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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 21.사건 22.자기(磁器)와 화산, 23.아이온
-들뢰즈(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174-, 180-, 190- ,
제21계열 : 사건 (de l'événement)
<되돌릴 수 없는 것(impassible) -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 [한번 땅에 쏟은 물을 다시 그릇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이들은 살아있는 현재가 아니라 부정법들에 관련된다. 즉 이들은 한계지어지지 않는 아이온(Aiōn),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뉘며 현재를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생성(devenir)이다. (13-14)>
* 시간의 두 강독, 아이온과 크로노스(Les deux lectures du temps: Aiôn et Chronos 77-)
<아이온 위에서 각 사건들은 크로노스 안에서 가장 작은 분할보다 더 작지만, 동시에 크로노스의 가장 큰 조작, 즉 원환 전체보다 더 크다. 각 사건은 양 방향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끝없는 분할에 의해 모든 아이온에 퍼져나가며, 두 방향으로 뻗은 직선과 공연적이 된다. (80)>
<키케로(Cicéron, 전106-43)는 시간의 이행이 굵은 밧줄의 풀림(explicatio)과 유사하다는 것을 정확히 했다.그러나 바로 사건들은 원인들이 감겨진 밧줄의 원주(크로노스, Chronos) 안에 있는 것처럼 펼쳐진 밧줄의 직선(아이온, Aion) 위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69)
혼란스럽다. 벩송에서, 스토아학파의 해설에서는 아이온은 찰나의 선이고, 크로노스의 순간의 이분화(과거와 미래의 이중화)라고 하는데, 들뢰즈는 꺼꾸로 아이온을 순간의 지속으로 이어짐이라고 하고, 크로노스는 찰나의 계속으로 보는 것 같다. 왜 상반되게 읽혀지나?
제22계열. 자기(磁器)와 화산
제목을 묘하게 붙였지, 도자기와 화산이라? 들뢰즈의 제목과 달리, 그리스 문화의 유물들 중에서 도자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또한 화산활동도 중요하다. 화산활동이 크레타문명의 몰락이든지, 또는 이집트의 화산활동으로 헤라클레스가 라케다이몬에 왔다는 전설이든지. 도자기의 균열과 달리 화산은 문화의 소멸 또는 붕괴를 의미할 수 있다. 분열분석적으로 균열과 붕괴는 어느 경우일까?
철학의 사유에서 현재에서 이분화의 균열을 보는 쪽이 있고(도자기처럼), [다른 한편 천상에서 지상으로 전달을 깨달으려는 구도자 또는 종교인 있을 것이고], 또는 삶이 온갖 잡다한 것을 생성하고 생산하면서도 그저 쓰레기로 버려지지만 재생되어 다시 쓰일 것이되는 것은 저 용광로 같은 화산이 있기에 지구가 정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23계열 아이온(de l'Aiôn),
벩송의 MM의 3장에서 현재의 지속하는 단위를 순간이라고 하고, 잘려진 단위로서 현재를 찰나라고 한다. 이런 관점은 스토아에서 온 것이 분명할 것인데, 여기서 들뢰즈는 잘려진 찰나가 영원이고, 기억의 생성 능력을 지닌 현재가 순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물체적 변화의 시간은 크로노스, 불변하는 추상적 순수사건의 부정법의 시제와 같은 것이 아이온인 셈이다..
[§2 「표면의 효과들」에서 아이온과 생성을 대비, §10. 「이상적 놀이」에서 시간의 두 강독, 아이온과 크로노스 (78-79), 사건전체=아이온 그리고 대사건(80) §11 「무의미」, 아이온 위에 제3측면(제1측면 단어, 제2측면 사물의 상태) 즉 행위=x(83) §12, 의미의 방향에 관하여 아이온과 크로노스 (95) §15 「특이성들」 전쟁 불가침투성 아이온 (150) §18 「철학자의 세 부류」 스토아학파의 아이온 발견. §19 「유머」 (166), §20 「스토아의 도덕」 (172) §21: 「사건」 배우와 아이온(176) (41rmd)] [§23 「아이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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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 21: 사건 (de l'événement) 원 174, 번 259-)
사건의 영원한 진리 Véerité éternelle de l'événement 174
[아래 따옴표의 글은 부스께의 글이다. 들뢰즈는 사건을 감당한 자로서 부스께를 높이 평가한다. 아무나 죽음에 반효과로서 반죽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구체적으로 또는 시(詩)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스토아적이라고 이름붙이기를 꺼려왔다. (174)
[그럼에도]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 1897-1950)를 스토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그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그렇지만 그리고 또 바로 그런 만큼 그 영원한 진리에서 순수 사건으로서 이해했다. 사건들이 우리에게서 효과화되는 그 만큼, 그것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열망하며,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하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원 174, 번 259)
표면과 안감을 생산하는 것, ... [이 양면(표면과 안감)에서] 사건은 자신 속에 비인격적이고 비개인적으로 .. 세계 시민(citoyen du monde)을 소유한다. “내가 사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 모든 것은 내 삶의 사건들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사건들을 산다는 것은 마치 이들이 그 가장 뛰어나고 완전한 측면을 나로부터만 취해야 하는 것처럼, 나를 그들과 동등하게 하려고(égaler) 하는 것이다.”(174)
[한편] 도덕은 어떠한 의미도 없다. 또는 [다른 한편] 도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cela, 의미)이고, 도덕은 말하려는 다른 어떠한 것도 없다: 우리에게 도달한 무엇에 대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되지 말라. (174)
“내가 사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 모든 것은 내 삶의 사건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겪는다(vivre)는 것은, 마치 사건들이 가장 뛰어나고 완전한 측면을 나로부터만 취해야 하는 것처럼, 나를 시도하여 사건들과 동일시하려는 것이다.”(175)
만일 사건을 원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우선, 마치 그것[사건]이 스스로 살아나는 것에는 불(feu)이 있는 것처럼, 그것[사건]으로부터 영원한 진리를 끌어내는 것이라면, [그러면] 이 원함(ce vouloir)은, 전쟁이 전쟁에 대립하는 지점, 상처가 모든 상처들의 흉터로서 생생하게 그어지는 지점, 죽음이 모든 죽음들에 반(反)해 바람으로(voulue) 뒤집힌 죽음이 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의지적인 직관 또는 변이(tranmutation). (175) [여기서 불의 비유는 생명과 같다. 사건은 생명에서 영양을 얻는다. 그처럼 사건은 죽음과 대립에서 끌어낸다.]
부스께는 “의지의 파멸인 죽음에 대한 나의 취향(mon goût) 대신에, 의지의 신격화일 ‘죽는다’는 바램(envie de mourir)으로 대체 할 것이다.” (175, ‘’는 마실의 표시) [플라톤이 철학은 죽는다는 것을 배운다는 것과 상통할 수 있을까? (39ukj)]
부스케는 말하기를 “너의 불행으로 인간이 되라, 불행의 완전함과 파열을 체화하기를 배우라” (Deleuze, LS 175)
효과화와 반효과화 : 행위자(Effectuation et contre-effectuation: l'acteur, 176)
행동자[배우]는 신(dieu)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신(易神 contre-dieu)처럼 있다. 신과 행동자는 시간의 읽기에서 대립된다. 인간들은 과거 또는 미래로서 파악하는데, 신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그것을(과거와 현재를) 겪는다(vivre). 그 신은 크로노스이다. 신적인 현재는 원(圓) 전체이고 반면에 과거와 미래는 신(神) 밖에 남아있는 이런 저런 조각들에 상대적 차원들이다. 반대로 행동자(역신)의 현재는 가장 밀접하고, 가장 조밀하고, 가장 순간적이며, 가장 마침 점(點)적인 것이며, 즉 계속해서 선을 분할하는, 그 자체(현재)를 계속해서 과거-미래로 분할하는, 직선 위의 점이다. 행동자는 아이온으로부터이다. (176)
자기 고유한 사건을 통해 희극배우가 되는 것, 즉 반효과(contre-effectuation)이다.(176)
예컨데, 먹는 것에서 말하는 것을 선별하는 것이다. 부스케는 익살-행위자의 특성을 제시한다. 흔적을 만들 때마다 지워버리는 것, “인물들과 작품들 가운데서 고통 앞에 있음이라는 그들의 존재를 선별하는 것”, “가장 끔찍한 페스트, 독재자, 전재에다가 그 무엇을 위해서도 지배하지 않은 희극적인 기회를 결부시키는 것” 간단히 각 사물 위해 “흠없은(무구한) 몫”, 언어와 바램, 운명애(Amor fati)를 분간하는 것이다. (177)
죽음의 두 측면, 마치 사건처럼 Les deux aspects de la mort comme événement 177
모든 사건은 페스트, 전쟁, 상처, 죽음과 같은 유형의 것들일까? 이것이 단지 행복한 사건들보다는 불행한 사건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문제는 모든 사건의 이중적 구조(structure double)에 있다. 모든 사건에 있어서, [한편] 효과화의 현재 계기(le moment présent), 즉 사물의 상태, 개체, 인칭에 구현되는 계기가 있다. .. [다른 한편] 사건의 미래와 과거가 그 자체로서 포착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사건의 미래와 과거는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 중성적, 일반적도 특수적도 아닌 사건 자체(eventum tantum)이며.. 따라서 모든 현재로부터 비켜난다. (177) [전자의 크로노스, 후자에서 사건자체의 아이온, 사건은 이중성을 지닌다. 이것이 심리적으로 콤플렉스이고, 스키조이다.]
전자의 경우에, 나의 삶(ma vie)은 나에게 너무 연약하여 나로 삼을 수 없을 것 같고, 또한 나에게 할당된 관계에서 현재가 된 한 점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나(moi, 자아)는 너무 연약하여 삶을 살 수 없으며, 삶(la vie)이 너무 거대하여 나로서 감당할 수 없다. (177) [개인의 삶은 왜소하고, 전체의 삶은 너무 크다.]
이 애매성(ambiguïté)은 본질적으로 상처와 죽음의 애매성이라는 것, 즉 치명적 상처의 애매성이라는 것을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만큼 잘 보여준 사람은 없다. ... 한편으로 현실화되고 실행되는 사건의 부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사건의 부분”이 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수행(accomplissment)이 있게 되며, 이들은 효과화와 반효과화에 상응한다.(178, 번 264)
각 사건은 죽음과 같고, 자기 분신(son double) 속에서 이중적(double)이고 비인칭적이다. “그것[죽음]은 현재의 심연이며 현재 없는 시간이다. 내가 그것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내가 그리고 나 자신을 던질 수 없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죽음 안에서 나는(je) 죽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있어 누군가가(on) 죽는다. 누군가가 죽기를 멈추지 않으며 죽기를 끝내지 않는다.”
사건을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Ce que veut dire vouloir l'événement 178
이 누군가(on)는 일상적인 진부함의 누군가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것은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누군가이며, 마치 비가 오듯이, 그가 죽는(il meurt comme il pleut) 순수 사건의 누군가이다. 누군가의 빛남은 사건자체의 또는 4인칭의 빛남이다. (178, 번 265) [3인칭에 하나는 인간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이다. 이 후자가 비인칭, 전개체적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자연이 아니라 신, 또는 제우스라 생각한 적도 있다.]
자유로운 인간의 진실이 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인간은 사건 자체를 포착하기 때문이며, 또 행위자로서 사건의 반효과화를 조작하지 않고서도 있는 대로 사건을 효과화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이 .. 하나의 유일한 대사건 속에서(en seul Evénement) 모든 치명적인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다. (179) [자유인은 자연자체를 조작하지 않지만 그것로부터 효과된 것에 응할 줄 안다.]
그러나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인가? 모든 것을 혼합하는 대신에 혼합물 없이 즉각적으로 추출하고 정화하고 측정하는 혼합물. 그래서 모든 폭력들과 모든 억압들은 하나의 유일한 사건 안에 모이며, 이 사건은 이들 중 하나 - 물음에서 가장 가까운 또는 마지막 상태 - 를 파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파기한다. “시인이 요구하는 정신병리학은 인친적 운동(destin personnel)의 불길한 작은 사고, ... ... 경찰이 시위자들을 때려잡을 때‥… 그가 귀머거리 천재처럼 울부짖는다면, 그것은 게르느카와 하노이의 폭탄들이 그를 귀먹게 했기 때문이며‥…” (179)
변이를 이루는 것은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유일한 사건 안에서 그렇게 재결합되는 그 동적이고 엄밀한 [위치를 갖는] 지점, 즉 죽음이 다시 죽음에 맞서 돌아서는 지점, 죽다(mourir)가 죽음의 목적지와도 같은 지점, 죽음의 비인칭성이 이제 단지 내가 내 바깥으로 나가 상실되는 순간만이 아니라 죽음이 그 자체로서 상실되는 순간까지, 그리고 나를 대체하기 위한 가장 특이한 삶이 취하는 형태까지 표식 하는 지점에서이다.
계열 22. 자기(磁器)와 화산(Forcelaine et volcan)
[사건을 순간의 현재와 총체의 현재로 나누고, 그 경계선에 선 자아는 어떠한가? 블랑쉬의 죽음, 깨지기 쉬운 도자기 쪽에 피츠제럴드, 타오르는 화산 쪽에 로리를 대입한 것이리라]
균열(피츠제럴드) (La fêlure(Fitzgerald), 180)
“모든 인생은 물론 몰락의 과정이다” 이 문장처럼 우리의 머리 안에서 망치로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울리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 피츠제럴드의 모든 저작들은 이 명제의, 특히 그 ‘물론’(bien entendu)의 연속적인 발전이다. (180)
표면에서 지각할 수 없는 침묵의 균열이 있었고, 즉 자신 위를 날면서 자기 고유한 장위에서 조망하면서 자기 자신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표면의 유일한 사건이 있었다. 진정한 차이는 외면과 내면에 있지 않다. 균열은 내적도 외적도 아니며, 비감각적이고 이형체적이고 이상적인 경계선상에 있다. (181)
( 우리를 다음과 같이 위로하는 친구헤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빌어먹을, 내가 균열된다면 나는 나와 더불어 세계를 폭발시킬 것이다. 세계는 당신이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서만 현존한다....” ... “... 이본(Ybonne)은 부서진 바위를 붙이겠다고 안달했다. 돌맹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통해, 돌맹이는 다른 돌맹이로 다가갔고, 기도(祈禱)를 통해, 뜨거운 눈물을 통해 토로했으며,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 그러나 그것은 너의 잘못이라고, 나로 말하면 내 스스로 분열된(désintégrer) 것이라고” [이 로리(Malcolm Lowry 1909-1957)의인용문에서 화산의 의미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뒤를 보아야 할 것이다.]
두 과정 그리고 이들을 구분 짓는 문제 Les deux processus et le problème de leur distinction - 182 269
여기서 본성상 다른(서로간의 연결이 아무리 밀접하다해도) 두 과정이 있다. 그 하나는 그 비물체적이고 말없는 직선을 표면으로 확장하는 균열이고, 다른 하나는 이 균열을 일탈시키고 심화시키는 물체의 두께 안에서 그것을 각인하거나 효과화하는 외부적 수(手)들 또는 소란스러운 내부적 자극들이다. 이것이 위에서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가 구분했던 죽음의 두 측면이 아닌가. 그 하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 즉 과거와 미래 안에서 분할 될 뿐 결코 현존하지는 못하는, 그리고 이들[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비인칭적인 죽음으로서, 파악 불가능한 죽음, 결코 오지 않을, 내가 그리고 나아가지 않을, 어떤 종류의 어떤 관계에 의해서도 나와 연계되지 않는 죽음이다.”
다른 하나의 죽음은 가장 냉혹한 현재 안에서 발생하고 효과화되는 “극단의 지평으로서 죽을 자유를, 그리고 치명적으로 위험에 처하는 능력을 가지는” 인칭적 죽음이다. 우리는 두 과정의 연계를 가능케 하는 매우 다양한 여러 방식들을 인용할 수 있다. 자살, 광기, 마약복용, 알코올 중독, 아마도 마지막 두 방식은, 그들이 두 선(線)을 한 치명점(致命點, point fatal)에서 섞어버리지 않고서 취하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가장 완벽한 것이라.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착각적인 것이 있다. (182, 269-270)
블랑쇼(Blanchot, 1907-2003)가 자살을 마치 죽음의 두 얼굴에 일치하게 하는 의지처럼, 가장 인칭적인 작동에 의해 비인칭적인 죽음을 이어가는 의지처럼 생각할 때, 그는 이 접합의 불가피성과 접합 시도의 불가피성을 보여주고 하지만, 그는 또한 그것에 대한 착각을 정의하고자 시도 한다. (182)
두 과정은 본성상 다르다. .. 어떻게 표면의 단절이 심층의 분열(Spaltung)이 되지(생성하지) 않을 수 있으며, 표면의 무의미가 심층들의 무의미를 생성하지 않을 수 있는가? (183)
추상적 사상가가 지혜와 구별을 충고할 때, 그에게 무엇이 남아있을까? [난파된 자처럼 경계의 끝인]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부스케(Bousquet, 1897-1950)의 상처, 피츠제럴드(Fitzgerald, 1896-1940)와 로리(Lowry 1909-1957)의 알코올 중독, 니체(Nietzsche, 1844-1900)와 아르토(Artaud, 1896-1948)의 광기에 대해 말하는 것? ...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슬퍼 보인다. .. 그 가장자리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표면에 남을 수 있는가? .. 어떻게 이런 정치학에 그리고 이런 완전한 게릴라(cette guerilla)에 도달할 것인가? (스토아주의를 받아들이는 교훈이‥…. [유효하다])(184)
알코올 중독, 조울증 Acoolisme, manie[-]dépressive
184 알코올 중독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어떤 효과의 추구로서 나타난다. .. [알코올 중독자] 사람들은 동시에 두 시간, 즉 동시에 두 계기(moment)를 살지만 푸르스트(Marcel Proust, 1871-1922)적 방식으로는 전혀 아니다. (184)
[다른 계기] 알콜 중독자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들, 그가 “공포스러워 하는 그리고 동정하는” 대상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지만, 현재 순간의 체험된 또는 의지된 딱딱함은 그로 하여금 실재성에 거리를 둘 수 있게 한다. (184-185)
모든 것은 이미 되었었다(has been)에서 정점을 이룬다. 과거로부터 도망의 효과는, 즉 모든 의미에서 대상의 상실은, 알콜 중독의 울증적 측면을 구성한다. 이 도망의 효과는 아마도 피츠제럴드의 가장 강열한 힘을 이루는 것, 그가 가장 심오하게 표현했던 것일 것이다. (186).
피츠제럴드가 술 마시고 있는, 술 마시려고 하고 있는 인물들을 그리지 않은 것, 그렸다고 해도 극히 예외적으로만 그렸다는 것은 흥미롭다. 피츠제럴드는 알콜중독을 부족과 필요의 형식 하에서 보지 않는다. 아마도 수치심의 형식 하에서 [보았을 것이다.] 또는 [한편] 그는 항상 마실 수 있었고, [다른 한편] 알콜 중독은 여러 형식들이 있고, 그 중의 하나는 가장 가까운 과거에까지 이어졌다. (186)
(로리에게서 반대로‥… 그러나 알코올 중독이 욕구라는 이 날카로운 형태 아래에서 파악될 때, 그에 못지않은 시간의 심층적인 와해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전미래(futur antérieur)로서 체험되는 것은 모든 장래(avenir)이며, 여기에서도 역시 복합미래의 끔찍한 다급함, 죽음에까지 이르는 효과의 효과가 동반된다.) (186) [이 과거에 완료된 것, 복합과거로 그린 피츠제럴드, 이에 대해 미래에 완성될 것, 전미래로 그린 로리 사이에 차이를 들뢰즈는 지적한다.]
피츠제럴드의 영웅들에서 알코올중독은 몰락의 과정이다.(186-187)
바로 이렇게 해서 알코올 중독은 대표적인 예가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건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이 알코올의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187)
그럼에도 같은 종류의 이 모든 사건들 중에서도 특히 알코올 중독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해주는 것은 알코올이 사랑인 동시에 사랑의 상실(perte)이며, 돈인 동시에 돈의 상실이며, 조국인 동시에 조국의 상실이라는 사실이다. 알코올은 대상인 동시에 대상의 상실이며, 몰락(démolition)에 집중된 과정에서(‘물론’) 상실의 법칙이다. (187-188, 276)
정신도취를 존경하여 Hommage à la psychédélie
균열이 이러한 형태나 다른 형태로 신체 안에 구현되기를, 효과화 되기를 피할 수 있는가를 아는 문제는 분명 일반적인 규칙들에 정당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88)
왜 건강으로 만족할 수 없는가 라고, 왜 균열이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 아마도 균열에 의해서만 또 그 균열의 나라에서만(sur ses bords)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제안된 것은 건강보다는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188) [철학은 불합리의 해결인데 그 중에서 가장 불합리한 것은 ‘삶에 죽음이 있다’이다. 그래서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효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것에 대해 홀로 작용하고 또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익살광대의 반효과이다. 그러나 결국 일어나는 것(ce qui arrive effectivement)의 무언극이 되는 것, ...(188) [사는 것은 광대요 죽음은 무언극이다]
우리는 약물이나 술의 효과들(이것들의 ‘계시’)이, 만일 이 물질들의 사용을 결정하는 사회적 소외의 기법들이 혁명적인 탐구를 통해서 전복된다면, 이 사용과는 독립적으로 세계의 표면에서 그 자체로서 다시 체험되고 다시 복원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점에 관련해 버로스(Burroughs, 1914-1997)는 ...“우리가 화학적 길들을 따라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른 길들을 통해서도 도달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몸에 비수를 꽂는 대신 표면에 일제 사격(Mitraillage)을 가하는 것. 오! 도취(psychédélie)여. (188-189, 278-279) (41RLD)
제23계열 아이온(de l'Aiôn), (LS, 190-197)
들뢰즈/ 이정우,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원전 1969),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190-197
크로노스의 특성들, 심층들의 생성에 의한 전복(Les caratères de Chronos, et son renversement par un devenir des profondeurs, 190)
190 우리는 처음부터 시간에 대한 두 독해, 크로노스(Chronos)로서 독해와 아이온(Aiôn)으로서 독해가 어떻게 대립해 왔는가를 보았다. (190. 번 278)
1)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보면 오로지 현재만이 시간 속에서 실존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시간의 세 차원인 것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며, 과거와 미래는 시간 안에서 현재에 상대적인 두 차원이다. (LS 190 번 278)
극한적인 원으로서 또는 외적인 그릇(enveloppe, 공球처럼)으로서 [모든 것을 내포하는] 신과 더불어, 상대적인 현재들의 쟁여짐(emboîtement), 감김(enroulement)이 크로노스이다. (LS 190)
스토아에 영감을 받은 보에티우스(Boèce, 480-524)는 신적인 한재가 미래와 과거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또는 포함한다고 말했다.
2) 크로노스 내에서의 현재는 어떤 면에서 물체적이다. 현재는 혼합물들의 또는 물체화들(incorporations, 합병화 합체화)의 시간이며, 물체화 과정 자체이다. (번 279) [우리가 여기서 물체화라고 부르는 것은 종교에서 육화의 개념과 닮았다. 크리스트의 육화는 신체화이다. 관념이 아페이론과 혼합화를 우리는 물체화로 번역하고 싶다. (41LKG)]
가장 큰 현재, 신적인 현재는 거대한 혼합물, 물체적 원인들 상호간의 통일성이다. 그것은 우주적 주기의 활동을 측정한다. 이 주기 내에 모든 것은 동시적이다. [과학적이다] 제우스는 또한 디아(Dia), 통과(A-travers), 서로 섞여있는 것, 즉 물체화하는 존재(Incorporateur, 합병하는 합체하는)이다. (LS 190-191, 번 280)
3) 크로노스는 광대하고 심층적인 현재들에 의해 지배되는 운동이다. ... 현재를 비켜가는 심층들의 미친 듯한-생성(devenir-fou)이 존재하지 않는가?(191 번 281) [인격의 행위들을 보면 현재에 지배되는 운동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 Aurèle, 121-180)의 명상록에는 “좋은 혼합물인가 나쁜 혼합물인가?”라는 대안이 자주 등장한다. (191)
192 따라서 심층의 미친 듯한 생성은 좋은 크로노스의 생생한 현재에 대립하는 나쁜 크로노스이다. (192 번 282) ...크로노스는 현재에 가해지는 미래와 과거의 복수(revanche)를 현재의 항들로 표현해야 한다. 이 유일한 항에 크로노스는 영향을 주기도하고 포함하기도 한다. 죽음을 원하는 것은 크로노스에 속하는 자기 방식이다. ....
크로노스가 죽음을 원하지만(번역오류: 움직이고자 원한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다른 독해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닌가? (192 번 282) [죽는다를 원한다? - 제4인칭이기에 다른 독해가 필요하다. - 인간은 잔존을 원한다와 대립되는 것이 아닐까?]
아이온과 표면 Aiôn et la surface 192
1) 아이온(Aiôn)에 따르면, 오로지 과거와 미래만이 시간 안에서 내속하거나(insiter) 존속한다(subsister). 과거와 미래를 흡수하는 현재 대신 두 방향으로 현재를 각 순간(inatant) 분할하는, 현재를 미래와 과거로 무한히 분할하는 미래와 과거이다. 아니면 차라리, 미래와 과거를 각각 포함하는 광대하고 두꺼운 현재 대신, 각 현재를 과거와 미래로 분할하는 것은 두께도 없고 외연도 없는 순간이다. (192-193)
미친 듯한 생성과 아이온은 모두 물체적이고 척도를 갖춘 현재에 대립하며, 현재를 비켜갈 수 있는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모순(질적, 양적, 관계적, 양상적 모순들)을 펼친다. (193, 번 283)
아이온과 더불어 심층들(깊이들)의 미친 듯한 생성은 표면으로 기어 올라갔고, 시뮬라크르들은 환영들(fantasmes)이 되었고, 심층으로부터 단절(coupure)은 표면에서 균열(fêlure)로 등장했다. (193, 283)
본질적인 차이는 크로노스와 아이온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면의 아이온과, 심층들의 미친 생성과 크로노스의 집합 사이에 [표면과 심층+표면] 있다. (LS 193, 번 283)
크로노스가 물체들의 활동과 물체적 성질들의 창조를 표현한다면, 아이온은 비물체적인 사건들의 터(장소, lieu)이며 성질들과 구별되는 속성들의 터이다. 크로노스가 원인들과 물질들로서 그것을 채우는 물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아이온은 그것을 채우지 않으면서 끝없이 따라다니는 효과들로 차 있다. 크로노스가 한계지어진 동시에 무한하다면, 아이온은 미래와 과거처럼 한계가 없으면서도 또한 순간처럼 유한하다. 크로노스가 원환성(circularité), 그리고 막힘이나 침강, 파열, 쟁여짐, 경화(indurations)와 같은 이 원(환)성에서의 사고(事故)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아이온은 두 방향으로 한계 지어지지 않은 채 직선으로 팽창한다. 언제나 지나간 것이자 영원히 오지 않은 아이온은 시간의 영원한 진리, 시간의 순수한 빈 형식으로서 현재의 물체적인 내용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원을 펼쳤으며,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만큼 위험하게 그 만큼 미로와도 같이 그 만큼 구불구불하게(tortueuse), 하나의 직선을 따라 늘어난다. (193-194, 번 284)
아이온으로부터 펼쳐지는 조직화, 아이온과 크로노스의 차이들 L'organisation qui découle d'Aion, et ses différences avec Chronos 194
2) 언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이 새로운 세계, 비물체적 효과들 또는 표면 효과들의 세계이다. ... 순수 사건들은 언어를 기초 지우고, 그 이유로 순수사건은 자신들이[순수사건] 우리를 기다리는 만큼, 또 그들을 표현하는 언어 안에서만 순수하고 단일하게,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으로 실존하는 만큼 언어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LS 194 번 284)
195 첫째로 아이온의 선(ligne) 전체는 순간(l’instant)에 의해 주파되며(parcourir), 순간은 이 선분 위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옮김으로서 그 자신의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플라톤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순간은 자리를 가지 않는다(atopon). 순간은 역설적 심급 또는 우발점이다. (195)
둘째로 순간(l’instant)이 이렇게 현재로부터 추출한 것, 마치 현재를 차지하는 개체들과 인칭들처럼, 그것들은 특이성들이고, 특이점들이다. 이들은 두 번 투사된다. 즉 한번은 미래 속에 다른 한번은 과거 속에 두 번 투사된 특이점들이다.
셋째로 동시에 이중(double) 방향으로 뻗은 직선은 물체와 언어 사이에, 사물의 상태와 명제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린다. .... 그러므로 언제나 비평형 상태에서 동등하지 못한 관계를 맺는 두 측면(faces)이 존재한다. 한 측면은 사물의 상태를 향하며 다른 측면은 명제를 향한다. (195, 285-286)
따라서 언제나 비평형 상태에서 동등하지 못한 관계를 맺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사태를 향하며, 다른 하나는 명제를 향한다. 그러나 두 측면이 사태들과 명제들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 [명제적 차원에서] 따라서세 추상적 계기들(moments, 찰나들)에서 조직화의 일체는 점에서 직선으로. 직선에서 표면(면적)으로 간다. 점은 선을 그리고, 선은 경계선을 만들고, 표면(면적)은 두 편(côtés)으로 전개되고 펼쳐진다.(196, 286-287)
196 3) 많은 운동들이 연약하고 섬세한 메커니즘을 통해 교차한다. ... (196)
물론 아이온은 현재와 닮은 점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순간(l’instant)은 아이온에 있어 미래와 과거로 끊임없이 분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렇다. 사건에 있어서 과잉적인 것은 완성되어야 한다. (196 번 287)
물론, 아이온은 현재와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으리라. 왜냐하면 순간은 아이온에 있어 미래와 과거로 끊임없이 분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렇다. 사건에 있어 과잉적인 것, 그것은 완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폐허 없이는 실현되지도 효과화되지도 못한다고 해도. 크로노스의 두 현재, 밑바닥에 의한 전복의 현재와 형식들 내에서의 효과화의 현재, 사이에 아이온에 속하는 셋째의 현재가 있다.(LS 196 번 287)
순간(instant)을 표상하는 이 아이온의 현재는 결코 크로노스의 광대하고 심층적인 현재와 같지 않다. 그것은 두께 없는 현재이며, 행동자[(연기자)], 춤꾼(danseur), 무언극의 배우의 현재이며, 일탈적인 순수 “계기”(moment, 찰나)이다. 그것은 물체화의 현재가 아니라 순수 작용(operation)의 현재이다. 그것은 전복의 현재도 효과화의 현재도 아니며 오히려 반효과화의 현재이다. 이 반효과화 현재란 전복의 현재가 효과화의 현재를 뒤집지 못하도록 하며, 효과화의 현재로 하여금 전복의 시간과 뒤섞이지 못하도록 하며, 나아가 안감(doublure)을 반복적으로 갈아대는(redoubler) 현재이다.(196-197, 번 287-278)
(39ukj, ule, 41rmd) (옮, 8:33, 56PKB)(11:05, 56PKE)
**인명록********
전34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전427-347)(여든) 고대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서양철학상의 가장 중요한 인물
O
12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 Aurèle, 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480 보에티우스(Boèce, Boethius, 480-524) 로마 최후의 저술가·철학자. 철학의 위안(Consolation de la philosophie)
1732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1797).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
1812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 영국인 작가, 사회 비평가.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가.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1828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러시아의 소설가, 시인, 개혁가, 사상가.
1870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
1871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의 작가. 프루스트의 주요 작품으로는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연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다.
1896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 "La fêlure" (The Crack Up), 1936, in La fêlure, tr. fr. Gallimard, p. 341.
1897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 1897-1950), 프랑스 시인, 1918년 5월 27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Aisne 전선 근처의 Vailly에서 부상당한 그는 여생을 마비되었고 그의 책들에 둘러싸여 거의 침대에 누워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1900 귄터 슈타인(Günther Stein, 1900-1961) 독일 기자, 출판 편집인
1906 넬리(René Nelli, 1906-1982) 옥시텐 시인, 가타리즘 역사가. L'Amour et les mythes du cœur (1952)
1906 알끼에(Ferdinand Alquié, 1906-1985)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연구자, 합리론자.
1907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프랑스의 소설가, 문학비평가, 철학자. “그는 일생 동안 전적으로 문학에 몸을 바쳤고, “그는 일생 동안 전적으로 문학에 몸을 바쳤고 자신의 특질인 침묵에 전념했다.”
1909 로리(Malcolm Lowry 1909-1957), "Au-dessous du volcan", tr. fr. Buchet-Chastel,
1914 버러우즈/버로스(William Seward Burroughs, 1914-1997)[여든다섯], 작가, 시인, 소설가, 화가, 시나리오작가, 공상과학 작가, 산문가, 사진가. 비트 세대. 동명의 아버지(아들보다 오래 살았다). 정키: 회복되지 못한 마약 중독자의 고백(Junky, 원제: Junkie: Confessions of an Unredeemed Drug Addict, 1953). // 1947 아들 버러우즈/버로스(William S. Burroughs Jr., 1947-1981)[서른넷] 미국 소설가, 작가. 동명의 버러우즈의 아들. 자전적 소설 속도(Speed, 1970)
1915 끌로드 르아(Claude Loy, 1915-1997) 프랑스 시인, 누벨 옵세르바퇴르(1968)에 긴스버그에 관한 글이 있다.
1926앨런 긴즈버그(Irwin Allen Ginsberg, 1926-1997) 미국 시인,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의 지도적인 시인들 가운데 한 명. 그는 군국주의, 물질주의, 성적 억압에 반대.
(12:07, 56PKE)
첫댓글 #고대 그리스의 시간 담론들
* 아이온과 크로노스에 관한 첫째 논의는 플라톤
[플라톤, 티마이오스(Timaios)(박종현 역), 37d. 살아있는 것의 본성은 영원한 것이어서, 이를 생성된 것에 완전히 부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데미우르고스]는 움직이는 어떤 영원(aiōn)의 모상(eikōn)을 만들 생각을 하고서, 천구에 질서를 잡아 줌과 동시에, 단일성(hen) 속에 머물러 있는 영원의 [모상],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구적인 모상(aiōnion eikōn)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 이름 지은 것입니다.]
* 둘째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벩송은 꼴레주드 프랑스 강의록(1902-1903)에서, 시론(DI)의 제2장의 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4권에서 수의 논의를 가져온 것이며, 시간의 과정에 관한 논의는 6권에서 전개되는 것에 대한 것이라 한다. (56PNA)]
* 셋째 논의가 스토아학파
[아마도 벩송 강의를 들은 에밀 브레이어 스토아의 "영원과 시간"의 논의를 전개 했을 것이다.
그리고 브레이어의 지도를 받은 골드슈미트는 스토아의 시간에 대해 상세하게 논문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