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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1.사천 매향비
종 목 보물 제614호
지 정 일 1978.03.08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48
시 대 고려시대
매향이란 하늘과 땅의 신을 모시기 위해 향나무를 땅에 묻거나 향을 피우는 의식을 말하며, 이 때 의식을 행하는 과정 및 시기와 관련집단 등을 기록한 비를 매향비라고 한다.
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하다. 글자 크기가 같지 않고 가로·세로도 잘 맞지 않으며, 글자수 또한 각 행마다 같지 않다. 다만 글자체에 예스러움이 담겨 있어 당시 지방의 글씨체를 엿볼 수 있다.
판독된 내용에 의하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를 조직하여, 왕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 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뤘다 한다.
비문은 승려 달공이 짓고, 수안이 썼으며, 김용이 새긴 것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워졌다. 건립목적과 세운 연대가 확실한 비로, 잊혀진 우리의 옛 민속을 알려주고 고려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
2.사천 늑도유적
종 목 사적 제450호
지 정 일 2003.07.02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늑도동
시 대 청동시대
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으로 섬 전체에 대규모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79년부터 부산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1988년부터 2001.12까지 3차례에 걸쳐 경남고고학연구소, 부산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패총과 무덤유구, 주거지 등과 함께 각종 토기류(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토기, 점토대 토기 등), 반량전, 오수전, 한(漢)나라 거울 등 1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러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 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유적이다.
사천 늑도 유적은 고대국가 초기단계에 형성된 복합유적으로서 한·중·일 간의 고대 동아시아지역 문화교류 증거를 보여주는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3.곤양면의 비자나무
종 목 천연기념물 제287호
지 정 일 1982.11.04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194-9외 3필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사천 곤양면의 비자나무는 나이가 300년 정도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m, 둘레 3.85m로 가지는 사방으로 뻗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곤양군청사의 정문에 위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은 곤양면사무소 안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암나무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일부 가지에 수꽃이 달린다고도 한다. 약 10m쯤 떨어진 곳에 작은 수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천 곤양면의 비자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4.진주,삼천포 12차 농악
지정번호 :중요무형문화재 제 11-가 호
소재지 : 송포동 177-2번지
지정일자 : 1966년 6월 29일
농악은 대략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농사에 종사하기 시작한 때와 그 맥을 함께 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리고 두레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공동체 속에서 계승되어져 온 향토음악의 한 맥락이라 하겠다.
5월 파종 후의 즐거움, 농사일이 끝나는 추수절의 기쁨과 농한기의 애환을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의 지신밟기 등에서 농악은 농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중성 있는 민속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지리적 여건상 예부터 외침이 많았던 것과 관련하여 군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저항심과 지킴의 정신이 군악과의 연계 속에서 더욱더 특징 있는 농악으로 발전되었다.
진주ㆍ삼천포농악에도 군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기나 영기, 긴나팔, 전립, 행건, 놀이마당에서의 오방진, 길군악, 별굿놀이 등이 있으며 치배들의 강하고 활동적이며 진취적 기상이 보이는 멋과 기교 등이 군악연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때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농악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암흑기를 맞았으나 고 박경호 선생과 김한호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으신 황일백, 문백윤선생들의 노력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계승되어 왔으며 해방 이후에도 서부경남 각처에서 활동하시던 분들이 황일백, 문백윤선생을 중심으로 열심히 활동을 했다.
많은 활동 중에서도 특히 전국 규모의 각종 경연대회에서 최고의 영예를 차지함으로써 우수함이 입증되고 지방 농악으로서의 정통성이 인정되어 마침내는 ‘66년 농악부문에서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그 결실을 맺었다.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농악을 위해 노력하시던 황일백 선생께서 ‘74년에 작고하시고 ’80년에는 문백윤선생마저 작고하시어 잠시 주춤하던 농악이 두 분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으신 박염(장구, 91년5월 기능보유자 지정) 선생과 김선옥(쇠, 2000년8월 기능보유자 지정) 선생으로 인하여 활성화를 이루었다.
이후 해마다 서울 놀이마당에서의 정기공연과 지방발표회 및 각급학교에서의 농악부 창설, 전국대학생들에게의 전수, 지역의 젊은 농악인들에게 농악을 전수하면서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지역문화 축제에도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지역문화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5.가산오광대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 73 호
소재지 : 축동면 가산리 626-1번지
지정일자 : 1980년 11월 17일
가산 오광대는 경남 사천시의 가산리에서 전승되어 온 영남형 민속가면극이다. 가산리의 노인들에 의하면 약 2~3백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현재의 기능보유자 계보만 가지고 보아도 약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가산은 조선조 말까지 조창이 있던 곳으로 약 300호의 큰 고을이어서 항상 시장이 열렸는데, 그 때 탈놀음이 행하여 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산리에 거주하는 한씨가 정착한 지가 11대에 이르는 것과 동제인 천룡제와 오광대놀이가 밀착되어 있는 것 등을 미루어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1.다솔사 보안암석굴
종 목 도유형문화재 제39호
지 정 일 1972.02.12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산43
경상남도 사천에 있는 보안암은 1947년 5월에 세워졌으나 실제 석굴은 고려 후기에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의 석굴로 외부형태는 앞면 9m·옆면 7m 가량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정면에는 둘기둥을 세워서 입구를 만들고 있으며, 윗면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둥근 모양이다.
석굴 안에는 높이 1.8m 가량의 석조여래좌상 1구와 자연석을 소박하게 다듬은 16나한상이 있다. 천장은 긴 돌 2개를 동서로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또 하나의 긴 돌을 걸치고 있는 모양이다.
인공으로 만든 이 석굴은 규모나 평면 형태, 모시고 있는 불상 등에서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과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2.다솔사 대양루
종 목 도유형문화재 제83호
지 정 일 1974.02.16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와룡산 기슭에 있는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연기조사가 처음 짓고 영악사라 하였다. 선덕여왕 5년(636)에 절을 늘려 짓고 다솔사라고 부르다가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영봉사라 하였다. 경문왕(재위 861∼875) 때 도선국사에 의해 다시 다솔사로 부르게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숙종 6년(1680)에 다시 지었다. 지금 남아있는 대양루는 영조 24년(1748)에 지은 것이다.
대양루는 다솔사의 본전인 대적광전과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있는 2층 누각으로,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고 절의 행사 때 사용하는 도구나 그릇을 보관하기도 한다. 보통 절의 누각은 윗층은 마루·아랫층은 문으로 이용하는데, 대양루는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앞면 5칸·옆면 4칸의 규모이며,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방풍판을 달았다. 대적광전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나 좌우 양쪽과 뒷쪽에 벽을 설치하여 막았고, 뒷쪽에는 문을 달아 밖의 경치를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앞마당과 누각 마루는 떨어져 있고 오른쪽 퇴칸 앞으로 돌다리를 걸쳐 출입하고 있다.
다솔사 대양루는 매우 견실한 느낌을 주는 누각건물이다.
3.사천향교
종 목 도유형문화재 제220호
지 정 일 1983.08.12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세워 유교를 공부했던 곳이다. 세종 22년(1440)에 향교 관계자들의 거처인 치성재, 학생들의 거처인 동·서재,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 휴식공간인 풍화루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수학원학사서재’로 바꾸었다.
현종 5년(1664)에 안혜원이 유교진흥을 위해 성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을 세우면서 비로소 교육과 제사를 겸했던 향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여러 차례 보수했으며 현재는 동재를 없애고 풍화루를 폐쇄했으며, 외삼문을 통해 출입하게 하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이 앞에, 사당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4.곤양향교
종 목 도유형문화재 제221호
지 정 일 1983.08.12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곤양면 송전리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순조 7년(1807)에 곤양군수 신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향교내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앞에 있고 사당인 대성전과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성전 좌우에 동·서 양무가 없고, 대성전의 위치 또한 명륜당 뒤의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어 두 영역이 완전히 분리된 배치를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제사만 지내고 있다. 곤양지방 향토사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5.삼천포 매향암각
종 목 도유형문화재 제288호
지 정 일 1993.01.08
소 재 지 경남 사천시 향촌동 산46-1
매향의식을 치른 후 그 내용을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매향의식이란 향나무를 땅에 묻는 민간 불교의식을 이르는 것으로, 향나무를 통해 소원을 비는 자와 미륵불이 연결되기를 바라는 미륵신앙의 한 형태이다. 매향비는 보통 바닷물과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을 그 적격지로 하여 세워두며, 14∼15세기에 주로 세웠다. 이 시기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때로,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해안지역의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는 의식을 행한 후 비를 세워두는 것이 보통이나 이렇듯 바위에 새겨두기도 한다.
향토산 중턱의 처녀바위라 불리우는 곳에 새겨 놓은 이 기록은 조선 전기 태종 18년(1418) 승려와 신도들이 기록한 것으로, 아래로 하향천이 흐르고 바닷물이 드나들고 있어 지리적인 조건도 맞아 떨어진다. 내용에는 1417년, 1418년 두 차례에 걸쳐 수륙무차대회(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영혼을 위해 올리는 제사)를 베풀어 향나무를 묻은 사실이 적혀 있고 승려 및 여러 시주자들의 명단을 실었다. 30명 정도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불교의식이긴 하나 승려와 민간이 공동으로 행한 대중행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