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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묵상글 들 ( 성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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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성주간 동안 펼쳐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극적인 사건들에
하루하루 동참하는 가운데,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닥쳐올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우리가 죄에서 구원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는 아름다우면서 슬픈 예감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됩니다.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는
감사와 우정의 선물로 식사를 마련합니다.
특별히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바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척 자선을 내세우지만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비열한 속내를 드러내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소름 돋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이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시려는 예수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향유는
거룩하신 분의 죽음을 준비하는 도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도유의 궁극적 의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에게 그분께서 부어 주시는 영’ 곧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의 탐욕은 생명의 소중함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탐욕에 빠지면 성령을 간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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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예수님의 "시간"을 아름다운 일화로 준비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로 가셨다 ...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다"(요한 2,3).
라자로네 삼 남매가 모두 등장합니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눕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다가올 예수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도유를 하지요. 완전한 숫자인 3. 셋은 지금 아는지 모르는지,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를 앞당겨 치르는 중입니다.
희생될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신랑이시고, 죽음을 경험했다 되살아나 예수님과 같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라자로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할 하느님의 자녀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관상가인 그녀는 영문도 모르면서 사랑이 시키는 일을 합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2,3).
유다에 의하면 그녀가 준비한 순 나르드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일꾼의 300일 품삯이니 요즘으로 치면 일년 연봉에 가깝겠네요. 보통 사람이 한 번에 써버리기엔 큰 금액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요한 12,7).
가난한 이들을 들먹이며 낭비를 운운하는 유다를 예수님께서 만류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사랑이 제 길을 가게 그저 내버려 두어라, 사랑이 원하는 일을 하게 그냥 놔두어라, 사랑을 막지 마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도 못 말리신 사랑에 목숨을 던지셨지요. 그 이전에 하느님도 사랑 때문에 상처 받고 훼손되고 버림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약하게 마련입니다. 원래 강한 줄 알던 사람도 사랑하게 되면 초라해지고 실없어지고 바보가 되는 이치입니다. 사랑은 이렇듯 다 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제 존재를 아낌없이 성큼 베어내고도 아픈 줄 모르고 아까운 줄 모르는 신비입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예수님 장례 때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가 백 리트라의 향유로 예수님 시신에 예를 갖추지요. 오늘 마리아는 제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하여 사랑의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향유는 사랑입니다. 아낌없이 퍼붓는 사랑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입니다. 성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랑스러움과 기대가 가득합니다.
이 대목에 가만히 머무릅니다. 주님을 지칭하는 "그"가 어느새 "너"로 바뀌어 들립니다. "너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 내가 너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 각자에게 품고 계신 사랑과 자랑스러움과 기대가 느껴지십니까? 말씀은 성자의 수난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주님의 파스카에 함께할 자격과 권한을 부여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이신 하느님께 길을 터 줍시다. 사랑이 원한다면 작은 머리와 좁은 가슴으로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사랑이 이끄는 대로 따라갑시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을 섬기기도 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위로해 드리기도 하고, 사랑을 쏟아 흡족하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대하시는 벗님, 저마다 주님의 파스카에서 제 몫을 다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갑시다. 지금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은 천상 혼인 잔치에서 완성될 씨앗입니다. 그 씨앗을 좋은 마음에 밭에 뿌리고 물을 주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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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를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12,7)
성주간 둘째 날인 오늘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죽음에서 일으켜진 라자로가 살고 있는 베타니아에서 일어났는데,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향유는 '한 리트라'(320그램)의 양으로, '삼백 데나리온', 약 1500만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행위에 대해 복음은 예수님의 장례와 연결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극진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인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는 선택된 메시아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이사42,6-7)
마리아는 오빠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메시아의 사명이 드러나는 큰 사랑 체험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극진한 사랑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성주간이 시작되었고, 교회 전례 안에서 정점(頂點)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위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값비싼 선물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어하실까?
한번 그 선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 선물을 잘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하느님께 큰 사랑을 드리도록 합시다!
'회개의 사랑!'
'회개의 선물!'
나도 살리고, 너도 살리고, 우리 모두를 함께 살리는 나의 작은 회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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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김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넉넉한 사랑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오늘 독서는 야훼의 종에 대한 노래입니다.
야훼의 종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주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주님의 영을 지닌 사람답게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제 생각에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사랑을 하고,
심지어 남을 괴롭히고 폭력을 하는 사람도 사랑을 합니다.
요즘 데이트 폭력이란 신조어가 나왔고 그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말이 새로 나왔을 뿐 옛날에 없었던 폭력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데이트 폭력이란 사랑하는 젊은 남녀 간의 폭력만이 아니라
모든 사랑하는 사람간의 폭력의 일종일 뿐이고
옛날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사랑의 폭력>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폭력이란 사랑을 하는데도 사랑에 동반되는 폭력이며,
그래서 폭력적인 사랑인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이가 좋은 사람이기를 또 잘 되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다그치기도 하지만 내가 도와주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되어 갖은 애를 쓰고 기도도 해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잘 되지 않을 때 사랑이 폭력으로 바뀝니다.
이것을 일컬어 저는 사랑의 폭력이라고 하는데
이 사랑의 폭력에는 미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적인 폭력이 있고
희망 고문이나 실망 또는 우울감과 같은 심리적인 폭력도 있으며
이런 감정적 심리적 폭력이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야훼의 종은 이런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우리는 부러진 갈대를 다시 세우려고 갖은 애를 쓰고 깜박거리는 불을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그리 되지 않으면 실망감 때문에 아예
꺾어버리고 미움이나 분노 때문에 아주 꺼버리는 폭력을 저지르곤 하지만
그분은 싹이 빨리 올라오지 않는다고 잡아빼지 않고,
빨리 먹으려고 익기도 전에 과일을 따지 않으며,
알이 빨리 부화되지 않는다고 껍질을 깨지 않습니다.
급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줄탁동시의 사랑을 합니다.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줄이나 탁 모두 껍질을 쪼아 깨는 것인데
줄啐은 병아리가 알의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이요 탁啄은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것으로서 줄과 탁이 동시에 이뤄져야 병아리가 제 때에
껍질을 깨고 건강하게 밖으로 나오게 되는 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기다리다 지치고 애쓰다 지쳐 숨 끊어지기 전에 빨리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게 되거나 포기하게 되지만 야훼의 사랑은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충만함은 내 자식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기를 살리는 어마어마하고도 공정한 사랑입니다.
저 같은 사랑은 한두 사람 보살피기도 힘겨운데 야훼의 종의 사랑은
모두를 공정하게 보살피고도 넉근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야훼의 종의 사랑은 하는 사랑에서만 넉넉치 않고 받는 사랑에서도
넉넉하여 오늘 주님은 마리아의 사랑을 넉넉하게 받아주십니다.
소용 가치를 따져 마리아의 사랑을 꺾지 않고 그가 사랑할 수 있게
그의 사랑을 넉넉히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본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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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이영근 신부님.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 12,5)-올리베따노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메시아의 도유나 집주인의 환대를 나타내지만,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행위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 드린 것은 그의 헌신적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온 집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스카리옷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 12,5)
그 향유의 금액을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이는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돈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겼지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곧 떠나시게 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보다 더 비싼 향유가 있었더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경제적 효율성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죽기까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사랑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으뜸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일종의 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합니다. 참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앞세우지 말라!”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동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여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얻고 물질을 버리는 마리아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물질을 얻고 예수님을 버리는 이스가리옷 유다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고 있는가? 복음의 가치를 따르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물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내내 토록 취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집안에 가득 퍼진, 그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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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성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섬김의 지도자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어찌되었든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공식적인 지도자임을 상징하고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받게 되는 데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통치가 아래에서 위로향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누르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으로써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공간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요즘 보세요. 정치꾼들을!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양 기뻐해서야 되겠습니까?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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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성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2-3).”
복음서 저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일을 전하면서,
라자로와 마르타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한 일만 기록했어도 되는데, 왜 라자로와 마르타도 언급했을까?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가 한 일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라자로가 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은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대접을 받기만 한 것으로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입니다.
라자로가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은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타가 한 일은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든 일입니다(루카 10,40).
그렇게 시중을 드는 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마리아는 루카복음 10장에서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으로 나오는데(루카 10,39),
요한복음에서는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은 평소에는 ‘말씀을 듣는 것’이었을 텐데,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하던 것과는 다른 특별한 일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한 일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바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을 것이고, 고민 끝에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는 일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만으로는 마리아가 왜 그런 방식을 선택했는지,
마리아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마리아는 자기 나름대로 최고의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그 마음을, 또 그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4-6).”
유다가 말한 향유 값 ‘삼백 데나리온’은 아마도 당시의 실제 가격이었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삼백 명의 품삯이 되기 때문에 거액의 돈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보지 않고,
마리아가 사용한 돈만 보았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돈만 밝히는 사람의 눈에는 돈만 보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마태 26,8-9), 마르코복음을 보면, ‘몇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4,4-5).
유다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다처럼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유다는 거액의 돈을 낭비한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을 비난합니다.
유다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그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고,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복음서 저자는 설명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그 돈을 가로채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향유를 사지 않고 ‘삼백 데나리온’을 그냥 예수님께 드렸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돈을 ‘돈주머니 담당자’인 유다에게 주셨을 것이고,
그러면 유다는 그 돈을 가로챘을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인 요한 사도의 생각입니다.
요한 사도는 유다가 공금을 자주 횡령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을 텐데,
왜 ‘돈주머니 담당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유다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 여자의 나에 대한 사랑과 마음을 본받아라.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꾸준히 하여라.”입니다.
성주간 전례와 부활절 전례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특별한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일이냐고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안에서
두 일은 사실상 하나의 일이고, 양쪽 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리아가 이웃 사랑 실천을 외면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만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아마도 마리아는 분명히 평소에 늘 이웃 사랑 실천을 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감하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특별한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 일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의논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자기 돈으로 산 것일 수도 있지만,
‘가난한 이들’이 조금씩 모아서 마리아에게 준 성금으로 산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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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
무척이나 마음이 심란하실 예수님을 위해 오늘 우리가 그분께 드릴 위로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라자로 소생 사건 이후 예수님을 향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미움과 증오는 한층 증폭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의 그분을 향한 사랑과 존경 또한 증폭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소생 사건의 당사자인 라자로와 그의 누이 동생들, 마르타와 마리아였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오빠 라자로의 소생 사건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부터 예수님을 크게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에게는 다른 모든 대상들이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 그분만이 삶의 의미요 전부가 된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의 순간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에 위치한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합니다.
다들 기뻐했겠지만 마리아는 뛸듯이 기뻤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가슴이 설레다 못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을 것입니다.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즐겨 경청하던 마리아는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뵐 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연유로 마리아는 식사 중이신 예수님 발치로 다가가 깜짝 놀랄 행동을 시작합니다.
당대 비싸기로 소문난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들고 와서는 예수님 발에 부었습니다.
나르드 향유는 나르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해 만든 것으로, 주로 왕실에서나 사용하던 고급 향유였습니다.
한 리트라는 330그램 정도인데, 당시 가격은 3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3~4천만원은 족히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돌발 행동 앞에 에수님께서는 꽤나 당황해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공개석상인데다가, 한 여인이 한 남자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위는 통상적인 것이 아닌지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해서 엄청 거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서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풀어 그분의 발에 묻은 기름을
정성껏 닦아드렸습니다.
아마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너무나 껄끄럽고 거북한 나머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줄행랑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보편적이지 않은 행동 앞에서도 그저 묵묵히 앉아계셨습니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가만히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마음, 의도를 정확히 읽고 계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는 행위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향한,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 내 목숨과도 같은 사람을 향한 마지막 선물이 마리아의 재산 목록 1호 순 나르드향 1리트라였던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순 나르드 향유는 머지 않아 드러날 예수님의 거룩하고 존귀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에 의해 이루어진 순 나르드 향유 부음이 당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장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그 누구도 대신 겪을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의 순간을 예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니다.
무척이나 마음이 심란하실 예수님을 위해 오늘 우리가 그분께 드릴 위로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떠나가시는 예수님, 홀로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예수님을 위한 우리의 봉헌은 무엇입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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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
부부의 관계는 그 부부의 부모와의 관계의 연속이다
지구는 인간의 절제되지 못한 생활방식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전 세계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섭씨 2도 내로 기후를 안정시키자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이 협약으로부터 탈퇴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자신은 미국의 대통령이지 전 세계의 대통령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참으로 미국을 사랑하는 대통령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냥 느낌만으로 말하자면, 왠지 재선을 위한 자신만의 이익을 목적으로 미국인들을 이용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더 큰 무엇을 사랑하지 못하면 더 작은 것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란 확신 때문입니다.
태양이 자신이 빛을 줄 대상을 고려하며 뜨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대상을 가릴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제 나라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누군가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 그 자녀의 배우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술을 잔뜩 먹여보고 주사가 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건실하게 살아왔는지를 조사할 것입니다.
만약 저라면 그 사람이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볼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하는 모습이 결국은 결혼하여 나의 자녀에게 하게 될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갈 사랑까지 나의 자녀에게 쏟을 사람이 있을까요?
부모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누구도 사랑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일 것입니다.
부모만큼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가져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 발을 닦아드립니다.
3백 데나리온이면 약 3천만 원 정도 하는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가리옷 유다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렇게 충고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만약 누군가 성당에서 어느 액수의 돈을 봉헌할 때, “성당에 내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주는 게 낫다.”라고 말한다면 참 이웃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보일까요?
이는 부모에게 줄 것을 차라리 자녀들에게 주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신 분께 아깝다면 이웃에게도 아까운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짐짓 이웃사랑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려 했던 가리옷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생각한다고 하느님께 아까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에게 대한 사랑이 없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여름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더워서인지 아무도 그 사고에 관심이 없었고 빨리 사고가 처리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도 내려서 길 위에 떨어진 사고 잔해를 치우고 차 안에 다친 운전자를 보기는 했지만 전화로 신고만 하고 그냥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나의 부모님이었다면? 만약 나의 형제였다면?’
그렇게 보였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정 없이 배우자와 함께 살다가 나이가 들어 자신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할까요?
부모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 부모에 대한 연민과 겹치면서 배우자가 다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배우자가 더 미워질 것입니다.
먼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해 준 사람입니다.
먼저 그 사랑을 이뤄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하늘을 사랑할 수 없으면 땅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할 수 없으면 자신의 나라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할 수 없으면 자신의 가족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고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생명까지 주신 그리스도께 무언가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 아까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사랑으로 줄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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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새벽을 열며. 성주간 월요일. 빠다킹신부님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미사가 마치 치러야 하는 일처럼 느껴지게 되었고, 졸다 깨기를 반복하는 등 성의 없는 미사 봉헌이 이루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미사의 은총을 잘 느끼지 못한 채,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자마자 매일 했던 미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새로운 분위기에서 새로운 삶으로 제 모습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수해복구 작업으로 인해 주일미사에 세 번 연속 빠지게 된 것입니다(아마 코로나 19로 인해 요즘 미사를 하지 못하니 여러분들도 그 기분을 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세 번 연속 빠지고 나서, 4주째에 참석하게 된 주일미사는 제게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성체에 대한 굶주림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지요. 이제까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까지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은총이고 축복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살았다고 상을 받으러 미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약을 받으러 갑니다.”
미사가 길고 짧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론이 재미있고 재미없고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내게 필요한 양식과 약을 받아 모실 수 있느냐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와 이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유다가 나옵니다. 유다는 신심을 가장하며,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그분 목숨에 매긴 값보다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돈 30닢에 예수님을 넘깁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은은 세켈이라는 단위로 사용했습니다. 1세켈이 은 10g으로 4일 품값인 4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은 30닢은 40세켈로 현재의 화폐단위로 계산하면 1,200만 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향유는 3백 데나리온. 바로 3억 이상의 가치입니다.
마리아는 3억 이상의 향유를 붓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주님을 귀하게 여겼고, 유다는 1,200만 원에 기꺼이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섬기는 일을 제쳐 놓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즉,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필요한 양식과 약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 다른 것이 늘 먼저는 아니었을까요? 세상 것을 더 값진 것으로 여기면서,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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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삶은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것,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 우리 안에 있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의 악보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악보를 해독해야 하고 거기에 가사를 붙어야 합니다(엠마누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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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해!!!
어렸을 때 책상에 줄을 그어 놓고 “넘어오면 알아서 해!!”하며 싸우곤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 줄을 넘으면 내게 커다란 손해가 있는 것처럼, 불합리하다며 실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이 어떻게 보입니까?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보입니까? 아니지요. 너무나 유치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경계를 벗어던지지 못합니다.
제가 있는 강화에서 북한까지의 거리는 아주 가깝습니다. 강화 읍내에 있는 북문에 올라가도 북한이 환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가까운 곳을 갈 수가 없습니다. 경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을 갈라놓은 경계로 인해 인간은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봅니다. 인간들이 만든 이 경계선을 지킬까요? 그 어떤 새도 이 경계선을 지키지 않습니다. 무심히 넘나들 뿐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왜 경계를 만들어서 불편하게 살지? 정말로 유치해!!!’
불편함을 알면서도 이 경계를 풀지 못합니다. 이 경계로 아픔이 생기고 발전을 더디게 해도, 다르면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경계를 더욱 굳건히 합니다.
새보다 못한 유치한 인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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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성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뜻합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러주었고,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영광스럽게 생각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 기독교(基督敎)입니다. 한국에서는 개신교회에서 주로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가톨릭은 천주교(天主敎)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은 1784년 중국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은 천주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한국은 자연스럽게 천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국처럼 ‘왕’을 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했고,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다음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자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자입니다. 기름부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왕으로 택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마에 도유를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징입니다.
오늘은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한 여인이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께 발라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여인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제자들과 예수님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름은 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위한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계속 있지만, 예수님의 장례는 한번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인식하셨습니다. 기름부음 받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고난의 잔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기름부음 받는 것은 영광과 승리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는 것은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 수난 성주간을 지내면서 고통 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만이 우리 모든 삶의 고난과 역경을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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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모든 사람을 공경恭敬하라 –주님의 종-
저는 대죄大罪를 딱 둘로 봅니다. 절망과 무시입니다. 자기에 절망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주님의 종들이라면 결코 절망이나 무시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 화답송이 참 신선하여 평생 화두로 삼고 싶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27,1ㄱ)
이 고백 그대로 믿고 살 때 절망과 무시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참 많이도 강조한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 절망이 죄”라는 말마디입니다. 자포자기 절망은 하느님도 도와 주실 수 없습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 하십니다.
절망과 더불어 남을 무시, 경멸하는 것도 대죄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라는 병은 급기야 자살에 이르고, 극도의 무시와 경멸은 타살에 까지 이르게 합니다. 얼마전 분도 규칙을 공부하던중 성규 4장8절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
존경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공경입니다. 단지 믿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경의 대상입니다. ‘공경恭敬’은 영어로 하면 ‘honor’이고 사전을 찾아보니 ‘공손히 섬김’이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공손히 섬기는 공경입니다. 이 대목에 대한 주석도 참 아름답고 신선했습니다.
-공경은 찬미이상이다. 공경은 찬미보다 더욱 내적이다. 공경은 존경을 넘어선다. 타인을 공경함은 타고난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경의 중심에는 깊은 겸손의 감정이 있다. 공경은 참으로 공경받는 자를 자유롭게 한다. 공경 자체가 보상이다. 공경없이는 진정한 사랑도 없다. 무시는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반면 타인을 공경함은 친밀한 관계를 북돋운다. 우리가 타인을 공경하면 할수록 그들도 타인을 공경한다. 공경은 진리의 기초다.-
주석중 극히 일부만 나눴습니다만 참 풍부한 내용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인터뷰 한 대목에서, “우리는 진화의 우연하고 무의미한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열매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원하셨고, 사랑하셨고, 필요로 하셨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공경의 기초입니다.
갑자기 제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제 어머니는 아버지를 참으로 공경했습니다. 두분이 다투거나 싸우는 적은 거의 본 적이 없고 단 한번 싸우는 적을 본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안방에 아버지는 윗방에서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싸움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원망하는 말을 해도 어머니는 결코 제 편을 들어주시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아버지를 두둔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네가 어디서 나왔니? 아버지는 싫은 말 하나 할 줄 모르시고, 마음이 좀 모질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젊잖고 속이 깊은 분이시다.”
이 한마디로 제 말문을 닫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과 연관되어 떠오른 공경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보았고 자신의 신원을 찾았습니다. 바로 주님의 종이 예수님이심을 깨달았고 동시에 자기들의 신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주님의 종노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주님의 종, 예수님을 공경할 뿐 아니라 날로 닮아가야할 평생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내용은 얼마나 고무적이고 격려가 되는지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예수님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신원입니다. 이어 묘사되는 아름다운 주님의 종 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도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모두가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바로 주님의 종인 예수님의 모습이자 우리가 지향해야할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평소 얼마나 예수님을 공경하고 흠모했는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모습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름다운 대목의 묘사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이런 봉헌의 자세로 미사를 봉헌해야 풍성한 은총입니다. 마침 예수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마리아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무한한 공경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삼 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에 대해 몹시 아까워하는 유다의 반응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대로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 같은 장면입니다. 나는 마리아쪽입니까 혹은 유다쪽입니까?
마리아가 참으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꿰뚫어 알아 봤음은 물론 그대로 주님의 종을 닮았음을 봅니다. 마리아의 공경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예수님은 섬세한 배려와 존중의 사랑으로 마리아를 인정하시고 두둔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참으로 결정적인 순간 놓치지 않고 예수님께 향유를 통해 사랑을 표현한 마리아입니다. 돈은 다시 생길 수도 있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살아있는 사랑의 추억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요 시인인 이사야가 고백하는 ‘하느님 상’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입니다.
새삼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역시 외경의 대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종, 예수님께서 마음에 깊이 새겼을 다음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사랑의 관상은 낭만도 감상도 아닌 오늘 지금의 현실입니다. 사랑의 관상은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의 활동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관상의 완성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 예수님께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이사야 예언자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무지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시어 당신의 빛, 세상의 빛으로 파견하십니다. 이 은총의 미사시간 우리가 주님께 정성껏 봉헌하는 사랑의 향유로 향기 가득한 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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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6일 월요일 성주간 월요일 매일미사_전 진 도미니코 신부 집전
https://youtu.be/bke9jGQ0xAU
https://www.youtube.com/embed/bke9jGQ0xAU
2020년 4월 6일 월요일 성주간 월요일
Monday of Holy Week
전 진 도미니코 신부 (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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