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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명 |
봉산사 전경(시조님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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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제일-음력 3월 10일 |
소재지 |
진주시 상봉서동 8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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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봉산사는 진주강씨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곳이다. 고려 광종(950년 경) 때부터 사당이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 1570년(선조 3) 진주 봉곡촌에 사당을 건립하고 봉산사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1592년 임란 때 왜적의 분탕질로 소실되고 120년 후인 1714년(숙종 40) 대봉산(지금의 비봉산) 아래 봉산사를 중건하였다. 1802년 (순조 2) 다시 화재로 소실, 1911년(융희 11) 봉서동에 다시 봉산사를 지었지만 왜정의 탄압 으로 사당이 폐쇄되고 사당터가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1921년 사당터를 다시 매입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1940년 왜정의 토지수용령으로사당을 봉지(지금의 가매못) 옆 옛날 봉바위가 있던 자리로 이전되어 지금의 봉산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남아 있었다.(아래 1950년 대 봉산사 참조) 1975년 호암 강계중(姜桂重) 전 회장이 거액의 사비를 희사하고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83년 12월 20일 준공하였다. 봉산사 좌측에 있는 대봉사는 해군대장 강기천(姜起千) 전회장이 앞장 서서 중건하였다. 강계중 선생 사적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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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명 |
봉산사 |
사적명 |
1950년대의 봉산사 |
소재지 |
진주시 상봉서동 871-1 | ||
연락처 |
진주강씨대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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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명 |
봉란대(봉알자리) | ||
소재지 |
진주시 상봉동동 911-1 | ||
교통편 |
봉산사에서 도보 10분 거리 | ||
사적명 |
시조님 사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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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비봉산(飛鳳山)은 옛날에는 대봉산이라 했는데 여기 에는 진주 강씨 가문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다. 이 마을에 는 봉황을 닮은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날 이곳을 지나가던 한 도사가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을 쳤다. 고려 인종 22년, 당시 대표적인 문벌이었던 경원 이씨는 오랫동안 외척이 되어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다. 강씨 가문이 번성하는 것을 달갑잖게 여기던 이자겸이 무신 척준경을 시켜 왕에게 "강홍(姜洪)의 형제 일당이 반정을 도모하니 속히 조처하십시오"라고 간언하였다. 이때 강홍 선조님 등 일족 20여 명을 참살을 당하 였다. 뿐만아니라 이자겸은 아들 이지원을 시켜서 봉바위를 깨뜨리게 하니 봉알처럼 생긴 바위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산의 이름도 본래 대봉산이던 것을 "봉이 날아갔다"는 뜻으로 비봉산이라 부르게 했다. 또 산 아래에 있던 호수 "봉지(鳳池)"를 "부지(釜池;가매못)"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니, 봉황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진주 강씨 가문은 한때 주춤하였다. 만들라"고 점을 쳐 후손들이 알자리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봉곡마을 "봉란대(鳳卵臺)"로, 주민들은 "봉알자리"라고 부른다. 그후 고려 말부터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고 특히 문경공(휘 군보) 의 두 아들이 모두 재상에 오르고 손자 3명이 문과에 급제하여 임금의 부마가 되는 등 고려말 명문 가로 거듭나 우리나라 6번째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의하면 [임유관 전역(전쟁)]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채호(申采浩): 독립운동가, 언론인,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별세했다.
597년 고구려 영양왕 8년 ◇5월 고구려, 수에 사신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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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문제 "순순히 타이르니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다음 17년 동안 풍년이 들고 군대가 넉넉하자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국서 (외교문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있었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 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 것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사람으로서 그 천성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 조공하였으나 비 록 번부(藩附 티베트 지방)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 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등용치 아니하고 신첩(臣妾)으로 만들고 짐에게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에는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가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 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 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요수(遼水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長江 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 드리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지만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 왕이 스스로 깨닫 기를 바란다." |
"붓으로 대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해야"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몹시 노하며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답할 글을 의논하였으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와 같은 모욕적이 고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글이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왕이 쾌히 따르며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 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예(濊:수나라 역사책에서는 말갈) 군사 1만 명으로 먼저 요서(遼西)를 침공하여 수나라 병사를 유인하며, 글안병 수천 명으로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 사이에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姜以式 3글자도 보이지 아니한 것은 수나라 역사책만 뽑아서 기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운해(大東韻海)라는 책에는 강이식을 살수 전쟁 때에는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병마원수(兵馬元帥)라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않다. 그러나 살수전쟁 에서는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가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병마원수라 하면 몰라도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 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쫓아 강이식은 병마원수라함이 옳다. (이 부분은 단재 선생이 두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참조하지 않았기 때문 에 생긴 오류인 것 같다. 왜냐하면 강이식장군이 임 유관 전투에서 병마원 수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14년 후에 발발한 살수대첩에서 병마도원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병마도원수가 옳다) |
598년(무오) 영양왕 9 ◇2월 고구려, 말갈병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 ◇수,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대패하여 돌아감 |
[임유관 대첩] 이듬해(598년) 고구려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 (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으로 유인하기 위해 거짓 패하니 수나라 문제가 30만 명 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대총 관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주라후를 수군총 관으로 삼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평양을치려한다고 소문을 내었으나 실은 군량미를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로 들어와 30만 양량의 대병에게 군량을 대어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바다 가운 데로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바다에 나아가 주라후를 맞아 양선을 완전 격파한 다음 군사에게 성벽을 지키고 싸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수나라 병사들은 양식이 바닥이 나 굶어죽고 6월에 장마를 맞아 질병으로 사망 자가 낭자하여 퇴군하자 강이식이 이를 임유관 상류에서 추격하여 수나 라 병사를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고 개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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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해 다시는 출병치 않아 <수나라 역사책>에서는 [양량의 군사는 장마철 에 질병을 만났고, 주라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군량미를 보급 받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퇴각 할 때 사망자가 10중에 9라 하여 자연의 불가항 력에 의해 패한 것이요 고구려 군사에 의해 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체면을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이니 임유관 전쟁 은 물론이요 살수전쟁의 기록도 이 같은 춘추필 법으로 기록한 것이 많다. 여하간 임유관 전쟁 이후에 수나라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출병치 않았다. 두 나라가 휴전 조약을 |
용어 해설 *건무:영양왕의 이복 형제로 다음에 영류왕이 되었다. *요서총관:요서지역 사령관 *한왕:황제 아래 지역별로 왕을 두었다. *행군대총관:보병총사령관 *수군총관:해군사령관 *춘추필법:중국의 체면을 위하여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실은 적지 않는 필법 |
맺고 상품 무역을 재개하여 10여 년 동안 양국 사이에 싸움이 없었다. 604년에 수나라 문제가 죽고 양제(煬帝)가 즉위 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어 각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였다. 607년 양제는 마침 돌궐에 와 있던 고구려의 사신에게 "고구려의 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出巡:침입한다는 뜻) 할 것이다"라고 야유했다. 612년 11월 동양 역사 이래 일찍이 없던 1,133,800명의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양제는 살수대전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로써 양대 전쟁 인 [임유관], [살수]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는 결국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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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년(영양 16) ◇한왕(漢王) 양(諒), 난을 일으킴 613년(영양 24) ◇4월 수양재 재차 고구려에 침입, 우문술 등이 공격했으나 실패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시조님의 사적이 실려 있다 국내에서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역사책에서는 [임유관]에서고구려 군사 가 수나라 30만 대병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은 기록하면서도 마땅히 그 전쟁에서 고구려 군사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가 아니다. 필시 이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고구려 군사를 지휘한 장군이 있었을 터인데 이 부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온당 치 못하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서만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 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 장군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
612년 임신 영양 23 ◇7월 고구려 을지문덕, 살수에서 수군을 섬멸 |
시조님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고구려 병마도원수(지금의 합참의장)가 되어 살수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왕의 동생 건무(建武)가 바다를 맡고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다.<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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