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말라
얼마 전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톤이 높아졌다. 발단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전날 우리학교의 한 학생이 기초교과의 기본에 해당하는 것도 아직 못한다고 놀라며 선생님들이 더 이상 늦지 않게 기초교과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말이 당연한 듯 오가는 게 한편 불편했는데 그날 다시 나왔다. 한편 평가의 위험함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교사가 마침 한 김에 내가 다시 소위 기초교과에 대한 교사들의 강박관념을 지적하고 아이들이 내적 발달과 요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초교과에 대한 교사들의 강박도 일종의 평가 강박과 더불어 외부 교육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을 수학과 영어도 필요 없다는 말로 받아들인 한 교사는 사회인으로서 상식적으로 토론을 하고 생활하기 위해 기초교과를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삶의 필요에 의해 채워지는 다양한 상황에 바탕을 두고, 오히려 아이의 발달과 정체성, 그리고 자기 감각의 건강한 발달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나를 실망시켰던 내용은 내가 소위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왔으니 기초교과를 무시하는 소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말을 학생이 아닌 교사에게서 듣는다는 것에 나는 약간 화가 났다.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소위 사회적으로 통용되듯 계급적으로 갈라치기를 하는 인상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책임 있는 교사의 성찰과 사유가 이렇게 부족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대화는 일단락되었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하지 못한 말을 입 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생각난 말은 공자의 끊어버린 네 가지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네 가지를 끊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편견이고, 둘은 반드시라는 생각이고, 셋은 고집이고, 넷은 나다. 이 네 가지는 교사들에게 정말 자나깨나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열정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반드시를 주장하지 않는다. 주장은 하지만 상대와 조직이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면 만다. 그들의 방식과 경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선의가 있다면 인정하는 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틀렸다가 없다. 상황에 맞는 말과 행동, 그리고 바람이 있지만 아이의 상황이 그것을 받아들일 정도가 아니면 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가 자기에 충분히 집중하고 안심하고 소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내적으로 차오를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외부에서 자꾸 일을 벌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의 경험이 삶의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문화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제일 관심이고 내가 바라는 교육의 형태다. 프로그램이나 교과 같은 것이 종종 필요할지라도 그것은 선택적 대상이지 필수가 아니다. 최선은 개인의 의지 안에 있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 공자의 사절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을 위해 고른 <여자라는 문제>라는 책을 읽다가 마침 속 표지에 써진 영국 왕립 학술원의 ‘누구의 말도 그대로 취하지 말지어다’라는 문구를 만났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라틴어 ‘Nullius in verbra’이었다. 소위 근대 과학과 학문의 요람이었던 곳이니 절대적 진리조차 의심하라는 금언이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이 말을 학교에 적용할 수 있을까?
카톨릭 예배에는 성경 독서가 의식 안에 있다. 대표독서를 마치며 독서가가 ‘주님의 말씀입니다’로 마치면, 신자들이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응답한다. 절대적 진리를 믿는 신앙 안에서는 합당한 말이지만, 하나의 도그마에만 집착하지 않는 나 같은 입장에서는 맹목의 복종이 매주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비판적 입장이다. 왜 성경에 씌어진 말을 ‘주님의 말’이라고 강조하고, 그것을 신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하는가? 저마다 실존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해석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먼저 ‘예스’라고 언표하고 그것에 구속된다. 그래야 성경의 말을 진정 받아들이는 것인가? 관례니 의례니 하는 말로 무마하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 왕립학술원이 이런 말을 금언으로 내걸었던 것은 이런 전통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님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말과 행위들이 벌어졌지만 언제나 그것이 개개의 입장과 분리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예수조차 예수 고유의 인격성을 제외하고 주님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정도면 이토록 넘치는 정보와 선전과 선동 속에서 의심이야말로 이 시대의 미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의 니힐리즘보다 더 치열하게, 힌두교의 네티파처럼 일관되게 의심과 부정을 수행하며 진리의 우상을 깨나가야 한다. 하지만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우상타파의 망치를 들고 전통의 우상은 물론 스스로의 신념과 이상조차 허물 수 있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