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가계[편집]
이극돈의 5대손으로 태어났으며 이극돈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 하여 어려서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1582년(선조 15년) 생원·진사에 합격하여 광릉(光陵) 참봉을 지냈으며, 어머니에게 효도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한편 오랫동안 가난한 환경에서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임진왜란때의 의병장이며 조식의 학맥을 계승한 정인홍(鄭仁弘)의 제자가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관료 생활 초반[편집]
159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이 되었다. 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공로로 후일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98년(선조 31) 사간원정언을 거쳐 황해·평안 순검 해운 어사(黃海平安巡檢海運御史)로 쇄마 폐단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의주 부윤 황진을 탄핵하였다.
1599년 이조 정랑이 되고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 합격했으며, 이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의 영의정 유영경이 이에 찬성하자, 대북의 영수로서 그의 스승인 정인홍과 함께 영경을 탄핵하는 한편 광해군(光海君:東宮)이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졌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복귀하여 예조 판서와 대제학을 겸임하고 승진하여 광창군에 피봉되었다. 이후 과거를 주관하게 된 인연으로 허균 등을 조정에 끌어들여 권력의 기틀을 다져 지지 세력을 넓폈다.
정치 활동[편집]
권력 참취(僭取) 과정[편집]
사상적으로는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아 남명의 제자였던 정인홍의 문하에 출입했으며, 이후 그와 의기투합하여 현실정치에 강경하게 대처하였으며 1608년 선조의 후계자 문제로 대북파와 소북파가 서로 다툴 때에 대북파의 지도자로서 광해군편에 섰다.
선조가 만년에 세자인 광해군을 폐세자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새로 세자로 세우려 할 때 소북인 영의정 유영경이 이에 찬성하자 정인홍과 함께 유영경을 탄핵하고 광해군이 세자로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선조는 그를 정인홍과 함께 귀양 보내라는 어명까지 내렸는데, 선조가 별안간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죄가 풀렸다. 광해군의 즉위로 인해, 선조 사후에 인목왕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섭정할 것을 종용했던 유영경이 처형당하고 그 일당인 소북이 크게 참화를 입었다.
광해군 등극 이후[편집]
임해군, 영창대군 숙청[편집]
1608년 광해군의 등극후 이이첨은 왕권에 위협되거나 반대세력인 유영경, 임해군 등을 숙청하였다. 이후 대사간, 1611년 병조참지, 대사성 등을 거쳐 광창군(廣昌君)에 피봉되었고 그를 공신으로 책록하자는 추천을 사양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광해군 말기 무렵에는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비대화되어 버렸다.
1613년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에 관여하였다. 1616년 예조판서로 재직 중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했으며, 내섬시 제조, 대제학을 지낸 뒤 1617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인목왕후 유폐[편집]
1616년부터 그는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을 주장하여 1618년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무렵 그의 전횡을 비판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기도 했다. 이어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8년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약방제조, 1619년 대제학을 거쳐 1620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는 광해군의 방조 아래 막강한 세를 구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반대파로부터 악명을 떨쳐 가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와 함께 유희분, 박승종을 일컬어 삼창(三昌)이라 불렀는데, 이는 세 명의 부원군호(府原君號)에 공통적으로 창(昌) 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묘 종사 논란[편집]
1620년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황,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사상적으로 남명학파인 그가 정인홍과 함께 반대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1621년부터 이황,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과, 폐모론을 주동한 것에 대한 사림의 상소와 유배, 탄핵 등이 계속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도 영남 사림을 중심으로 근세에 이르기까지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인조 반정과 최후[편집]
인조 반정이 일어났을 당시, 광해군이 반정 주도세력을 처음에는 이이첨의 소행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그 세는 맹위를 떨쳤으나, 1623년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 능양군과 함께 반란을 모의 대궐을 습격한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이이첨은 실각하였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 이보현(利甫峴)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참형되었다. 향년 64세. 그의 아들 이원엽, 이홍엽, 이대엽 등도 모두 처형당하여 선대 둔촌 이집으로 부터 그의 아들대까지 10代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연이어 대과에 급제한 내력의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의 처형으로 대북파는 몰락했고,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악의 화신으로 지탄받았다. 그의 저서와 작품, 문집들은 서인(西人)과 남인계열에 의해 인멸, 유실되거나 소각되었다. 1908년(융희 2년) 그의 스승 정인홍이 복권되면서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