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호호 할머니
어머니는 성품이 긍정적이고 인정이 많아 동네 사람들에게 ‘호호 할머니’라 불렸다.
지혜롭고 공평한 처사로 주위에 적이 없는 분인데 젊은 시절에 유독 큰 며느리에게만 가혹하게 굴었다. 예를 들면, 더운 여름날에 형 대신, 형수에게 먼 친척 결혼식에 걸음마도 못 뗀 조카 둘을 데리고 다녀오라는 지시부터, 지내지 않아도 될 제사를 억지로 모시는 일까지 내가 봐도 어머니는 형수에게 부당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장례 준비를 해야겠지?”
술이 몇 잔 들어간 형이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얘기하자 그제야 분위기가 침통했다.
“이참에 아버지 유골도 수습해서 화장하여 어머니와 합장하려 한다. 네가 아버지 묘소 이장과 봉안당을 책임지고 알아보거라.”
형의 말에 나는 잘되었다 싶었다.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사는 마을의 봉안당으로 모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나 집에서 자고 내일 그곳에 갔다 오겠습니다. 마침 저녁에 마을 공연도 있고 해서요.”
공연 말이 나오자 누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노래하는 거냐? 한 번 뛰면 얼마 받는데? 쯧쯧. 그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지금쯤 사무관은 안 달았겠나? 어쩌자고 대책도 없이 뛰쳐나와서 그런 고생을 하냐?”
나는 별달리 할 말이 없어 시켜놓은 회만 꾸역꾸역 먹었다. 형 옆에 앉은 형수도 별 할 말이 없는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까지 있을 줄 알았던 형수는 서울로 가고, 나는 내가 사는 마을로 되돌아왔다.
지난 기억이 아슴아슴하게 떠올랐다.
중2 때부터 대학가요제를 목표로 기타를 잡고 연습하던 철부지였지만, 학창 시절에 공부는 곧잘 했다. 대학 졸업쯤, 가망이 없는 음악 활동은 접어 두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 총무처 주관 교정직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는데 면접 때까지 나는 그 직종을 교화를 의미하는 교정(矯正) 대신, 글자 고치는 교정(校正)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일 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땅이 꺼질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다음에 시험 본 게 B 시의 지방직 공무원이었다. 앞서 밝힌 대로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수학은 잘했으니 거뜬하게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면접이 있던 날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내게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아버지께 내가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붙었다고 하자, 당신은 빙긋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직장생활은 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성격을 가진 나로선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가졌지만, 나는 아버지와 형과 마찬가지로 오십 초반에 직장에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 길로 나는 가족을 데리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C 군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왜 정년이 십 년이나 남은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섬’ 같은 도시의 소비적이고 배제적인 인간관계와 배타적인 생활에 염증을 느껴 주체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하는 멋진 말 대신, ‘그냥’, 하고 대답했다.
이후, 나는 약간의 연금으로 시골에서 그냥 음악 활동에만 매진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부족한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비를 벌기 위해 인근 병원에 다녔다. 아내는 B 시에 있을 때 중견 병원의 수 간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