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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익 |
내가 태여난 고향은 화룡현 환성향 화남촌이다. 예전에는 천수대대라고 불렀는데 세개 자연툰으로 되여있었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소학교만 있었는데 문화혁명때 중학교가 신설되였다. 나는 그곳에서 소학교 5년, 중학교 2년을 다니였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할 때면 고중에 가는 학생을 대대 지도부와 학교에서 추천하였는데 천수, 신흥 두 마을 학생들은 태평고중으로 가게 되고 내가 살던 화남촌은 졸업하는 학생비례에 따라 추천하여 화룡시2고중에 보냈다. 그때 화남촌은 초중 졸업생이 도합 9명인데 6명을 고중에 추천하고 3명을 탈락시키게 되여있었다. 나는 학급에서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아 무난하게 추천받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줄 어린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1972년 2월말에 고중가는 명단이 발표되였는데 내 이름이 없었다.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들은 이튿날 어머니는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날도 밝지 않은 신새벽에 천수대대로 달려가 교장선생님과 대대 최서기를 만났다. 왜 자신의 아들은 고중에 추천 못 받았는가 하며 자식을 고중에 보내달라고 사정했지만 이미 결정난 일이라 개변시킬수 없다는 말만 듣고 왔다.
그때 최서기는 어머니 마음이 상하는줄도 모르고 “그 집에 로력도 없는데 아들이 일찌감치 나와 벌면 좋지 않은가”라는 말로 “위로”하기까지 하더란다.
아버지가 장기환자이고 셋째누님이 일년전에 시집간후 로력이 없어 우리 집은 생산대에 빚을 걸머지고있었다. 겨울이여서 바깥출입이 어려운 아버지는 이번에는 누나를 천수에 보내여 사정해보게 하였다. 셋째누나는 낳은지 얼마 안되는 딸애를 업고 남들의 눈을 피해 추운 겨울 새벽에 천수로 가 책임자한테 사정했으나 역시 어머니처럼 헛물만 켜고 돌아왔다.
3월 1일, 개학하자 추천받은 학생들은 시내학교로 간다고 야단인데 고중에 추천받지 못한 나와 영철이는 리화동골안 막바지로 소발구를 끌고 땔나무 하러 갔다. 나무아지를 따려고 아츨한 이깔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니 시내 고중청사가 아슴푸레 보이는데 내 마음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돌리니 이번에는 초중때 참관하러 갔던 만인갱이 보여서 내 마음이 더욱 쓸쓸했다. 공부를 못하는 영철이는 군대모집이 나오면 군대에 가겠다며 씁쓸해했다. 해지기전에 둘이서 땔나무 한발구 해가지고 왔는데 어머니는 나무를 해온것을 보고 반가와할 대신 눈굽을 적시는것이였다.
아버지는 고중에 보내달라고 사정해도 소용없는지라 나더러 초중졸업반을 재수하라고 하였다. 문화혁명후기 공부무용론이 살판치는 때 공부를 위해 재수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런데 나더러 재수하라고 하니 나는 안한다고 떼질썼다. 나는 동창들 동생이 있는 아래 학년에 재수하는것이 달갑지 않았던것이다. “론어”,“맹자”를 읽어 마을에서 유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아버지는 여러차례나 나를 끈질기게 설복하여 끝내 나의 대답을 받아냈다.
“큰누나는 고중시험에 떨어져 세번이나 재수해서야 고중에 입학했다. 고중을 다녔기에 대학도 갈수 있었고 지금은 국가로임을 타지 않니? ”
아버지의 조리있는 말씀이였지만 나는 항변했다.
“큰누나는 시험쳐 고중에 가는 때이니 재수해도 되였지만 지금은 재수하면 공부해 벼슬한다는 비판을 받아요. 그리고 애들의 놀림도 당하구요.”
“그런거 모두 꾹 참아라. 지금은 문화혁명시기라 추천으로 고중가고 대학가도 앞으로 지식을 요구하는 시대가 꼭 올거다. 그러니 꼭 공부를 해야 한다.”
아버지의 부탁대로 어머니와 누나가 또 리교장댁과 최서기댁을 찾아가 손이야 발이야 사정을 해서야 나는 재수를 허락받았다. 그때 재수했기에 나는 고중공부, 대학공부도 이어갈수 있었다. 나의 앞날을 위해 로심초사하신 부모형제들에게 영원히 고마운 마음이다.
애호박과 늙은 호박
□ 한태익
흥부박이 탐스레 열리는 흥부골에는 찬 새벽이슬이 지천에 열린 호박들의 머리에 내리고있다. 애호박은 해뜨기전부터 일어나 찬 아침이슬에 세수하고 연지곤지 찍으며 무엇이 신나는지 아침밥을 지으려는 늙은 호박에게 쫑알거린다.
“늙은 호박아?”
“…”
애호박의 비뚠 마음으로 다시 웨친다.
“늙은 호박아, 주름살이 보기 싫더니 귀마저 먹었나. 늙은 호박아?”
늙은 호박이 하던 일 잠시 멈추고 주름진 얼굴을 돌리며 응대한다.
“왜 이른 새벽부터 바쁜 사람 부르며 야단이니? 연지곤지 찍는걸 보니 무슨 좋은 일 있는게지?”
싱글벙글 좋은 일 있으면 자랑하지 못해하던 애호박의 그 본성이 인차 드러난다.
“나 오늘 미인선발에 뽑혔어. 오늘 나 도회지의 단풍호텔에 가서 귀빈들의 상에 진수성찬으로 오른대. 나는 그런 좋은데 가는데 늙은 호박 너는 이 골안에서 늙기만 하니 너무 안스러워. 함께 갈수도 없고…”
“잘됐구나. 이 골짜기에서 너 출세하는구나. 가서 내가 구경 못한거 잘하고 좋은 진수성찬으로 만들어져 흥부골의 영광을 떨치기 바란다.”
“흥, 걱정도 팔자네. 우리 호박들의 위상을 내가 아니면 누가 높이겠어.”
애호박은 이른 새벽부터 분치장하며 으시대다 한낮에 호박밭의 환송대회에 참가하고 커다란 붉은 띠를 두르고 자동차에 실려 도회지로 떠났다.
애호박이 가자 여느 애호박들은 자신들이 전도가 있다며 늙은 호박들을 얕잡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늙은 호박들은 여문 이삭이 머리 숙이듯 침묵만 지켰다.
오후 세시, 하늘에서 난데없는 헬리콥터 한대가 원을 빙 그으며 호박밭언저리에 내리는것이였다.
애호박들은 자기들을 뽑으러 왔다고 좋아 란리였다.
늙은 호박들은 귀한 손님이 오는게 자기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는지 저녁 지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근데 헬리콥터가 모시러 온 손님은 천만뜻밖으로 늙은 호박이였다. 애호박을 가져갈 때는 광주리에 담아가던것이 늙은 호박을 모셔갈 때는 귀한 상자에 비단을 깔고 깨지지 않도록 잘 포장하고 또 포장하는것이였다.
늙은 호박이 헬리콥터에 앉아 푸른 가을하늘로 날아올랐다.
늙은 호박이 초대된 곳은 애호박이 초대된 단풍호텔 18층이였다. 올라가다 8층에서 진수성찬으로 만들어질거라며 초조해하는 애호박을 만나보았다.
이미 칼도마에 보기 좋게 썰어진채로 누워있는 애호박은 곧 토장국에 들어간다고 울상이 되여있었다.
늙은 호박이 18층에 올라가니 우선 사우나부터 잘 시킨다. 그리고 음식은 정성이라고 신주단지 모시듯하면서 조심스레 터뜨려서 맛있는 죽을 만드는것이었다. 맛있는 호박죽이 된 늙은 호박이 귀한 손님의 상에 올랐다.
“정말 맛있는 호박죽이로구나. 어디서 자란 호박이냐?”
“네, 저희들은 장백산기슭 흥부골에서 왔나이다.”
“그러냐. 먼데서 왔구나. 혹 네가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테니 한가지만 말해보아라.”
“저희들이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가지 청들고싶나이다. 제발 들어주세요.”
“어서 말해라.”
“지금 8층에 저의 흥부골에서 온 애호박이 칼 맞아 토장국에 들어갈 처지인데 좀 더 자라 맛있는 호박죽이 되도록 흥부골로 돌려보내주시면 원이 없겠나이다.”
“소원이 그러하다면 들어줄련다. 헌데 명줄을 잘린 애호박이 돌아가서 다시 살수 있겠느냐?”
“지금 의학이 발달하여 이식수술 할수 있으니 념려하지 않아도 되나이다.”
“그럼 돌려보내도록 하지.”
칼 맞고 토장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놓인 애호박은 늙은 호박의 도움으로 다시 흥부골로 돌아가 더 자라고 여물게 되였다.
헬리콥터에 실려 흥부골로 돌아오던 애호박은 늙은 호박을 공경하지 않은 자신의 행실을 깊이 뉘우쳤다.
돌과 나무와의 백년사랑
한태익
2008년 백두산문인산악회의 첫산행코스를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선경대로 정했다. 고향이 화룡인 저는 봄,여름,가을에 선경대를 여러번 찾아 색다른 정취를 만끽했지만 겨울선경대를 본적 없어 첫산행이 은근히 기다려졌다. 지난해 첫산행은 1월 6일에 모아산으로 했는데 함박눈이 펑펑 내려서 첫산행이 매우 인상 깊었다. 서설이 등산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것이다.
지난해 첫산행에는 최홍일작가, 김익사장, 한문파주임, 김문세시인, 박련희프로듀서 등 6명이 참가했다. 산에 가면 날파람 일구는 최홍일작가가 눈내리는 길을 내며 앞장에 서서 모아산 깊은 골짜기를 몇개 지나 모아산너머 명산마을을 지나 어느 산고개를 너머 오후 1시에 명신김씨닭곰집에 도착했다. 첫산행인지라 2007년회장으로 된 내가 닭탕으로 일행을 초대하였다. 그런 지난해 산행이 어제 같은데 2008년 첫산행이 이루어지니 세월을 살같이 빠르기만 하다.
올해 첫산행에는 자가용 두대에 8명이 동참했는데 한국의 조시인님도 동참했다. 겨울선경대산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것은 돌과 나무가 서로 붙잡고 백년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였다.
100여년전에 도토리씨앗 한톨이 선경대바위벼랑가 틈사이에 떨어졌다. 그 씨앗이 싹이 나고 잎이 돋으며 나무로 커가는데 벼랑가인지라 나무가 커가면서 자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벼랑가옆으로 굽어지면서 뿌리가 뽑힐 위험에 처했다. 바로 이때 묘한 인연이 될라고 그랬는지 벼랑가아래로 처지는 나무를 받쳐줄 아름드리돌기둥이 나무를 받쳐주었다. 그로부터 백년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돌은 10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참나무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나무야! 힘내.큰바람에도 안쓰러지게 내가 단단히 받쳐 줄게.>>
<<돌아 고마워! 비바람, 눈보라가 몰아쳐도 난 너의 머리를 부여잡고 굳세게 자랄거다.>>
<<그래 나는 비록 자랄수 없는 돌이지만 천년만년 버틸수 있어. 그러니 시름놓고 날 잡아봐. 네가 강인하게 자라는 모습에서 난 행복과 기쁨을 느껴.>>
참나무는 자라며 돌의 머리에 자신의 몸을 기대고 한껏 커갔다. 세월의 년륜을 몸에 새기며 지금 참나무무게는 1톤좌우되는 거목으로 가로 자라고 있다. 참나무는 1.2메터되는 부채암이 자기를 받쳐주는것이 항상 고마왔고 부채암이 친구처럼 정다웠다. 나무에 잎이 나고 그늘이 질 때면 새들은 날아와 나무와 재잘거리며 속삭이다가도 우뢰가 울고 번개치며 창대비가 내리면 내 꼴바라 어디론가 날아가버리지면 부채바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참나무를 지켜주는 초병역활을 해주었다.
참나무는 부채암에 업히여 한세기동안 서로 사랑하며 돌과 떨어질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서로 어울릴수 없는 돌과 나무일지라도 서로 돕고 사랑하면 행복가 쾌락이 넘친다는 대자연의 섭리를 자신의 몸으로 일깨워주고있었다. 우리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사랑의 계시를 주는 수보석앞에서 우리 등산인들은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백년을 맺어온 돌과 나무와의 인연이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보석---돌과 나무와의 백년사랑에 감동먹은 뜻깊은 첫산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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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돌과 나무의 백년사랑 넘 좋은 글이네요~ 잘보고 내립니다.
늙은 호박..!!
그래.. 니들은 젊고 이뻐서 좋겠다.
라고 속으로 괘씸해 하던 마음. 이 글을 읽고 반성 합니다.
ㅎㅎ 좀 너그러워 지기로..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