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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내 나이쯤 되면 제목과 같은 이런 말이 실감 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책 표지에 ‘현명하고 우아하게 인생 후반을 위한 8가지 지적(知的)대화’라고 하고, 원제목은 ‘Aging Thoughifully(신중하게 나이 듦)’으로, 저자는 미국 시카고 대학 로스쿨 교수와 학장을 지낸 이들로 세계 100대 지성에 뽑히기도 한 석학들로서 책의 차원이 특별할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다만 쉽게 읽힐지는 모르겠으나 일반독자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어가 본다.
‘8가지 지적 대화’란‘1) 나이듦과 우정 2) 나이 들어가는 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3) 지난날을 돌아보며 4) 리어왕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5) 적절한 은퇴 시기를 생각한다 6) 중년 이후의 사랑 7) 노년의 빈곤과 불평등에 관하여 8) 무엇을 남길 것인가’등으로 노년에 필요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 있는 핵심과 요점을 여기에 다 옮겨 적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제목과 상관없이 우리 나이에 기억해야 하거나, 실천할 수 있거나 혹은 남은 인생에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가려서 담아 보려고 한다.
“사람이 나이 들면 많은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권태, 쓰라린 실망과 불안감 같은 것들 말이지요. 유아독존적 접근은 현실적인 효능은 있겠지만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워낙 침착해서 정신적·육체적인 운동을 꾸준히 하고, 정원을 가꾸고, 만찬장에서 미리 준비된 토론을 즐기고, 죽음 앞에서도 스토아적 평정을 유지하면서 무난하게 나이를 먹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 드는 게 좋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노년기를 진짜 연회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우정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우정의 경험’이란 뒷담화, 추측을 통한 이해, 내밀한 농담,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기술을 가리키지요.
카토*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노년기가 인생의 다른 시기보다 우월하다고 말했습니다. 노년기에는 대화의 질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나 카토는 그 말을 몸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여준 건 선생*의 편지였어요. 나이 듦에는 필연적으로 불행이 따라옵니다. 하지만, 유머, 이해, 사랑은 필연적으로 따라오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제공하는 건 우정이죠”
* 카토 : 키케로의 저서〈노년에 대하여〉에서의 화자, 83세 카토는 젊은이들에게 노년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 해 준다. *선생은 키케로를 말함
※ 나이 듦에는 필연적으로 불행이 따라온다. 하지만 유머, 이해, 사랑은 필연적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제공하는 건 우정이다.
〈책 서문과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나이듦과 우정」‘나이듦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키케로와의 가상토론’중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느 85세의 사업가가 규모 있는 회사를 경영하고 우리에게 지혜를 나눠주고 젊은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축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그 사업가가 집으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우리는 금방 입장을 바꿔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이 자동차 열쇠를 빼앗았어야 한다고 말해 버린다. (…)운이 좋거나 현명하다면 우리는 노년기에 우정의 순수한 재미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은 새로운 탐험을 떠나는 일과 같다. 만약 내가 은퇴를 한다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래된 친구들,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에 투자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여전히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징표가 된다. 친구들은 조언을 해 주기도 하고 다른 면에서 유익한 도움을 주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삶이라는 모험을 공유하고 함께 즐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솔 레브모어 교수의 「나이듬과 우정」‘친구, 삶이라는 모험의 동반자’중에서〉
〈나이 들어가는 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주름살이 매력적일 수 있을까?’하고 물으면, 솔 레브모어 교수는 “아기는 사랑스럽고 10대나 20대 젊은이들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면 얼굴에 주름살이 있고 머리가 벗겨지는 등 노화의 징후가 엿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껴야 하는 걸까. 주름살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지혜와 유머와 사교성의 증거로 받아질 수는 없을까. 어떤 사회는 노인을 숭상하기도 하지만, 미국(한국)사회는 젊음에 대한 선호가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젊은 시절의 외모를 보존하기 위해 신체에 개입한다. 우리에게는 신체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수술이나 시술에 반대하는 법적, 사회적 전통이 있다. 우리가 신체에 대한 개선과 훼손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노년기에도 우리의 몸과 우리 자신을 개선할 수 있을까?”하고 되묻는다.
“현재(2018년) 미국인들은 해마다 성형수술에 130억 달러 정도를 쓴다. 눈수술, 문신, 성형목적의 치과 수술, 모발이식을 계산에 넣으면 액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한국인들이 성형수술을 받는 비율은 미국인들의 4배에 달한다. 한국인은 서양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열성적으로 쌍꺼풀 수술을 한다. 그것을 보는 서양인인 나에게는 그 목표가 조금은 불편해 보인다. 대개의 경우 누가 우리를 모방하려고 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감수성으로 보면 과거에 차별을 당했던 민족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종과 혈통에 근거한 서양인들의 차별은 다 지난 일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서양인 같은 외모를 얻으려고 애쓴다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괴롭다. 만약 한국인들이 그들만의 ‘아시아적’특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확대하기 위해 수술을 한다면 전혀 불편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희망보다 추억으로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생이 과거보다 짧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망은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이 많다. 그들은 과거를 추억하기를 즐기고 항상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크라테스《수사학》1.12. 노인의 성격에 대하여 -”
〈솔 레브모어 교수의 「나이 들어가는 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주름살이 매력적일 수 있을까?’중에서〉
나도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있듯이,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과거에 대해 특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은 적고 지나온 날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계획을 세우는 일. 희망을 품는 일, 심지어는 뭔가를 두려워하는 일도 과거보다 덜 생산적이라고 느낀다. 자녀와 손자녀, 자신이 사랑하는 다른 젊은 사람을 위해 희망을 품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쓰고, 후회, 죄책감, 과거에 대한 만족감과 그리고 당연하게도 과거에 대한 분노 같은 회고적 감정에도 많은 시간을 투입한다.
이런 회고적 감정은 정말로 필요한가? 과거는 바꿀 수 없는 노릇인데 기억 속의 길을 되밟아 가는 과정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과거를 회고하는 일에 시간을 쓸지 말지는 순전히 선택에 달려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선택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이 스스로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연구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반면에 현대 사회는 과거라는 감정을 분류하는데 무척 의미 있는 범주로 여긴다. 과거와 연결된 감정들이 사람의 현재와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것을 거울삼아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를 잊고 미래지향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과거를 향하는 여러 가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은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저자 중 한 명인 마사 누스바움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과거에 매달린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거기에는 많은 문제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연극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찬사도 많이 받았지만, 찬사에 버금갈 만큼이나 관람하기가 괴로운 작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두 아들로 이루어진 네 명의 등장인물과 네 시간을 보내는 동안 관객은 점점 숨이 막히고 무기력한 느낌에 휩싸인다. 관객은 무대로 뛰어올라 등장인물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들이 과거라는 패턴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현재의 과제를 직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진 오닐: 미국 극작가,《밤으로의 긴 여로》는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필 자체는 1941년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진 오닐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956년에 처음 공개되었고 195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 콩가루 집안의 가족들이 벌이는 드라마로 테네시 윌리엄스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아서 밀러의《세일즈맨의 죽음》등과 더불어 20세기 미국 희곡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1912년 8월의 어느 날, 코네티컷의 한 별장에서 벌어지는 아침부터 자정까지의 하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약물 중독으로 시작된 한 가족의 불안, 가족 사이의 비난과 후회, 부정으로 점철된 갈등 속에서 화해를 향한 진실된 노력과 시도를 모두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도 극중에서 처럼 촉망받는 배우였으나, 돈에 집착 해 연극에만 너무 몰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목표 아래서 우리는 인생을 거꾸로 살아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어떤 목표’란 ‘자기 이해하기, 자기 변화시키기, 현재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와 같은 회고적 과업을 수행할 때는 두 가지 위험을 경계해야 하는데, 하나가 과거 지상주의라면, 다른 하나는 현재 지상주의다. 그리고 미학적 입장에서 혼란스러운 것과 불규칙한 것을 거부하는 유미주의(唯美主義-탐미주의)적인 인간혐오, 삶에 대한 증오, 자아에 대한 증오도 마땅히 피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행동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은 현재의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한 과정인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과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중에서〉
과거를 바라보며 사는 태도는 비관주의자,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소설가, 심리치료사, 유치원 교사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우울한 기운보다는 밝은 기운을 주변에 전파할 때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밝은 태도로 다가가면 사람들이 더 친절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기운을 내세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는 더물다. 사별 당한 사람에게 “당신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 슬픔을 자연스럽게 분출하세요. 그런 다음 당신의 인생을 사세요”이런 이야기가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
우리가 후회를 통해 뭔가를 배운다면, 후회의 감정을 내보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다면, 후회는 가치 있을 것이다. 후회는 미래지향적이고 낙관적인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좋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애초부터 조언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무기력 상태를 훌륭하게 분석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걸 주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은 회고적 성찰 능력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원래부터 우울하다면 그들 중 소수만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길을 뚫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에 했어야 하는 일 속에서 방황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거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제지하는 일도 좋은 일이다. 사람들에게 낙관적인 자세로 앞날을 생각하라고 충고하는 것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익한 일이다.
〈솔 레브모어 교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후회 대신 만족하는 삶’중에서〉
어떤 사람은 90세가 넘어서도 건강하게 사는 반면, 어떤 사람은 훨씬 일찍부터 치명적인 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100세가 넘게 살면서도 치매를 경험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은 50대부터 벌써 치매를 경험한다. 치매의 유형도 다양해서 지적인 작업은 할 수 있지만, 아는 길을 찾지 못한다거나 인지능력이 감퇴하기도 한다. 연극 《리어왕》처럼 성격유형에 따라 나이 듦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원래 서글픈 일’이라고 말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모욕하는, 지금까지의 슬픈 철학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여 부디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경험은 당신의 경험일 뿐이오. 그러니 계속해서 배우시오. 당신 자신과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시오. 사람들에게 삶은 어떻게 경험해야 한다고 설교하기 전에 그들이 경험하는 삶에 대해 물어보시오. 당신의 삶과 똑같지 않은 삶들에서 의미를 발견할 준비를 하시오. 다양성을 존중하시오”라고.
‘리어’는 누군가에게 물려줄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배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리어왕의 딸들 중 한 명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나머지 두 명은 권력을 갈망하는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리어가 딸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 보라는 과제를 내고 그 대답에 따라 상속을 결정하자 온 집안은 뒤집히고 말았다. 오늘날은 리어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산은 자녀에게 균등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리어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리어의 허영심, 자기에 대한 몰이해, 가족 간의 애정, 그리고 은퇴 후의 미래에도 초점을 맞췄지만, 이 문제는 지금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리어왕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통제권을 상실할 준비’중에서〉
유산의 정리, 유산의 분배, 유산의 상속 등 한 인생이 살다 갈 쯤에는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아무 유산이 없다면 신경 쓸 일이 없을지 모르겠다. 뭔가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냉혹하게 이성적인 분석으로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잡음 없이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자녀들을 믿으면 될까? 아닐 것이다.
자녀들의 노력과 애정을 평가하고 유도하기 위해 재산 분배를 유예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다. 하지만 리어처럼 자식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기 위해 전 재산을 미리 증여하는 일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재산의 이용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재산을 나중까지 가지고 있을 계획이다. 그러나 돌봄이 필요해지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돌봄의 비용을 지불 할 것이다. 과연 누가 나를 돌볼 것이지, 만약 돌봄과 방문에 보상이 따르기는커녕 경제적인 부담만 지게 된다면 나의 구닥다리 농담에 누가 웃어줄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리어가 자신의 백성을 생각하지 않은 잘못을 범했듯이 우리는 노년의 계획을 세울 때 빈틈이 없어야 하겠지만, 나눔의 의미도 고려해 봄직하다. 평균적 부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사망할 날짜를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재산을 가진 상태로 사망할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돈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 재산을 내주고 상속인들이 제공할 돌봄에만 의존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모한가 하는 것은 알고 있다. 자녀가 여러 명일 때 더욱 그렇다. 우리는 리어의 잘못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나 리어의 교훈으로 자녀들에게 한 푼도 안 주고, 좋은 목적의 기부도 안 하고 끌어안고 있으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솔 레브모아 교수의 「리어왕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유산분배와 상속 그리고 돌봄 비용 지불하기’중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가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6년 만인 그의 나이 31살 때인 159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31살이면 당시에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고, 통찰력이 강해지고 놀라운 생산성을 보여준 시기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젊은 시절의 경험을 아낌없이 표현하고 열정도 담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42세 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발표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42세는 노년에 접어든 나이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태양이고, 그녀의 두 눈은 ‘온 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개의 별’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들의 머리 위헤 우뚝 솟아 있는 ‘휘황찬란한 천사’로 묘사되었다. 이런 식의 사랑은 현실은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사실과 증거에 적대적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사랑은 땅 위에 있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원하고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대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실제 사람과의 육체적 사랑에는 미숙하다.
반면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노년기의 사랑을 묘사한다. 둘은 자신들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삶 자체에서 너무나 많은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인간 생활을 초월할 의사가 없다. 로·줄에서 둘은 음식을 먹지 않지만, 안·클은 끊임없이 음식을 먹는다. 로·줄에서 둘은 직업이 없지만, 안·클은 친구이자, 서로를 지지하는 동료로 각자 왕국을 통치하느라 많은 일을 한다. 로·줄은 유머 감각이 없는데 반해, 안·클의 삶은 우아한 농담과 지극히 사적인 놀림으로 이루어진다. 로·줄은 서로에게 완전히 몰두한 나머지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나 안·클은 주변 사람들에게 대한 뒷담화를 즐기고,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의 우스운 행동거지를 구경하기도 한다. 로·줄은 서로에게 이야기할 때 과장된 숭배언어를 쓰지만, 안·클은 모욕적인 말, 심지어 욕하는 말(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오래된 나일강의 뱀’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로 클레오파트라에게 다가갈 줄도 안다.
젊은이의 사랑과 노년의 사랑의 차이를 보여주는 징표는 시간의 역할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둘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는 인지하기는 하지만 계절과 해의 흐름은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그 자체가 세월의 한 토막이다. 역사적인 사실과 마찬가지로 연극에서도 두 사람은 10년 넘는 시간을 함께한다. 그리고 과거, 현재, 매래의 감촉은 항상 그들의 사랑에 조미료 역할을 한다
인간의 몸은 이상적 미학의 형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강과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셰익스피어가 참조했던 문헌들과 달리 미모를 부각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셰익스피어는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경이롭고 복합적인 성격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관심이 자신에게만 머물도록 하기 위해, 정성들여 갖가지 책략을 세운다. 수작을 부리고, 변덕을 부리고, 놀리는 말을 하고, 뭔가를 알려주지 않고, 상대를 안달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년기의 사랑은 허풍 속에 진실한 감정을 담고 있다. 노년의 여성이 관능적 사랑 속 파란만장한 변화를 겪는 동안, 문학작품 관찰자나 독자의 경험은 인식론적 중요성을 지닌다. 노년의 여성은 ‘성숙한’사랑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기존의 주장들을 분석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떤 추상적인 설명으로도 설명하기 불가능하다. 성숙한 사랑은 관능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적인 것이다. 관능적인 측면은 기억, 유머, 공통의 내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사적인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은 젊은이들의 가질 수 없는 깊이를 가진다.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중년 이후의 사랑」‘나이 드는 여성의 연애와 섹스’중에서〉
외국의 사례에서 흔하게 보는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를 보면 그녀가 아버지 같은 존재를 원하거나, 남자가 돈이 많거나 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대로 젊은 남자가 나이 많은 여자와 사귀는 경우는 그가 그녀를 자기 어머니처럼 돌봐줄 사람을 찾는 거라고 추측하거나, 상대가 돈이 많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가 배우자의 나이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통계나 증거는 아직 없다.
현 바이든 대통령 직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31세 때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이바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이혼했는데, 이혼으로 부자가 된 이바나는 스물 세 살 어린 남자와 결혼했고, 도널드는 47세 때 30세 여성과 결혼했으며, 59세 때에는 35세인 멜라니아와 결혼했다. 이런 결혼은 부동산이나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사업가들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사람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유하다는 점이다. 요즘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녀에게 권위적이기보다는 자녀들을 지지해 준다. 젊은이들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애인을 원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우리의 친구나 가족이 사망했을 때, 미래지향적인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했어. 하지만 그는 이제 죽고 없어. 그 점에 대해 마음 아파할 이유도 없지. 왜냐하면 슬픔은 노여움과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감정이거든.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로 전환하는 게 좋겠어. 알고 보니 나는 그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했던 거야. 물론 함께 보낸 시간은 즐거웠지만.”
이 가상의 경제학자는 초인간적인 존재일지 모른다. 고인을 애도하는 의식은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풍습으로 목놓아 우는 관습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나중에 자신이 죽을 때 사람들이 나를 생각해 주리라고 믿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슬픔에 젖을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 투자한다. 애도라는 풍습은 시간 낭비도 아니고, 미래지향적 사고와 충돌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존심을 북돋아 주게 된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17세 때 24살 많은 브리지트 트로뇌에게 청혼해 결혼했다. 브리지트에게 ‘마크롱의 코치’라는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어머니 같은 존재 또는 후원자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는 프랑스 연애 패턴을 주목하지 않고 모방하지도 않지만, 나이 드는 여성들이 젊은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거나 그 반대로 젊은 남자들이 나이 드는 여성과 연애를 시작하는 일은 드물다. 만약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된 여성들이 늘어나 지금의 패턴이 바뀐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듦이 자기 모습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모험이 더 많아질 것이다.
〈솔 레브모어 교수의 「중년 이후의 사랑」‘좀 더 모험적인 연애를 바란다’중에서〉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미국의 경우 400만 명에 달하는 노인 빈곤층은 더 광범위하고 더 장기적인 문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 노인 빈곤층이 비교적 소수인 이유는 그들이 열심히 일했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던 시대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 은퇴할 세대는 저축을 훨씬 적게 하고 있다. 우리는 노인 빈곤층의 비율이 높은 미래를 맞이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현재 문제 해결책을 마련하면서 앞으로 닥칠 더 심각한 문제에도 대비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현안 중의 하나인 지구변화, 이를 둘러싼 정책은 세대 간 갈등과 불평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는 전쟁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전쟁은 적이 우리에게 문제를 들이밀지만, 환경재앙은 대부분 서서히 일어나고 사회는 언제 예방조치를 취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탄소화합물을 배출하는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할 시기를 계산하면 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누군가가 미래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여러 가지 비용을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기후변화 정책은 세대 간 형평성 문제로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간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이듦과도 관련이 있다. 기후변화 모델에서 예측할 수 있는 재앙들은 현재 60대 이후의 사람들은 직접 겪지는 않을 일이다. 현재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조부모 세대보다 기후변화에 관심이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비효율적인 사업에 돈을 쓰면서 비용은 미래에 전가한다. 이것은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후변화 문제에는 정부부채가 적합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효율적인 예방조치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장기대출 방식으로 그 사업의 비용을 충당한다면 현재 세대는 미래 지구에 거주할 후손들의 관점에서 지금의 투자를 평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문제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노인 빈곤층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복지연금이나 각종 복지제도에도 불구하고, 정부지원으로 빈곤층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세대에게 저축을 장려하고 교육도, 자극도 주지만 그들은 저축을 많이 해두지는 않았다. 수평적 불평등에다 미리 저축해 놓은 사람들은 저축을 해놓지 않은 동료 노인을 구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중년 남녀 절반은 아예 저축이 없거나,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버는 돈도 전부 써버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빌 게이츠의 재산을 박탈하고 싶을 정도로 질투심이 강하지는 않다. 우리가 생계를 꾸리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적당한 나이에 은퇴할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있다면 훨씬 부유한 이웃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 처지가 크게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노인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다음 세대도 저축을 해두지 않았고 부동산 형태의 자산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우리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공적연금 확장은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재분배해야 하는가를 놓고 강제저축이라도 시킬 맹렬한 전투를 벌여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이 온전한 한 사람, 즉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존중받는 일이다”
〈솔 레브모아 교수의 「노년의 빈곤과 불평등에 관하여」‘노인빈곤과 불평등 해소 가능성’중에서〉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계속 친구와 가족을 필요로 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살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른 사람에게 비대칭적으로 의존하게 될지는 모른다. 노년에는 일상적인 짜증, 잦은 통증, 이동의 어려움, 경쟁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더 집중하게 될 것이다. 노인들은 화를 잘 내기 때문에 같이 있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노인 스스로 자신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주체성과 자아가 작아진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부족하지만 적절한 정책적(복지정책, 요양서비스 향상 등) 개입으로 어느 정도 해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드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녀들과 잘 지내는 것은 스스로 행동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고 자녀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의미에서 이타적인 행동은 아주 평범하고 좋은 것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부르기 위해서는 통제권을 상실하기 한참 이전부터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리어왕의 사례를 따르지 말아야 하고, 자립성을 소중히 여기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노년기에 찾아올지 모르는 의존적인 생활에 대비할 수 있다.
감정조절에도 신경 써야 한다. 솔직하다는 것은 귀중한 덕목이지만 솔직하다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짜증, 불만을 모조리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기표현에 중독된 우리 문화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중립적이지 않다는 명백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정을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면 요구가 된다. 자녀들을 향한 이타성에 부정적 감정이 자녀들이 겪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포함 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가르켜‘냉정하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깊은 사랑은 항상 소리 높여 표현하지 않고 애정 표현과 연결되는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절제는 곧 품격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른 시기보다 노년기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미래에 참여하고 흔적을 남기고, 우리가 살았기 때문에 뭔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야 결실을 맺는 어떤 운동 또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환경운동, 동물복지 운동, 민권운동, 전쟁에 참여하는 일, 예술가 단체, 종교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집단의 노력은 세상의 미래를 개선하는 일이며, 유명인이 아닌 사람도 기여 할 수 있는 활동이다. 세상에 훌륭하게 기여한 사례는 플라톤의 지적과 같은 개인의 생산물도 있지만, 중세의 성당처럼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도 있다.
자녀를 낳고 기르기, 아이들 또는 학생들 가르치기, 동료들 도와주기 등 우리는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진정한 이타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자리에서나 우리의 재능과 환경에 따라 세상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은 젊은 시절이나 노년기에나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아이를 키워봐서 알지만, 유아기에는 순전히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 아이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라면서 다른 사람을 어떤 목적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알게 된다. 아이가 자라면서 가족과 친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전반의 대의에 대한 생각도 하며 귀중한 책임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우리 모두 두 번째 아기가 되어 자아의 절박한 요구와 육체의 본능적 요구가 그동안 형성했던 좋은 습관들을 방해하고, 우리를 넓은 세상의 가치와 멀어지게 만든다. 우리는 이와 같은 도덕적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 그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한다. 되도록 품위와 유머와 겸손을 보여주면서.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나이듦과 이타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