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7월 15일 주일2부 예배-요한복음 6:41-51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떡, 내 살을 먹으라)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3장 5장 강의에서 제가 영생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의 배경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영생은 신령할 때 영자가 아닙니다. 영원한 할 때 영자입니다. 영생은 영원히 존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뉴에이지 종교가 말하는 영과 직접 교통하여 엄청나게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영생 불사할 때 영이 아닙니다. 신령할 때 영이 아닙니다. spiritual life가 아니라 eternal life입니다. eternal life는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 영생이다, 이것의 배경은 오늘날 파울로 코엘료 같은 사람의 순례문학에 나오는, 뉴에이지 문학에 나오는 신과 인간이 직접 접촉해서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풍성한 삶을 사는 것, 이런 의미의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은 eternally endurable of life,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 영생이다, 영생의 배경은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4-19절, 시편 133편,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공동체를 영속적으로 존재하게 만들어줘서 서로 평화롭게 형제자매들끼리 오순도순 살게 만들어준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생은 이웃끼리 영원히 결속되어 사는 삶, 어떤 전쟁 천재지변 인재지변 등 삶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온전히 보호받는 삶이 영생입니다. 사랑에 깊이 몰입해본 사람들은 영생을 희구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 사랑이 영원히 존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히 존속될만한 삶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삶이 영원히 존속됐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뉴에이지가 말한 영생이나 남묘호랑교가 말한 영생과 다릅니다.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영원히 존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학적인 정치적인 경제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요즘말로 하면 정치학적 사회학적 생태학적 지속가능한 삶과 같은 뜻입니다. 지속가능한 이란 말이 나오죠? sustainable development, 이런 말이 나옵니다. sustainable과 같은 말이 eternally endurable of life, 영원히 지속할만한 삶, 또 하나는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신과 독립적으로 접촉하여 연합하여 개인이 누리는 삶은 영생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삶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삶이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멸망을 당한다는 말뜻을 그 당대의 역사에서 해명해드리겠습니다. 3장과 5장에서 예수님 당대의 맥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려고 하는 다섯 그룹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로마제국을 무력으로 몰아내서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열심당원은 로마제국과 정면으로 군사대결을 서슴지 않는 세력입니다. 그다음 이 정반대의 스펙트럼 안에는 사두개파와 헤롯파가 있었습니다. 헤롯당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용역권을 따내어서 이스라엘을 대신 다스리고 로마제국에게 세금을 바치는 존대들입니다. 헤롯은 네 개의 나라로 구성돼 있습니다. 4분의 1지역 왕, 분봉왕이라는 뜻은 헬라어로 테트라아르크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들에게 그 권력을 위임했기 때문에 4+1로 구성돼 있습니다. 4개의 1지역왕, 분봉왕, 그다음 대제사장들에게 위임돼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4+1로 구성된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는데, 이중 1에 해당하는 예루살렘 일대에서 종교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사두개파라고 합니다. 사두개파는 머리가 넷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새두시스, 히브리말로 사독, 영어로 Sadducees, 그걸 중국사람 말로 발음하면 사두개가 됐습니다. 사두개파는 사독계열의 제사장들, 사독계열은 옛날에 예루살렘에서 오랫동안 세습제사장 권력을 유지했던 가문이름입니다. 사독계열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두개파는 원래 사두계열은 아닌데 사독계열 제사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친 로마세력이었습니다. 이 중간에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보다 더 급격하게 하루에 세 번씩 몸을 씻으면서 극단적인 정결을 유지하려고 하는 정결강박증자들을 에세네파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군사적 정벌을 통하여, 아니면 로마제국과의 협력을 통하여 구성하고 개척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자매끼리 오순도순, 이스라엘 사람끼리 서로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서로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식탁에 초대하여 이스라엘 민중들 안에서 사랑이 불붙듯이 일어나는 영생,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 있는 삶이 영원의 불빛처럼 퍼져야만 이스라엘 미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만찬적인 공동체주의입니다. 자기 몸을 살과 피로 던지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미래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왕도 아니고 상비군도 아니고 관료조직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다, 자기 몸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으로 여겨서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자기 몸을 계속 음식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참 왕이고 이스라엘의 주도세력들이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담보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가르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차이가 많이 나죠? 영생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제국과 군사대결을 통해서 얻는 신정국가가 이스라엘의 미래가 되면 안 된다, 이스라엘 미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님이 자기 몸과 자기 생명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식사로 제공하는 것과 같은 자기 비움, 자기 내어줌, 자기 양도, 자기를 나누는 삶, 이런 삶이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자욱이 퍼질 때 이스라엘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에요. 잘 들어야 해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대에서 진짜 필요한 말이었어요.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일차적으로 그 당대의 사람들을 살리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뜻을 우리는 전도할 때 쓰죠? 전도하기 이전에 이스라엘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 말뜻이 무엇이냐?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제국과 군사적 항쟁을 통해서 나라 전체를 통째로 해방시키려는 민족적 자살행위에 뛰어들면 민족이 전멸하는데, 예수님을 믿고 서로 동포들끼리 사랑하고 얼싸안고 서로 상처를 싸매주고 채무를 탕감해주고 먹을거리를 나누는 사랑의 민중적 기초공동체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면, 로마제국과 군사적 항쟁이라는 극단의 민족적 자살행위를 하지 않고도 이스라엘 민족이 영생할 수 있다, 민족적인 생명을 유지해갈 수 있다, 이게 예수님의 길이었단 말이에요. 우리가 원래 뜻을 먼저 알고 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전도할 때 써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원래 뜻은 그런 뜻보다 훨씬 더 사회경제적 의미가 강한 connotation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걸 제가 가르쳤어요. 이걸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한 이 모든 말도 제가 3장과 5장에서 자세히 말했던 내용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6장 41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보통 이단교주들이 합니다. 영생교 교주도 그런 말을 했고, JMS도 이런 말을 했고, 문선명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자기가 내려왔다는 말은 권력과 비슷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말을 쓸 때는 자기의 순종과 자기의 철저한 비움을 다그치기 위한 말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언뜻 들을 때는 굉장히 낯익은 종교적 말로 들립니다. 수사화법입니다. 우리한테 무한절대복종을 유발하려고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죠? 그러니까 벌써 여러분은 나의 원적지와 호적지를 찾고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이렇게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한 것 때문에 수군거립니까?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말은 나의 종교적 기득권과 교주로써 권력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뜻은 철두철미한 자기 비움과 복종을 다그치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방식으로 읽은 사람들은 내 말뜻을 이해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뜻은 하나님이 나를 파송했다는 강력한 피파송의식, 파송당했다는 의식, 하나님이 나를 직접 보냈다는 의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절대로 하늘에서 내가 내려왔기 때문에 내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로 예수님은 설명한 겁니다. 일반 종교인들과 예수님의 언어는 너무도 다릅니다. 종교라는 것은 진짜 위험한 것입니다. 종교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지와 사후세계에 대한 무지와 동경, 이런 모든 것을 총력동원해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이원론에서 탄생합니다. 이원론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근원적으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이 세계와 죽음 저편의 세계가 완전히 갈라져서 절대로 소통이 안 된다고 하는 이원론 때문에 종교가 가능합니다. 지금 아무리 목사님들이 엉망진창이라도 교회가 있는 이상 신자가 있게 됩니다. 아무리 교리가 엉망이라도 내세에 관하여 말하는 자는 반드시 추종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왜? 인간의 영과 정신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엉터리 같은 말도 안 되는 말도 사람이 귀를 기울입니다. 왜 그렇죠? 사후세계 죽음저편의 세계 인간 피조물의 처절한 한계를 느끼는 인간들은 아무리 담임목사가 엉망이라도 그 담임목사님이 천국 죽음 저편까지 인도해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용납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슬프죠? 강남에 있는 압구정동에 있는 S 교회 회의록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간음 좀 하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국 가는 게 더 중요하지? 그분이 간음한 게 더 중요합니까? 그분이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는 큰 뗏목의 선장님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말이 회의록에 적혀 있습니다. 너무 슬프죠? 귀를 빨리 씻으세요. 이런 말은 듣고 귀를 바로 씻어야 해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염이 돼 버렸습니다. 오염이 돼서 그게 계속 떠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과 친하다는 느낌을 약간씩 피력할수록 추종자가 나옵니다. 이런 종교적 용어의 독특성은 인간의 절대 무지 인간의 절대 한계 때문에 이런 종교가 성행하는데, 이건 쉽게 말해서 나쁜 보험입니다. 한화생명보험에 4만 7천 원씩 40년간 내면 그 원액 다 돌려줍니다. 삼성생명 교보생명, 그러나 교회보험은 저놈들이 천국 데려다 줄 가능성이 없는 데도 너무나 내세이야기를 많이 함으로 말미암아 내세에 대한 아련한 동경을 가진 피조물의 순수한 무지상태를 착인해서 저 사람이 천국에 나를 데려갈 거라는 확신을 은근히 심어주면 너무 많은 인간이 거기에 쏠려버립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하늘에서 자기가 파송됐다는 말을 통해서 절대로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하거나 충성심을 도둑질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다그치고 자기를 희생시키기 위하여, 나는 하나님께서 파송한 사람입니다, 라고 강조합니다. 기독교가 진짜 하나님과 관련 있는 하나님의 친인척공동체라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의 동아리가 돼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기를 관련시키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순간 자기 부인을 해야만 그 말은 진실성이 담보됩니다. 하나님이 어제 나한테 말했는데 양목사님 나한테 돈 10만원 가져와, 하나님이 어제 나한테 말했어, 가향교회 가서 오늘 설교하래, 돈 천 만원씩 마이너스 통장 만들어서 나한테 가져오래, 이런 식으로 하나님 이름을 말하면 그건 아주 악한 사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어제 말했는데 내 은행 통장 1억짜리 나누어서 양목사님 주래,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네 통장 가져오래, 이건 사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했다는 말의 레토릭이 진실성을 담보 받으려면 자기희생, 자기 분해, 자기 해체의 언어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종교언어의 형이상학적 사기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종교적 언어는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혹시 여러분이 분별이 안 돼 저한테 가져오면 제가 분별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설교나 테이프, 옛날에 중국 이상한 데서 선교한다는 김모 목사의 테이프 5개를 할 수없이 들었습니다. 미국 교포들에게 돈을 너무 많이 갈취해간다는 소문이 난 사람인데, 테이프를 들어보니 완전히 사기꾼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은 그 사람을 말하면 테이프를 안 들은 사람이 없는데, 시카고에서 집회했던 테이프 5개인데,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이 사람 테이프가 너무 극적이고 진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돈이 몇 만 불씩 걷힌다는 겁니다. 제가 들어봤습니다. 들어보니 이건 완전히 인간의 무지를 이용한 형이상학적 사기였습니다. 연대가 일단 하나도 안 맞습니다. 어느 신학자를 인용하는데 그 사람 나이나 그 사람이 살았을 나이를 계산해보니 전혀 안 맞습니다. 이 세상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사기 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입니다. 예수님은 Anti 드라큘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양식이 된다는 말뜻은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가는 그 방식 때문에 힘이 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살아가는 방식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나는 예수님처럼 살기 싫어, 그럼 이 사람은 이미 드라큘라의 피를 받은 사람입니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괄호하고 나는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해체하러 왔고 자기 목숨을 주러 온 산 떡이니 내 떡을 먹는 사람마다 자기 몸을 주게 되어 있다, 이 떡을 먹는 사람마다 자기 몸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게 돼 있다, 이렇게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식사로 주려는 사람이 많아야만 인류가 영생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게 얼마나 좋아요? 가족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유는 영생공동체, 엄마 아버지를 뜯어먹고 사는 자녀의 이야기입니다. 엄마 아버지의 인생 전체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잘 보세요. 엄마 아버지가 대개 훌쭉 빠졌고 쭈글쭈글 해졌는데 엄마 아버지를 닮은 아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복제품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가족 4명을 보면 엄마 아버지를 닮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나와 있어요. 이게 바로 엄마 아버지를 먹고 자란 거예요. 엄마 아버지를 먹고 자란 가족 이야기, 결국 우리가 누구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이야기가 일상적으로 낯설지 않다는 겁니다. 누구의 살과 피를 먹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가족이어서 가능합니다. 그다음 가족이나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들이 남수단 사람들 아닙니까? 남수단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의 살과 피를 먹었습니다. 모든 희생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나눠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살과 피를 먹게 만드신 후에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지배하고 예수님 식으로 우리가 살아버리기 때문에 복제인간 예수가 되고, 이런 예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지 않고 영생으로 시편 133편처럼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이 된다, 이런 겁니다. 시편 133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높은 헬몬산이 있습니다. 높은 헬몬산은 지형성 강우 때문에 산 하나가 있으면 바람이 생기고 기압골 차이가 있어서 항상 이슬이 생깁니다. 높은 산은 항상 밤마다 이슬을 만듭니다. 산은 이슬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높은 헬몬 산이 이슬을 만들어서 낮은 시온 들판에 물을 공급합니다. 그리고 높은 산은 지하수 저장고입니다. 만일 산이 없다면 맑은 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가 산이 많기 때문에 맑은 물이 많습니다. 산은 지하수를 저장해서 이슬을 통하여 이 땅을 윤택하게 합니다. 한 집안에서 산처럼 높이 솟아 출세한 사람은 출세하지 못한 형제들의 지하수가 돼야 하고 이슬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공부 좀 잘하고 유능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해요? 다른 사람, 시온의 들판을 적시는 헬몬 산의 이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영생구조 아닙니까? 공부 사람을 보더라도 우리가 낙심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시온의 이슬을 만들려고 헬몬산이 되었구나, 헬몬산의 이슬 때문에 시온의 들판은 윤택해지고 시온의 들판에서는 곡식이 자라서 또 사람들이 먹습니다. 이런 게 영생입니다. 아론의 머리에서 쏟아진 기름, 아론의 머리는 지도층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지도층을 이룬 사람 사회에서 유능한 사람,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을 받아서 아론의 기름이 수염을 거쳐서 옷깃에 적셔 흐르듯이 결국은 이 땅의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매개 받아서 그 축복의 물줄기를 성령의 기름부음을 옷깃까지 흘러넘치게 만드는 매개물 중간 구조 통로 채널 이렇게 되는 게 영생이죠. 그래서 성한 사람은 성하지 못한 사람의 헬몬산이 되는 것이고, 공부 많이 한 사람은 공부하지 못한 사람의 헬몬산이 되는 것이고 기업을 통하여 성공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헬몬산이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 때 인류는 멸망이 아니라 영생하는 eternally endurable of life,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을 살게 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어떻게 공동체적으로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주는 곳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인류에게 영생을 주는 보물이기 때문에 이런 기독교는 온 땅에 다 퍼트려져야 합니다. 여러분 캐나다 선교사 돈 리처드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파푸아 뉴기니 이리안자야 부근에 선교사로 갔어요. 이 사람이 쓴 책에서 <peace child 화해의 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참 독특한 책입니다. 제가 사도행전 강해록 2권 각주에 이 사람 글을 인용했습니다. 이 사람이 선교했던 파푸아 뉴기니는 배신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이웃부족을 배신하여 이웃부족을 습격하여 이웃부족의 피를 먹고 마셔서 부족의 번영을 누리는 사위족이라는 족이 있습니다. sawi족입니다. 이 사위족의 특징은 이웃부족과 오랫동안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 평화로운 협정을 계약갱신하러 이웃부족의 대표가 옵니다. 그럼 한달동안 이웃부족의 대표를 29일 동안 hospitality 극단적인 친절로 감동시킵니다. 29일 동안 친절로 감동시켜서 이제 이웃부족과 우리부족의 평화로운 계약이 연장시킵니다, 하고 확신시키는 그 순간, 30일째 이 부족을 배신해서 잡아 먹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자가 먼저 창으로 찔려서 놀라는 장면, 배신당해서 놀라는 장면을 보고 쾌감을 느끼면서 뜯어먹습니다. 이런 부족을 전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이 부족과 부족 사이에 죄 없는 아이를 한 명씩 주고받으면서 평화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하드코어 영화와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성령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살과 피를 뜯어먹으면서 자기 존재를 유지해야 하는 드라큘라적인 모순 속에 삽니다. LG와 삼성의 시장독점욕구, 시장을 독점해서 물건을 많이 팔려고 하는 야수적인 진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진실입니다. 여기는 빈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고, 예수님이 성만찬에서 보여준 자기 몸을 떼어주는 사랑을 한 번 모방하고 추종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 인생 어딘가로 내 목숨을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제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것은 온 세계 만민, 파푸아 뉴기니 사위족까지도 알아야 하는 복음입니다. 이렇게 온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운동, 이것이 참 기독교, 이런 기독교만이 인류에게 전파되어야 할 기독교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 같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드라큘라 같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절대 다수에게 드라큘라처럼 보이고 예수님 같은 사람 안 보인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이 사람은 드라큘라의 피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님처럼 살면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 자주 보입니다. 자기가 살과 피를 나누어 본 사람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을 빨리 알아차리는 영적탐식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미 드라큘라의 피를 받아 드라큘라처럼 살고 있고 드라큘라의 사냥터에 뛰어든 사람은 세상 모두가 전부 다 드라큘라처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가 볼때 이미 드라큘라의 피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문을 볼때도 거룩하고 자기 살과 피를 몸바쳐 세상을 살리는 영생 즉 영원히 존속할만한 공동체적인 삶을 이구는 이야기가 빨리 보인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입니다. 그게 안 보인다? 전부 MB만 보이고 시중이만 보이고, 욕하는 사람만 보인다? 그 사람은 이미 드라큘라의 피를 받아 이미 자기도 누군가를 뜯어먹고 있는 사람이다, 신문 읽을 때 내가 성령충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문 읽을 때 기분 나쁘고 계속 묵상이 된다? 이건 이미 드라큘라입니다. 신문 읽을 때 아주 3단 기사 조그맣게 실렸는데, 포천의 참새구이 아저씨 돈 모아서, 이런 기사가 눈에 잘 띈다하면 이 사람은 이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 영생을 일구는 사람입니다. 인류는 집단적으로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인류의 한 섹션 인류의 한 팩터 인류의 한 그룹이 집단적으로 미칠 수 있어요. 히틀러가 미칠 수 있어요. 그러나 전체인류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쪽으로 인류역사가 전개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류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더 온전한 인간이라는 쪽으로 점점 합의가 이뤄져가고 있어요. 세계사가 오래될 수록 드라큘라같은 인간이 최고라고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준 자만이 참 인류라는 합의가 점점 돼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마지막에는, 예수님은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창조될 때도 하나님이 자기 몸을 주신 것이 되고, 이 세계를 완성할 때도 자기 몸을 주신 예수님이 역사를 완성하기 때문에 아파와 오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깊은 뜻이 있는데 다음주에 연속으로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세계를 볼때는 드라큘라 같은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의 몸을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준 예수님 같은 분이 역사를 주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 가향교회가 한국교회가 대표할만한 좋은 교회가 되게 하시고, 이 가향교회 제단에 선포되는 복음이 한국교회 주류복음이 되게 하시고 기본 종교의 복음이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