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에 위세를 과시한 청국 경찰서
조선말의 청국(淸國)경찰서는 을지로 네거리의 롯데 쇼핑(전일 산업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는 앞쪽에 위치하였다. 이 당시 청국경찰서 청사는 높다란 망루를 세우고, 위세를 과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경찰서가 설치된 것은 1890년대 초에 화교(華僑)상인들에 대한 시민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있던 때였다.
당시는 원세개(袁世凱)의 세도가 장안을 뒤흔들던 때라 40명의 청나라 순사들 역시 기세가 대단했다. 이들은 긴 방망이를 옆에 차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거슬리는 한국인이 눈에 띄면 잡아다가 폭력을 행사했다. 만약 조선인 소유의 토지가옥을 청국인이 매수하려 할 때 조선인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청국의 총리아문이 직접 순경을 파견하여 조선인을 강제 퇴거(退去)시키는 폭력까지 예사로 일삼았다.
또한 청나라는 마포에 계사국(稽査局)이란 파출소를 두고, 도선장(渡船場)의 치안권을 쥐고 흔들기도 했다.
임오군란 후에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군을 따라 처음으로 서울에 들어온 화상(華商)들은 특유의 상술로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들은 원세개의 비호 아래 주로 포목상, 음식점, 잡화점, 여관 등을 경영하면서 폭리 · 사기 · 폭행 · 강제징수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조선인들의 감정을 격분시켰다.
1883년 때마침 발생한 이범진(李範晋) 사건은 시민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시켰다. 명동 2가의 중화회관 부지를 구입하던 화교들은 한가운데 땅의 소유자인 이범진이 팔기를 거부하고, 양쪽 땅 사이의 통로를 막아버리자 그를 납치, 뭇매를 가한 후 길을 트라고 강요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화교 점포의 화재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소공동 삼화흥호(三和興號)의 불로 점포 4동이 소실되고, 3명이 불에 타 숨지는가 하면, 서소문의 동흥호(同興號) · 덕흥호(德興號)에서도 큰 불이 나서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화재사건이 꼬리를 물자 원세개는 화교의 생명·자산을 자위한다는 구실 아래 서울시내에 산재해 있던 화상들을 남문(南門) 안(현재의 프라자호텔 주변)과 서소문동으로 모아 집단거주하게 하는 한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청국경찰서를 설치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자, 변장한 원세개는 밤에 인천항을 통해 도망하였다. 그러자 이제까지 기세등등하던 청국 경찰서가 문을 닫자, 순사들도 뿔뿔이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