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문예중앙》 신인상 당선작]
고양이 관념론
신두호
새하얀 고양이는 하얀이라는 속성을 기른다
하얗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닌 고양이는
네 발을 모으고 골몰하는 7월의 구름 11월의 열기구
쓰러지는 나무 곁에 아무도 없다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숲
종적을 지우며 흩어지던 발걸음이 멈추고
전화벨이 울리면 나는 전화기만 확신한다
거실의 형태와 색채는 차원을 먼지로 기록하지만
공간을 점유하려는 사물의 성질은 믿음의 영역
하얀이라는 속성이 빛의 털실 뭉치에서 새어 나온다
정오를 떠다니는 음모들은 식별되지 않을 만큼 가볍고
고양이 없는 그림자들에 대한 실마리는
해진 주머니에 있다 버려진 지팡이의 매끄러운 손등 위에도
늘어진 음성처럼 더디게 퍼지는 초침 속에서
희미한 벽들을 선동하며 어슬렁거리는 방목소리는 기억한 입술을 잊기 위해 건너오지만
꽃병과 꽃이 서로에게 무능한 감정이듯
어둠 속 검은 원뿔의 희미한 테두리들을 가진
나는 근사한 걸음걸이에 빠져든다*
곡면을 제도하듯 차오르는 감정들의 기하학
향기의 모양을 간직한 꽃잎이 실재에 유일한자신의 꽃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고양이는
아니다 피어오르는 향이 붉은 부채를 펼쳐 보이는 어디에도
하얗게 지워지는데 아무것도 아닌 숲
한데 모인 네 발을 감추는 꼬리가 남는다
네온 사인 파자마 가스파초 계피향
정지한 해변을 물들이는 창백한 개념들도
사라지기 위해서만 골몰하는 과정이
그리는 붓에서 찾는 붓을 발견한다 백사장이
태양을 등진 고고학자의 입에 견고한 무덤을 만들고 있다
고양이 없는 꼬리의 뼈가 막 드러나려는 순간에
-폴 발레리<시의 아마추어> 에서
탁상공론의 아름다움
우리는 탁상 위에 턱을 괸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것들이 떠오른다
라운드 테이블 위로
예를 들어 내가
젤라틴을 부정한다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면
열매는 가로수 이마들에 달라붙고
아이스크림과 혓바닥의 유비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노조의 대표단은 사측의 입장에 맞서 무한한 궐기를 양보하므로
투우의 쟁기질과
쟁취의 입씨름이
윤리적이다
탁상에 있어서 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측 대표의 금이빨은
마침내
어금니를 간다
밖에 매달린 누군가는 창을 닦는다
아마도 깊은 잠에 소환되었는지
탁상 위 아이스크림은
젤라틴으로 변한다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희비가 엇갈린다
급한 불은 끄고 봅시다
우리에겐 연중무휴 가동되어야 할 공장이 있지만
젤라틴은 누구의 취향에도 타협하지 않고
주사위처럼 구르는 단어들이
혓바닥의 유무를 의심케 한다
각자의 의자는 도무지 융통성이 없으므로
모두의 원탁이 유연해져야만 한다
그들만의 허황된 이론에 골몰하는 한 연인은
시간의 정물이 된 감정들을 가지고서
탁상 위에다 주사위를 던진다
형태 속에서 각설탕의 구조는 은밀하다
라운드 테이블이 있는 어디로든
그날그날의 쟁점처럼 햇빛은 떨어진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솔직한 심정을 내보이고
연인의 혓바닥은 각설탕을 난도질한다
난항을 겪던 협상이 늘 결렬되지만
탁상을 탓할 수는 없다
탁상과 아이스크림과 혓바닥의 삼위일체 속에서
누군가 젤라틴을 혐오한다면
우리는 저마다 턱을 괸 채
테이블 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신두호
조선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