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가 장터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
1919년 합천지역에서 최초로 삼가 장날에 일어난 3월 18일(음력 2월 17일), 23일 양일간의 삼가 장터 독립만세 운동은 3월 1일 일어난 서울 파고다 공원 독립만세 운동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독립만세 운동입니다.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열사의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보다 더 크고 격렬했던 삼가 장터에서의 독립만세 운동에 대하여 85년이 지난 지금에야 역사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기념탑을 세우게 된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감개무량합니다.
현재의 합천지역 전체에서 삼가 독립만세 운동 순국자 13명 포함 21명이 순국했다고 하는 것은, 2002년 국가보훈처 ‘경남 항일 독립운동 참여자록’ 및 1979년 사단법인 삼일동지회의 ‘부산·경남 3·1 운동사’, ‘재판기록’, 1989년 이정은의 ‘경남 합천의 3·1 운동’ 및 ‘합천군사’,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등에 나와 있는 것을 근거로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등재되어 있는 명단 중에는 안타깝게도 객관적인 입증의 어려움으로 국가보훈처에서 공인을 받지 못한 분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6.25 전쟁 등으로 자료가 소실된 것이 주요 원인입니다.
일본측에서 (축소한) 공식기록인 <1919년 大正 8년 6월, ‘조선 소요사건 상황에 대한 헌병대장 및 경무부장 보고서’>에, 3월 18일 및 23일(음력 2월 17일 및 2월 22일, 당시에는 음력으로 장날이 섰음) 삼가 독립만세 운동에 1만2백명(합천지역 전체에는 14,600명(삼가10,200, 대병3,000, 합천600, 가야450, 초계270, 묘산80))이 참여했고 순국자는 5명(합천지역 전체에는 11명(삼가5, 합천4, 초계2)), 체포자는 38명(합천지역 전체에는 130명(대병54, 삼가38, 합천17, 초계14, 해인사7))이며, 부상자는 20명(합천지역 전체에는 34명(삼가20, 초계10, 합천4))으로, 4월 1일 유관순의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시에 3천명이 참여했고 순국자는 11명, 체포자는 수십명, 부상자는 3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3월 13일 창녕 영산면 만세운동에 5백명이 참여했고 25명이 체포되었다는 기록과 비교해 보면, 삼가 장날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비중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가 독립만세 운동 순국자는 13명이며,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 순국자는 19명입니다.
그러나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합천지역 전체에 무려 160명이 순국하고 290명이 체포됐으며 518명이 부상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또한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제26권에 삼가 장터에 3만여명의 대군중이 모였고, 몇 사람의 청년이 우리의 운동은 절대로 평화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자, 갑자기 일본군 7명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길거리에 널렸고, 다음날에도 일본군 30여명이 각처에 횡행하면서 사람만 보이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고 구타하여 즉사한 자가 42명, 중상을 입은 자가 100여명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우리 삼가 장날 독립만세 운동에는 3만여명이 참여하여 40~80명의 애국지사들이 순국하고 50여명이 옥고를 치르고 150여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가현이었던 상백(현 쌍백 평구, 육리, 펑지 일대)에서는 전남 장성의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문인인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 1843~1910, 외토 뇌룡정 중건)와 그의 종형제(從兄弟)이자 동문(同門)인 정면규(鄭冕圭)가 나왔고, 이들의 정신적 무게가 무겁게 드리운 곳입니다. 노백헌(老栢軒)은 現 쌍백면 육리 묵동에서 태어나 22세에 노사(蘆沙)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학통을 계승·정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성주의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을 비롯하여 그의 문인인 가회의 허유(許愈)·단성의 곽종석(郭鍾錫)·성주의 이승희(李承熙) 등 한주학파와 교유한 인물입니다. 이곳에는 족형인 노백헌과 학문적 입장을 달리한 정형규(鄭衡圭, 1880~1957)가 있었는데, 그는 現 쌍백 평구리에서 기거하며 철저한 항일정신을 견지한 인물입니다.
일찍이 삼가현은 참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고향으로 그 저항정신이 면면히 이어온 고장입니다. 삼가현이었던 가회에는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의병장 구산 윤탁(龜山 尹鐸)과 광해군 때 정2품 우참찬을 지낸 추담 윤선(秋潭 尹銑)의 후손들이 구평마을에, 거유(巨儒) 창주 허돈(滄洲 許燉, 1586~1632)의 후손들이 덕촌리에 거주하는 등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등 남명 조식의 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고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623년 소위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인 내암이 억울하게 처형되고, 그 여파 등으로 집권세력인 노론으로부터 심대한 차별을 받고 있던 합천 등 경상우도에서 무력(武力)으로 저항한 1728년 3월 정희량의 난으로 남명학파가 몰락하고, 중앙정부로부터 반역향으로 매도되어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으나, 불의를 용납 못하는 경의사상(敬義思想)은 실천철학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삼가 장날에 일어난 삼가 장터 3.1 독립만세 운동의 개요를 살펴보면, 보성중학교 학생인 백산면(현 운곡, 하신, 백역, 삼리 일대) 운곡 출생인 이원영(李愿永)은 3·1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서울에 있던 정현상(鄭鉉相)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상백으로 내려와 큰형인 정현하(鄭鉉夏)에게 전하고 상경합니다. 상백의 정현용(鄭鉉庸)은 배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원영의 지시로 상백의 오영근(吳永根) 정연표(鄭演彪, 일명 정방직) 정각규(鄭恪圭) 공민호(孔敏鎬)와 백산의 이계엽(李啓燁) 등은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 상백·백산 유지들을 규합한 후 주민들과 함께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하게 됩니다. 친구인 이원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대병의 이기복(李起馥)은 3월 20일 일어난 대병 만세운동 때 권양희(權良熙) 정시권(鄭時權) 권영두(權寧斗) 임상종(林尙鍾)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3월 18일, 23일 삼가 장터 만세운동에도 참여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상백과 백산 만세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인 이원영은 보성중학교와 오산학교를 다녔고(졸업은 안함, 재학생 여부도 확인 못함), 3·1 만세운동 후 상해로 피신하여 임정에도 참여한 인물이라고 하며, 48년도 제헌국회의원으로 합천에서 출마·낙선함)
1919년 3월 18일인 음력 2월 17일 삼가 장날에 상백의 정연표 정각규 공민호가 오후 5시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정금당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가회의 한필동(韓弼東)도“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지기(紙旗)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가회면민들도 1차 만세운동 때에 조직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5백명(일본측 자료 2백명)의 주민들이 삼가시장을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주재소를 포위하자 합천경찰서에서 일본 재향군인들까지 출동시켜 주재소 왜경과 함께 수십명(일본측 자료 6명)의 애국열사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등 밤 8시에 강제 해산을 시켰습니다. 합천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3·1 독립만세 운동입니다. (상백의 정연표는 3·1 만세운동의 핵심 인물인 대양의 강홍열·박운표, 대병의 권중박, 초계의 노기용 등과 계(契)를 만들어 밤마다 서당에 가는 것처럼 가장한 후 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나누었다 함)
가회의 윤병모(尹炳謨, 60세, 김흥락(金興洛) 문인)는 고종의 인산(因山, 國葬)날을 앞두고 아들 윤규현(尹圭鉉)을 서울로 보내 참례하게 합니다. (이때 인접한 산청 신등의 유학자인 김영숙(징역 5월)의 아들인 김상준도 동행함).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윤재현(尹在鉉, 31세) 김태현(金台鉉) 최용락(崔龍洛) 허정모(許正模) 허동규(許東奎) 허장(許장) 김홍석(金洪錫) 등은 3월 23일 삼가 장날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고, 인근 삼가 상백 백산 대병 봉산 대양 용주 대의 신등 생비량 등의 유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한 후, 3월 23일 4천여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농악을 울리며 삼가 장터로 향하였습니다. 삼가 장날과 장터는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적인 시공간적(時空間的) 현장이며, 우리 지역 민중의 삶과 터전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1차 만세운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백산 운곡 및 하신의 이원영 및 이상동(李相東) 등은 1차 만세운동을 바탕으로 3월 23일 운곡재(雲谷齋: 운곡서당)의 학생들과 운곡 등 인근 주민들을 규합·행진하면서 면서기 최영기(崔永基) 변용규(卞容圭) 등과 함께 백산면사무소(現 쌍백 운곡리 소재, 1929년 4월에 백산과 상백이 합쳐져 쌍백면이 됨)를 불 지르고, 이계엽 등 주민들은 전주대를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키고, 동시에 상백 어파마을의 공재규(孔在奎)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오영근(吳永根) 진택현(陳宅賢) 정원규(鄭元圭) 정치규(鄭致圭) 등과 더불어 주민들을 규합하여, 상백면사무소(現 쌍백 평지리 소재)로 가서 면장에게 만세 삼창을 하게 한 후, 상백 백산 6천여 주민들이 10리 거리인 삼가 장터로 집결하였습니다. (이계엽은 "기미(己未) 삼일운동(三一運動) 백산면(栢山面) 대표자(代表者) 이계엽(李啓燁)"이라고 쓴 장폭기(長幅旗)를 들고 시위에 앞장섰다가 4년형을 살았고, 그 후 6형제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잡혀 1927년 하얼빈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함)
삼가 쌍백(상백, 백산) 가회 봉산 대병 대양 용주 대양 대의 신등 생비량 등 무려 3만여명(일본측 자료 1만명)의 애국 주민들이 3월 23일 삼가 장터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들을 향해 정금당(現 삼가면사무소 앞) 앞 광장에서 김전의(金典醫, 의령 대의) 정방철(鄭邦哲, 의령 대의) 김달희(金達熙, 합천 매전) 등이 외세타도와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사자후를 토해 내었습니다.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林鍾鳳)에게 일경과 헌병이 총격을 가하자 이를 보고 분노한 3만여 주민들은 몽둥이 낫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로 거침 없이 몰려가자 일경과 헌병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습니다. 주재소 앞과 삼가면사무소 마당은 피바다로 변했고, 그날의 함성과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이었습니다.
순국자는 공재규(孔在奎)를 비롯하여 40여명(일본측 자료 5명, 현재 13명 확인)이나 되고, 수형자는 이계엽 등 50여명(일본측 자료 38명, 현재 24명 확인), 부상자는 임종봉(林鍾鳳) 등 150여명(일본측 자료 20명, 현재 17명 확인)이나 되었습니다. 3월 23일 오후 5시 30분 경에 일제의 무지막지한 살육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대내외적으로 우리 합천인과 경남인의 자주 독립정신을 선명히 천명한 근대 민족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3·1 독립만세 운동사에서 크나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전국적인 규모의 삼가 장날에 장꾼과 장터가 어우러져 민족의 자주와 독립정신을 만방에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권인호 교수는 1998년 5월「남명학연구논총 제6집」에서, “강우학파(江右學派), 즉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중심지역인 진주·합천·삼가 등 경남지역에서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 때 어느 지역보다 빨리, 그리고 면단위 장터 중심으로 격렬하게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또한 1923년 진주지역에서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일어난 것은 바로 내암 정인홍의 민본사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고향으로써, 또한 강우학파의 중심지로써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정의에 순(殉)하고 앞장서야 한다는 정신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내암 정인홍 등 남명학파는 임진왜란 때 눈부신 의병활동으로 팔만대장경을 보전하였고, 임란 후 중앙에 진출하여 개혁적인 정치를 펼쳐 국난극복에 이바지 했습니다. 그러나 1623년 인조쿠데타(인조반정)와 1728년 무신의거(이인좌란)로 집권 노론세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날조 폄하되었지만, 남명학파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바탕으로 한 위민정신·실사구시정신·저항정신은 우리들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이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까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전쟁 때인 1908년에 삼가군 출생인 김팔용(金八龍, 1867~1908)·이차봉(李且奉)·이소봉(李小奉)·김화숙(金華淑)·김찬숙(金贊淑)·한치문(韓致文)·김우옥(金羽玉)·김응오(金應五)·장명언(張明彦)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항일 독립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모두 순국한 사실과, 1919년 기미년 삼가 장날 3·1 독립만세 운동에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삼가 장터 독립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장덕수 등이 1920년 12월에 결성한 조선청년연합회 전국 116개 지부 중에, 현재의 합천지역에서 삼가청년회(회장 조기순, 회원 최창섭), 초계청년회(회장 정두은, 회원 변승규·장인환), 합천청년회(회장 박운표) 등 무려 3개 지부가 설립되어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과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에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1927년 3월 20일에 대병, 상백(평지리 소재), 백산(운곡리 소재), 가회, 삼가 등 5개면 2천여명이 삼가면소내에 모여,“중등교육기관인 삼가농업보습학교 설립을 위해 5개 면민이 대결속하여 삼가농업보습학교 설립을 관철시키고, 설립비는 5개면의 호세(戶稅) 부과등급 표준 등에 따라 삼가 7천원, 대병 1천5백원, 가회 1천5백원, 상백 1천5백원, 백산 5백원을 부담하며, 창립위원은 대병 송헌식(宋憲植), 상백 정의규(鄭義圭, 그 후 면장 역임), 백산 김병규(金炳圭, 백역 거주), 가회 윤병규(尹炳珪), 삼가 조순규(趙純圭)로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추진한 결과, 1928년 12월에 삼가에 삼가농업보습학교가 설립(그 후 1938년 합천읍으로 이전, 합천중학교가 됨)되었다는 사실에서, 삼가 장날 3.1 독립만세 운동의 또 다른 결집력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처럼 1919년 기미 삼가 장터 3·1 독립만세 운동이 후대에 끼친 영향과 역사적 의미는 위대하고 크고 깊습니다.
순국하신 분: 공재규(孔在奎, 일명 공사겸(孔士謙), 만71세, 쌍백 외초) 권상주(權喪主, 가회 두심) 권영규(權永奎, 가회 둔전) 김기범(金箕範, 57세, 생비량 관동) 김일학(金日學, 가회 외사) 박선칠(朴仙七, 43세, 삼가 두모) 배숙원(裵淑元, 가회 장대) 우00(禹00, 삼가 하판) 윤성현(尹聖鉉, 17세, 가회 함방) 이낙현(李洛鉉, 삼가 문송) 이상현(李相賢, 삼가 두모) 최도인(崔道仁, 삼가 문송) 한우상(韓佑相, 삼가 일부) 열사 등 13명
옥고 치르신 분: 공민호(孔敏鎬, 일명 공문호(孔文濠), 39세, 쌍백 외초, 징역 6월) 권중태(權重台, 삼가 두모, 징역 6월) 김병효(金炳涍, 일명 김정의(金楨義), 43세, 쌍백 죽전, 징역 1년) 김석순(金錫珣, 일명 김한규(金漢珪), 쌍백 죽전, 징역 8월) 김성철(金成轍, 삼가 두모, 징역 1년) 김태현(金台鉉, 가회 덕촌, 징역 3년) 오영근(吳永根, 30세, 쌍백 대현, 징역 3년) 윤규현(尹圭鉉, 25세, 가회 구평, 징역 1년 6월) 이계엽(李啓燁, 32세, 쌍백 하신, 징역 4년) 이동원(李東元, 쌍백 하신, 징역 1년 6월) 이상동(李相東, 37세, 쌍백 운곡, 징역 1년 6월) 정각규(鄭恪圭, 30세, 쌍백 평지, 징역 8월) 정락중(鄭洛重, 쌍백 평지, 징역 6월) 정연표(鄭演彪, 일명 정방직(鄭邦直), 28세, 쌍백 평구, 징역 1년) 정선규(鄭宣圭, 삼가 두모, 징역 6월) 정원규(鄭元圭, 쌍백 평지, 징역 6월) 정치규(鄭致圭, 42세, 쌍백 평지, 징역 6월) 정현국(鄭鉉國, 쌍백 평지, 징역 6월) 진택현(陳宅賢, 쌍백 평지, 징역 8월) 최용락(崔龍洛, 가회 함방, 징역 10월) 한필동(韓弼東, 31세, 가회 덕촌, 징역 6월) 허동규(許東圭, 가회 덕촌, 징역 8월) 허장(許장, 가회 덕촌, 징역 3월) 허정모(許正模, 23세, 가회 덕촌, 징역 8월, 미결 90일) 열사 등 24명
부상 당하신 분: 구영문(具永文, 삼가 외토, 부상) 김기홍(金箕洪, 쌍백 안계, 종신불구) 김주익(金周益, 종신불구) 김진권(金鎭權, 27세, 쌍백 외초, 불구) 변용규(卞容圭, 27세, 삼가 동리, 부상) 안명조(安命朝, 문송, 부상) 이강영(李康永, 쌍백 하신, 평생와병) 이경락(李慶洛, 쌍백 하신, 반신불수) 이기우(李基禹, 쌍백 하신, 반신불수) 이기진(李基珍, 삼가 외토, 부상) 이또광지(李又光之, 쌍백 운곡), 이병훈(李秉薰, 가회 장대, 부상) 이시문(李時文, 쌍백 하신, 부상) 이원백(李元白, 쌍백 백여, 부상) 윤경문(尹敬文, 33세, 구 삼가현이었던 봉산면 술곡, 태형 60도) 임종봉(林鍾鳳, 31세, 가회 오도, 종신불구) 최영기(崔永基, 삼가 동리, 부상) 열사 등 17명
(현재 국가보훈처로부터 훈장(포장)을 받은 분들은, 공재규 공민호 김기범 박선칠 오영근 윤규현 윤성현 이계엽 정각규 정연표 열사 10분 뿐입니다. 이는 재판기록 등 자료 부족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도 훈장(포장)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겠습니다. 다만 최용락 및 한필동 열사는 재판기록이 남아 있으나, 후손과 연락이 안 되어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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