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의선 숲길(새창 고갯길 구간) 걷기
◇ 용산성당 : 용산구 효창원로 15길 37(산천동 2-11)
- 70여 년 전, 삼호정 터에 세워진 성당으로 사제(司祭) 등의 70여 기의 유해가 안장된 성지
용산성당의 실제 이름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산성당이며, 1954년 12월 완공되어 7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1887년(고종 24)에 삼호정(三湖亭) 일대의 대지를 매입하여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고, 1890년에 삼호정 정자 안채에 삼호정 공소(公所 : 신자 수가 적어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당,)를 마련하였다. 1942년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부임하였다.
용산성당 건물은 대성전과 소성전, 그리고 각종 교리 터와 쉼터,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등 4명의 주교, 65위의 초기 사제(司祭)들과 무명 치명자 등 72 기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이 성당은 성직자 묘지가 산천동의 용산 정상에 있어서, 용산 일대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심적이고 우월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전국의 성직자-수도자들과 신자들이 찾아오는 준성지(準聖地)이다.
혜화동 본당(1927), 영등포 본당(1936)에 이어 서울에서 6번째 창설된 용산 본당의 부지는 1890년 교구 성직자 묘지가 설립되면서부터 가톨릭과 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이 일대는 인가가 별로 없는 후미진 산림지대인 것을, 1920년경에 옛 정자(삼호정)가 중림동 본당의 공소가 되면서 성당의 터전을 닦게 된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제가 용산성당 본당을 대공포 진지로 사용하면서, 용산성당은 언덕 아래에 있는 신학교 내의 예수 성심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시기가 있었다.
◇ 삼호정(三湖亭) 터 : 용산구 산천동 2-11(표석 : 산천동 부군당 밑)
- 조선 후기, 김금원 등의 여인들이 시(詩) 모임을 가졌던 정자 터
용산성당은 조선후기의 여인들이 자유롭게 시사(詩社, 시 모임)를 가졌던 삼호정(三湖亭) 터였다. 삼호정에는 19세기 초 의주 부윤 김덕희(金德熙)의 소실 김금원(金錦園) 등이 그의 남편 김덕희(金德熙)가 세운 삼호정에 모여 여인들끼리, 또는 시문을 즐기는 선비(홍한주 · 신위 · 서유영 등)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조선시대에는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이옥봉 등은 불행한 일생을 보냈으나 반면에 자유롭게 시사(詩社, 시모임)에 모여 자유롭게 웃고 즐기다 간 여인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삼호정에서 모였던 '삼호정 시사(三湖亭詩社)'를 들 수 있는데, 주요 구성원은 김금원(金錦園=김금앵), 김운초(金雲楚=김부용), 김경산(金瓊山), 박죽서(朴竹西), 김경춘(金瓊春), 금홍(錦紅), 죽향(竹香) 등이다.
그녀들은 모두 시와 술을 한 가락씩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신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원 : 병부시랑 김덕희의 소실
운초 : 연천 김이양의 소실(기녀 때 만난 친구)
경산 : 화사 이정신의 소실 (이웃사촌)
죽서 : 송호 서기보의 소실 (고향 친구)
경춘 : 주천 홍태수의 소실 (금원의 동생)
김금원은 1817년에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나 영리했고, 특히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리고 자유분방하여 14살에 부모의 허락을 받아내 남장(男裝)을 하고, 여행길을 떠나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였다. 김금원은 특히 시문(詩文)에 재주를 보여 시를 읊으면 훨훨 날았다. 그는 자유로움을 택해 원주 기생이 되었다가(그녀의 어미도 기생이었다) 이후 의주 부윤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금원은 남편을 졸라 여행을 즐겨 그가 쓴 팔도여행기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남자도 못 해낸 걸 자신이 해냈다는 자긍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살롱 문화를 연 그야말로 신여성으로, 훗날 헌종 임금으로부터 세상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하여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 새창고개[新倉峴] : 용산구 효창동~마포구 도화동
- 조선시대 대동미(大同米)를 저장한 선혜청의 별창인 만리창이 위치한 고개
새창고개는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조선시대에 이 고개 부근의 효창동 213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공물(貢物: 왕실과 중앙에 바치는 물품)로 거두어들인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宣惠廳)의 별창(別倉)인 만리창(萬里倉)을 새로 지었던 데서 새창고개, 사창고개, 신창고개라고도 칭했는데, 인근 마을을 ’새창마을‘이라고 하였다.
선혜청은 임진왜란 후인 1608년(선조 41)에 설립되었으며, 1753년(영조 29)에는 균역청(均役廳)까지 병합하였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선혜청의 별창인 만리창은 처음에는 흉년 때 백성들을 구제하는 진휼청(賑恤廳)에 속하였다가 조선 후기 순조 때는 황해도와 전라도의 대동미(大同米)를 저장하였다.
대동미(大同米)를 보관한 이곳 만리창의 규모를 살펴보면 진휼청(賑恤廳)에 소속된 창고는 35문(門), 황해도 소속 3문, 전라도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
새창고개에 만리창을 둔 것은 마포나루가 가까우므로 대동미를 집결해서 보관할 수 있어서 홍수 때 마포 항의 수해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만리창 인근은 경복궁과 가까운 관계로 1894년에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입성한 일본군은 동학 농민전쟁 진압을 명목으로 이곳에 혼성(混成)부대를 주둔하고, 임시사령부를 설치하여 청일전쟁 수행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2005년에 서울시는 6호선 효창공원역에서 공덕역까지 연결되던 경의선 폐철길을 ’경의선숲길‘로 조성하면서 ’새창 고갯길‘로 명명했다. 여기서 ’경의선숲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구 연남동~용산구 효창동까지 이어진 6.3km 길이의 공원은 ’경의선숲길‘이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경의선숲길은 옛 경의선 폐철길까지 더해진 풍경으로 아날로그적 감성이 넘치는 길이다.
경의선숲길은 2005년까지 지상에서 운행되던 용산구 문화센터에서 가좌역까지 6.3km 구간이 지하화되면서 산책과 휴식, 볼거리가 있는 시민의 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경의선숲길은 총구간 6.3km 중 5.12km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나머지 공간은 도로, 건물, 기차 역사 및 광장 등이 가로막고 있어 아쉽게도 하나의 긴 숲길이 아니라 6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진 숲길을 걷게 된다.
구간마다 새창 고갯길, 땡땡거리, 경의선 책거리 등 다양한 주제로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지루할 틈이 없다. 나무와 숲, 꽃, 책이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 경의선숲길을 가족과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
*자료 : <내 손안에 서울> 5월 걷기 딱 좋은 이곳! 경의선숲길
◇ 선통물천(善通物川) : 마포구 아현동 마포 래미안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내
- 일본 강점기에 아현동 일대의 빗물을 마포를 통해 한강으로 흘러나가게 한 1km의 인공 하수 터널
서울의 선통물천(先通物川)은 길이가 약 1km에 달하는 일제강점기에 시설한 터널로, 목적은 통수(通水)였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토목사업지』(1928)에 ‘선통물천은 1923년부터 5개년 계획사업으로 시행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통물천은 아현동 일대 고지의 빗물을 아현동과 공덕동을 지나 마포를 통해 한강으로 흘러들던 하수 터널이다. 일제강점기에 장마 때 공덕동과 마포 저지대로 집수(集水)되어 범람하지 않도록 마포경찰서 후방의 쌍용산 밑에 1Km가량을 뚫어 인공 하수 터널에 의해 물줄기를 염리동, 동막하동(東幕下洞)으로 유도하여 직접 한강으로 방류(放流)하였다.
이 하수 터널은 폭이 4~10m, 길이가 1,500m로 도로 포장률이 낮았던 때에 시공된 것으로 광복 후 1965년에 준설(浚渫)하였는데 주기적인 준설이 필요하였다.
이에 봉원천 하류에는 ’선통물천장(先通物川場)‘이 섰다. 그 당시 한강을 따라 마포에 상품이 많이 들어오면 작은 배로 옮겨 이곳에서 먼저 풀었기 때문에 ’물건이 먼저 유통되는 하천의 시장’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선통물천은 광복 후 1960년대부터 덮기 시작하여 1993년에 완전히 지하로 묻혔다. 언제부터인가 선통물천 터널 입구에 ‘먼저 선(先)자’를 ‘착할 선(善)자’로 바꾸어 선통물천(善通物川)이라고 표시하였는데, 이는 ‘냇물처럼 원활하게 잘 소통하라’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현재 마포구 아현동 마포래미안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내에 「선통물천(善通物川)」(미래유산 제 2013-157호)이라는 가로 200.6cm×가로 71cm 표지판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