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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4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말씀 : 누가복음11:37-12:12
요절 : 누가복음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남의 구원을 논하고 가르치며 장작 자기 문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비참한 운명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책망 받았습니다. 위선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여 생명력 있고 복음적인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화 있을진저(11:37-54)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청하였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식사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정결”은 위생 이상이었습니다. 생활 속의 정결의 예는 종교 행위였으며 양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가늠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모세5경에 기록되어 있는 정결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율법의 각 조항들에 더 하여 규례와 유전을 만들어 실행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으면 사람도 더러워져 형벌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손 씻지 않고 식사를 하면 더러운 마귀가 손에서 음식으로 옮겨가고 그 음식이 배로 들어가 사람을 부정하게 하여 지옥에 떨어지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었습니다. 나갔다 들어오면 손을 씻었고 부담스러운 물건을 만졌어도 손을 씻었습니다. 손 씻고 식사 했다가도 도중에 다른 음식으로 바꾸어 먹으면 얼른 가서 손 씻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행위와 내면을 다 보셨습니다. 시대의 목자들인 이 사람들의 형식적인 종교생활, 위선으로부터 깨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외적 행위에 철저했습니다. 율법과 전통과 규례의 사소한 규정들까지 빠짐없이 지키고자 애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내면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지 집중할 뿐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는 소홀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내면은 성결과 사랑 대신 탐욕과 악독이 가득 자리 잡았습니다. 대표에게 실수한 것은 얼른 사과하지만, 양에게 실수한 것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멀리에서 오는 손님 앞에서는 깍듯하게 예의바르지만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는 방만하게 행동하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영향력 있어 보이는 사람 자식들이 우수하면 인정해주었지만,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 자식이 우수하면 ‘왜 공부 잘해?’ 폄하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가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였으나,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오만하였습니다. 특히, 어린 양들을 자기 영광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자기 업적과 자기 위대성을 입증해 줄 도구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살았으므로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평생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 하나를 귀하게 여기고 끝까지 사랑할 때, 하늘로부터 얼마나 큰 복을 내리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높여주시고 위대하게 하시는지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열정적으로 행하는 행위와 업적을 뿌듯하게 여기고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노력을 계속 더한다면, 그리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나간다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큰 상급을 받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사람들에게 내놓을 그릇은 박박 문질러 광을 내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여기는 속의 욕심은 털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잔은 반짝반짝 닦아 놓으면서,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하는 숨은 소원은 건드리지 않고 보존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고 계시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우리의 영, 마음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겉과 속을 다 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삶은 하나님을 겉만 보시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지적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위선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까지 말씀하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바리새인들은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는 것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일 기도 2시간 이상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면 자신이 거룩해 지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일 개인기도, 매주 개인금식, 매시간 주렁주렁 성경 문구를 몸의 이곳저곳에 매달아 놓으면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 확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 나눠주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바리새인들의 모든 것이 깨끗하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하고 고민 많은 양과 대화 한 번 하지 않으면서 매일 10시간을 기도하는 것과 어린 양을 귀하게 여기며 대화 하여 깊이 이해하며 도움 주고 돌아와 30분 가슴 아파 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것, 어느 것이 낫다고 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그들이 드리는 그동안의 열정과 행함도 모두 깨끗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루 세 끼 먹는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세 끼 식사하는 것은 20세에 들어와서 정착된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 로마인들은 하루 네 끼 먹었습니다. 정복지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물산이 많아 먹고 또 먹었습니다. 반면, 정복지 백성들은 굶었습니다. NIV성경은 41절 말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굶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우리 시대 구제는 잘 듣는 것입니다. 가르치려고 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리더이니, 어리석은 너희를 가르쳐 주겠다’는 계몽군주형 목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는 목자를 사랑합니다. 양들은 누가 오든지 귀하게 여겨주는 공평한 목자를 신뢰합니다. 양들은 ‘네놈 하는 말을 내가 들어봐 주겠다’는 마음의 고자세를 기가 막히게 알아봅니다. 양들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목자, 혼자 여러 말 하는 목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관계 끊을까 궁리 합니다. 의대, 치대 학생은 반가워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온순한 학생에게 잘해주는 그 공평하지 않음에 대해서 양들은 신뢰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65일 일용할양식 메모한 것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365일 말씀을 잘 보고 그 힘으로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할 때 365일 양식메모 한 것도 함께 위대한 열정과 업적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관심사에 철저하고 하나님의 관심사에 무지하였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자기 뜰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는 박하와 야생에서 얻는 운향 모든 채소들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본인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금식도 율법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의무로 규정했지만, 이들은 매주 월요일 목요일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규정 이상 십일조 생활과 율법 준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열정과 충성의 대단한 결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율법 준수를 택하고 자기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율법을 치열하게 지킨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들의 율법 준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과 관련 없었습니다. 근거가 바로 공의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호의적이고 자기들 명예를 높여주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지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기시는지에 무지한 채 자기 좋아서 하는 집착을 하나님 향한 사랑으로 위장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자기도 자신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모든 관심과 열정에는 하나님 향한 사랑을 담아야 비로소 빛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열정은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신앙생활의 보상을 이 땅에서 받고자 하였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치열한 율법 준수와 열정을 땅에서 보상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열정적인 행위와 업적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회당에서 당연히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여겼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오가는 시장에 나가면 많은 존경과 인사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상급,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보상 받기를 바랐고 사람들에게서 상 받는 것을 좋아 하였습니다.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고 무수하게 말하면서 실제 행동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의 보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똑똑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리석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 삶이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늘 웃는 얼굴이요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며 여러 타이틀과 업적이 있지만 그 속은 죽어 부패해가는 시체의 썩은 살과 그것을 파먹고 있는 꿈틀꿈틀 구더기와 악취가 가득한 무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시고 강하게 책망하시자 이를 듣고 마음이 찔리는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율법사들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 이니이다”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부터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쁜 결과가 명백하게 나왔을 때 뒤늦게 후회는 할지언정, 잠잠히 먼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의 문제를 어떻게 지적하십니까?
첫째,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사들은 백성들이 율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영접하도록 돕는 일을 하도록 세움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사들은 율법 외의 세부 실천조항을 자꾸 개발해 냈습니다. 성경과 구약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새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말씀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자기는 볼 수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백성들의 짐이 커졌습니다. 이 성경선생들로 인하여 어린 양들은 갈수록 자유를 상실하고 신앙생활이 갈수록 무거워져야 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창작과 개발보다 더 무거운 죄가 있습니다. 정작 본인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메시지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본인 메시지에는 오자, 탈자, 문법오류, 예화 오류가 수두룩하였습니다. 다른 사람 허물은 10년 20년 30년 계속 이야기하면서 자기 정욕문제, 돈 문제, 말 바꾸는 문제, 막말, 무례, 분노, 혈기, 폭력, 시기, 질투, 오만에 대해서는 망각하였습니다.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관대하게 넘어갔습니다.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다도” 본인이 하나님 앞에 허물이 있으면 잠자코 있을 법도 한데, 양심이 마비된 것인지 분별이 없는 것인지 남의 문제에는 무한 치트키 써가며 열 내는 사람들이 율법사들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들을 억누르고 핍박하였습니다. 47-51절을 보십시오. 율법사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관리하며 그들의 믿음과 희생을 기리는 척 하였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하며 공격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남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가 ‘선지자 높임 코스프레’ 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어떻게 했다더라. 정주영 회장이 어떻게 했다더라. 때 마다 이곳저곳 영웅 스토리를 주워 모아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 개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센터 목자님이 이런 훌륭한 일을 했다더라. 미담과 소영웅 성공 스토리를 사람들 앞에 반복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쾌감을 줍니다. 첫째는 듣는 사람들을 기죽이는 좋은 수단입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못하지?’ ‘너희들은 그렇게 못 살았지?’, ‘너희들은 절대 못 따라가지?’ 압박할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압박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 짜릿짜릿 합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 판단하며 영웅 스토리를 소개하자면 자기가 돋보이는 우월감을 느낍니다. 시대의 영웅들 이야기는 꺼내기 전에 자제하여야 하고 생각을 충분히 하여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 들면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들어야 하는데...’여기는 것 자체가 귀한 동역자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동역자들을 섣부르게 함부로 압박을 가하다가는 사람을 잃습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율법사들처럼 옛 선지자들 스토리를 반복 칭송하고 그들의 무덤을 가꾸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억누르는 짓을 우리는 따라하지도 반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창세 이후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인의 시기심으로 인하여 들에서 죽은 아벨의 피로 시작하여 역대하에 기록되어 있는 사라랴-백성의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다가 회개하기 싫어하는 자들에게 돌에 맞아 성전에서 숨을 거둔 사가랴-의 피까지 모든 죄의 대가가 이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AD 67년부터 시작되는 유대전쟁에서 대학살로 성취 됩니다.
셋째, 자신들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양들도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성경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율법사들은 천국의 열쇠를 맡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욕심을 위한 수단, 자기주장, 논리를 위해 인용해서 써먹는 수단으로 성경말씀을 전락시켰습니다. 백성들은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으나 그릇되게 가르치는 자들로 인하여 함께 망해야 했습니다. 율법사들의 이 문제에 대하여 엄중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53,54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런 지적을 받고도 회개하기는커녕 자신을 속이고 양심을 속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목자였기에 더욱 예수님께서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인 이들이 다시 깨어나고 회개하여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기에 강하게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책망 받는 것이 기뿐 나빴습니다. 이들은 여러 백성들 앞에서 비난당했다는 감정과 미움에 사로잡혀 회개할 기회를 차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1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수 만 명의 무리가 모였습니다. 한 장소에 수만 명이라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눈앞에 수많은 무리가 모인 것보다도 이스라엘의 목자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몰려드는 것도 그만큼 그 시대의 목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 키우고 있는 12제자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외식”하는 문제였습니다. 겉만 거룩한 척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악영향이 제자들에게도 쉽게 파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 되어서 나쁜 것, 죄악된 것 특히 인본적인 것은 빨리 배우고 신속하게 영향 받습니다. 제자들도 그 영향 받기 쉬웠습니다. 제자의 부르심을 벼슬하는 것처럼 여기기 쉬웠고, 사람들 앞에서 믿음 없어도 있는 척, 능력 없어도 유능한 척하기 쉬웠습니다. 섬김의 종이 되기보다 가르치고 방향주고 항상 뭔가 바로잡아 주는 데에만 열심 내는 일방적인 교사들이 되기 쉬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루고 새로운 목자로 기대를 안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각별한 당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악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구체적인 교훈을 주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하여야 바리새인들과 같은 실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며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속인다 한들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숨은 죄악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모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위선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체포당하고 매 맞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사람이 두렵습니다. 인사권을 가진 상관, 수사권을 가진 경찰, 기소권을 가진 검사, 형량을 판결하는 판사, 과태료 매길 수 있는 시청 직원, 징벌적 세금 징수할 수 있는 세무직원, 무지막지 폭력 가능한 권투, 격투기, 무술 고단자, 총 폭탄을 가진 군대, 우리 눈에는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실생활에서 만나고 겪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복을 줄 것 같고 사람이 행복을 박탈할 것 같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며 사람을 두려워하면 시험에 들기 마련입니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에게 강하게 파고들어 갑니다. 더욱 사람의 종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경외할 때 사람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를 주게 되어 있는 참새가 덤으로 끼워 다섯 마리가 팔려가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매일매일 방바닥에 수없이 빠져 흩어지는 그 머리카락들을 뺀 나머지와 새로 자라나는 머리카락의 총합이 몇 가닥이나 되는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하여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우리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죄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람의 평가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한한 자유와 위대한 용기와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영벌을 받을까 경계하고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영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영벌은 일시적지 않으며, 한 번 정해지고 나면 고통을 피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영벌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람에게 상 받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삶을 멈출 수 있습니다.
셋째, 항상 예수님을 시인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되 어디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그 목숨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주신 분이신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만유의 주님이신 것을 믿고 이를 증거 할 때 빛의 사도로 인정받게 됩니다.
넷째, 성령을 높이고 적극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제자들을 끌고 갈 때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할지 무엇으로 말할지 가르치시는 분이 오십니다. 이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영이신 하나님으로써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믿은 자에게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은 자에게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을 높이고 성령을 의지해 나갈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명역사를 훼방하는 자이므로 사함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철저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오래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 2000명 넘는 선교사님들 앞에서 기조연설(Keynote speech) 하였습니다. 이 날 저의 Keynote speech를 들은 교계 유명한 목사님이 한국을 대표하는 큰 교회 목사님에게 소개하여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 교회 교역자들 130명에게 다시 특강 해주었습니다. 대학총장들이 받는 최고 특강료를 받았습니다. 저의 특강을 들은 목사님은 저를 통하여 큰 도전을 받았다며 주일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제 나의 때가 온 것입니까? 이제 드디어 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낼 때가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사람으로 이름 내고 고액 강연료를 받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임을 영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저를 ‘시골 목자’로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시골 목자로 돌아와 한 영혼을 오래 살피고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귀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수록 또 더 크고 좋은 복을 주십니다. 살아있는 말씀으로 메시지 전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에서도 열 사람의 새로운 양들이 말씀공부 하게 하셨습니다. 버리고 낮아질수록 하나님께서는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더 영향력을 갖게 하시고 더 큰 명예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양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가장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이름을 높이고자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주와 복음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투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내적 투쟁하는 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바라며 사람들 앞에서는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슬기로운 인격을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복을 얻기 원하는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복, 신령한 복, 영적인 복, 실제적인 복, 생각하지 못한 복들을 가득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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