 꽃 아래 머리를 숙여 본 적이 있는가 하던 말을 다시금 생각할 수가 있다.
낮에는 송림 속 검은 바위 위에서 녹구(綠鳩)의 울음을 들으며 먼 산을 바라보다. 송림 새에 있는 미풍은 서늘하고 신비롭다. 밤에는 촛불 밑에서 사진첩을 뒤적거리다. 동구 밑에서 산새 소리가 꿈 깊은 산곡을 이따금 깨우다.
예이츠 시집을 들고 속으로 몇 구절을 여러 번 되풀이하다.
6월 25일(화) 맑음
아침에 우는 산새는 매우 정답다. 내 창 밑에 밀어를 보내는 그 마음이여, 오늘의 행복을 약속함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산을 바라보니 북한산성에는 없는 엷은 안개가 그 산의 얼굴을 얄밉게 가리고, 산 밑 밤나무에는 이 산의 척후(斥候)인 까치가 산곡을 지키고 있다.
냇가에 내려가 손을 씻고, 가래나무 밑에서 수음(樹陰)의 향기를 마시다. 낮에는 침상에 누워 명상의 실마리를 몇 번이나 감고 풀고 하다.
C군이 왔다 가다.
밤에는 가는 비가 소녀의 눈물과 같이 부드럽게 내리다. 보슬보슬 마른 땅을 적시는 부드러운 촉수! 대지에 기름을 붓는 네 마음이여!
6월 27일(목)맑음
조반을 먹고 냇가 반석 위에 등의자를 놓은 후, 고요히 앉아 귀를 기울이다. 낙엽과 녹엽 사이에 일어나는 가느다란 파동! 비단 같이 매끈하고 보드라운 음향의 촉수. 아, 녹음의 서늘한 촉감은 녹는 내 마음의 창문을 드리다. 청록의 영원한 젊음! 녹향청훈(綠香靑薰)의 부드러운 촉수. 여름은 젊어지리라는 시즌! 아, 생의 한 시각인들 무색하게 지낼 것인가?
낮에는 더운 날을 부채로 보내다. 항상 누워 있어야 할 몸이니 평안은 하지마는 너무도 지루하지 않은가? 평안과 휴식도 도를 넘으면 고통이 된다. 아무리 건강자라도 종일 누워만 있으려면 괴로울 것이다.
저녁녘 해가 창 위 한 줌의 정열을 펼쳐놓고 사라지다. 서늘한 저녁, 밤에는 수분을 담은 서늘한 달빛! 산곡에 숨은 이 암자에는 은회색 안개가 보드라운 자욱으로 대지를 덮고, 그 위에는 영롱한 흰 달의 서늘한 조폭(照瀑)이 내리지 않는가? 뜰 앞 가래나무는 달빛에 젖어 은편(銀片)을 엮어 논 듯, 푸른 송엽도 銀針으로 변하고, 목련은 심궁의 공주같이 방긋이 입을 벌린다. 나무들이 속삭이는 보드라운 여름! 그리고 땅에 가로누운 검푸른 수음! 달의 촉수는 모든 것을 평화의 고대(高臺)로 낚아 올리다. 흰빛 모래땅을 밟으며 묵화 같은 수음을 손으로 만져보는 내 마음이여! 은빛 촉수가 외로운 내 마음의 실마리를 이렇게도 풀어놓는가?
달빛이 푹 젖은 떡갈나무잎 위에 저녁 이슬이 굴러 내리듯이 빛나고, 수음 속에는 이 절의 고양이가 누구를 기다리는 듯 조용히 쪼그리고 달빛을 본다. 북편 골짜기에서 쑥쑥새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다. 이 산곡은 은색의 장막을 펴고 누구의 임장(臨場)을 고대하는 듯 산곡의 밤은 이렇게도 고요한가?
7월 1일(월) 맑음
고요한 산곡도 속인의 자취도 어지러워진다. 이 절에는 재가 들어서 일찍이 보지 못하던 사람사태를 보게 되었다. 나는 이틀 동안 산당으로 자리를 옮기다. 전후좌우가 송림으로 둘리고, 멀리 남쪽을 향하여 고성(古城)이 구렁이같이 긴 몸뚱이를 산정에 걸치고 있다.
종일 산당 마루에 누워 하늘을 본다. 별나게도 높고 별나게도 넓은 것 같다. 새삼스럽게 몇 만 리가 되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프로터의 ‘하늘의 광장을 헤아리는 네 마음이여! 차라리 너는 한 덩이 구름으로 그 하늘에 사라져버려라.’하는 글귀를 생각해 보았다. 송림 사이에 산비둘기가 가끔 와서 뭐라고 부르고 간다. 노랗고 파란 산비둘기! 그의 지순한 마음과 부드러운 음향, 그의 부르는 소리, 언제나 ‘벗이여!’ 하고, 내 혼을 그의 왕좌 푸른 송림 새로 끌어내는 듯하다. 밤에 산당에서 혼자 자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송엽 위로 별들이 자지 말고 일어나라는 듯이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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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영[盧子泳](1901~1940) 시인·수필가. 황해남도 장연(長淵) 에서 출생. 호는 춘성(春城). 평양숭실중학교 졸업, 일본 니혼대학 문과 수료.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 입사. 그 뒤 기자생활도 하였으며 청조사(靑鳥社)를 경영.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같은해 11월에 <파몽(破夢)> <낙목(落木)> 등이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1924년에 첫 시집 『처녀의 화환』을, 1928년에 제 2 시집 『내 혼이 불탈 때』, 1938년에는 제 3 시집 『백공작(白孔雀)』을 간행. 그의 시는 신선한 감각이 돋보이는 낭만적 감상주의로 일관되고 있고 산문에서도 소녀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침. 저서로는 3권의 시집 외에 시극·감상문·기행문 등을 모은 『표박(漂泊)의 비탄(1925)』, 소설집 『무한애(無限愛)의 금상(金像, 1929)』, 『영원의 몽상』, 수필집 『인생안내(1938)』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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