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 3호
한더위가 꺾일 줄 모른다. 길고 긴 여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가을 김장 배추 모종을 하기 위해 밭 이랑을 다듬는다. 몇 년 만에 밭 전체 흙을 갈아 엎기로 하고 경운기 로터리 작업을 부탁했다. 다른 작업과 겹쳐 결국 관리기로 대체하였다. 아쉬운대로 괭이로 이랑 짓던 노력은 들이지 않았다.
집 근처 육묘장에서 여러 가지 배추 모종 중에서 맛이 으뜸이라고 자랑하는 불암 배추를 선택하였다. 품종마다 제각기 특징을 내세우며 가격 경쟁을 한다. 포기마다 백원부터 이백 원 정도다. 한 판 백 여 포기다. 퇴비와 밑거름을 넣고 아주 심기를 시도한다.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아 흙을 뒤적일 때마다 허옇게 속을 드러낸 먼지가 날린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여 밭고랑에 물을 댄다. 가녀린 배추 모종을 다듬어 놓은 텃밭에 심어본다. 이틀 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김장 무 씨앗도 뿌린다. 의심의 눈으로 심은 배추 모종마다 물 조리개로 뿌리 밑까지 흠뻑 젖도록 물을 끼얹는다. 올해의 김장 배추 심기는 예년과는 다른 한 해다.
추석 연휴를 지내면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나날을 지켜본다. 배추 모종이 살 수 있을까. 내일이라도 텃밭에 물주기를 하러 가야 할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사이 엄청난 비가 이틀에 걸쳐 내렸다. 수백 밀리의 비가 내린 곳도 있고,강우량이 여름 장마에 비길 바 없는 가을철 비가 곳곳에 물난리를 안긴다. 하늘이 하는 일이라 어떻게 하겠는가. 적절한 비가 나뉘어 내렸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랴. 농작물과 집이 물에 잠기고 여기저기 큰 물에 잠겨 버리게 된 생활용품들이 산을 이룬다. 피해를 입은 주인들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터져 나오는 긴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일전에 심어 놓은 배추 모종 뿌리내림을 걱정하고 아울러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면서 텃밭을 찾았다. 밭이랑 군데군데 빈틈이 있다. 메마른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어린 모종이 말라 버렸다. 작물이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게으른 주인 탓에 모종이 혜택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살아있는 배추조차 뿌리는 내렸지만 배추 벌레가 어린 잎을 가만두지 않았다. 잎 줄기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줄기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밭에 도착하기 전에 배추벌레 방제 약을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마을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수동식 농약 뿌리는 기계를 살충제와 함께 넘겨 받아 방제에 나선다. 일주일마다 세 차례 정도는 약을 쳐야 수확할 때까지 제대로 된 김장 배추를 얻을 수 있단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배추 모종이 빈 이랑은 그냥 둘 수 없어 작은 파 씨앗이 대신한다. 이랑 빈 곳에 파 뿌리를 심는다. 며칠 전 양껏 내린 비 덕분에 촉촉하게 젖은 밭 이랑이 마음을 놓이게 한다. 무 씨앗도 함께 뿌린다. 김장용으로 자라지 않으면 그런 대로 자란 만큼 그때에 맞춰 용도를 찾으면 될 것이다. 주변에 다른 사람의 밭도 둘러보는데 우리 텃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벌레 먹은 배추와 이랑 곳곳이 띄엄띄엄 비어 흙이 드러난 곳이 많다.
텃밭 풀을 정리하고 해가 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텔레비전 뉴스를 접하는데 전국적으로 배추 작황이 나빠 김치 공장 가동이 부분적으로 멈추었다는 내용이다. 정부의 비축 물량도 배추 작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날씨에 따라 작물의 작황 영향이 크다. 어떤 해에는 작물이 남아돌아 농사짓는 사람들이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예 수확 대신 경작지에서 갈아 엎는다. 올해처럼 돈을 주고 구입하려고 해도 작물이 없어 애를 태우기도 한다. 스마트 농업 시대라고 하지만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보다.
텃밭 농사를 짓는 초보 농사꾼에게 계절이 주는 위력은 크다. 메마른 대지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할 방법이 없다. 하늘에 맡긴다. 농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짓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첨단 기기의 도움을 활용하여도 자연의 원칙을 떠날 수 없다. 때 맞춰 내리는 비가 그 어느 영양분보다 우선이다. 다음 주말 텃밭에 들러 뿌리 내린 배추 관리에 약 통을 미리 준비한다. 무 농약 친환경 재배를 원칙으로 삼아 왔으나 게으름에 도리가 없다. 남보다 방제 횟수를 줄이고 약의 농도를 옅게 만든다. 친환경도 부지런해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 만으로 작물을 키우는 고집을 피운다. 노랗게 속이 꽉 들어찬 불암 배추 수확을 목표로 웃 거름 준비도 해야지. 가족이 먹게 될 가을 김장 배추 수확을 기대하며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텃밭으로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