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의 신(God of Carnage)
2010년 4월 6일 오후 8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제목만 들으면 왠지 너무 진지하고 어렵다 못해 졸릴 것 같은 느낌의 연극.
하지만 이 연극은 의외로(?) 코미디 작품입니다.
그것도 한국에서 정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아트(Art)>의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신작이라고 합니다.
<아트(Art)>의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신작!?!?!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재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모 아니면 도구나.....'
유명한, 혹은 인기있는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홍보의 측면에서 상당히 유리하기도 하지만 위험 부담도 적지 않습니다.
관객은 이미 작가의 유명세나 인기로 인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실망할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재 경험으로만 해도
'<라이어>의 작가 레이쿠니의 신작'이라는 말 때문에 보았던 <오! 브라더스>는 실망스러웠고
'앤드류 로이드 웨버'라는 이름 때문에 보았던 <Tell me on a Sunday>는 얼마나 참기 힘들었는지.
그런데 야스미나 레자의 전작 <아트(Art)>가 어떤 작품인가요?
2004년 학전블루 소극장에서의 공연 이후 객석 점유율 103%에 12만 관객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대학로 아트 열풍을 몰고 왔던 작품 아닌가요.
저도 캐스팅과 극장과 시기를 달리하여 다섯 번을 보았습니다.
권해효, 조희봉, 이대연 캐스팅의 첫 번째 공연이 가장 좋았고 그 이후로 조금씩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원작 자체가 지닌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만큼, '야스미나 레자의 신작'이라는 홍보 문구는
상당히 달콤한 사탕이자 상당히 허무한 공갈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마치 무슨 조소 작품 같은 배경에
차분한 파란색 바닥과 단정한 가구들, 그 사이 도드라지는 빨간 쇼파.
두 개의 쇼파는....
넓은 무대를 채우기 위함일 수도 있으나 두 부부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고.
파란색 바닥과 빨간색 쇼파는
냉정한 이성으로 억누르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솟구치는 감성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은 두 개의 쿠션과 커다란 네 개의 쿠션은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양쪽 집안의 두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억측인가요? ㅎㅎㅎ ^^;;
이 연극은 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알렝과 아네트의 아들 페르디낭이 미셸과 베로니카의 아들 브루노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립니다.
미셸과 베로니카는 아이들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알렝과 아네트를 집으로 초대하고.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소재가 참 재미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이들 싸움이 부모 싸움이 된다'는 것인데,
참 친숙한 이야기지요?
자식 사랑이 세계 그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넘쳐흐르는 한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도 얼마전에 저희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앞에 끼고 싸우는 아버지들을 보았구요.
친숙한 이야기라서 한국적으로 각색하면 더욱 좋지 않았겠냐는 (비공식석상에서의) 제 질문에,
각색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원작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로 각색을 하지 않으셨다고 답해주셨습니다.
사실 이름을 외우기 어렵다는 것 말고는 한국적 상황에 대입해도 하나도 어색할 것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아이들 문제로 모인 두 부부의 대화는 의논을 넘어 점차 비방으로 결국엔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하나씩은(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을
인간의 속물적인 본성을 투영하게 됩니다.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토의와 토론의 차이를 기억하십니까?
토의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집단 사고의 과정을 거쳐 어떤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논의의 형태이고
토론은 어떤 의견이나 제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뚜렷한 의견 대립을 가지는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의 형태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토론'은 거의 불가능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나와 같도록 바꾸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저 역시도 제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므로 거의 불가능한 과정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제 생각은 살면서 더욱 굳어졌지요.
이 두 부부 역시 처음 모인 의도는 '토의'였으나,
서로의 생각이 너무나 달라 애초에 '토의'는 될 수 없었고,
점차 '토론'으로 변해갔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자신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감정을 한껏 폭발시킨 후에야 진정이 됩니다.
한비야의 여행기 어느 부분에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오지의 사람들하고도 아무런 문제없이 의사소통이 잘 되는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넌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 듣냐''너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걸 보면 신기하다.
한비야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문제는 바로 '소통의 부재'입니다.
알렝의 분신처럼 나오는 '핸드폰' 역시 그러한 주제를 잘 살려주는 소재인데요.
박지일 씨가 연기하는 알렝은 가정보다 일이 먼저인 변호사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가 아니라
승소를 위해 약의 부작용까지 숨기려는 속물적인 변호사입니다.
그런 알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휴대폰입니다.
그에게 휴대폰은 '자신의 모든 인생이 들어있다'고 할 만큼 중요한 물건이지만,
그것 때문에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합니다.
전화기의 본래 발명 목적은 '소통의 원활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기가 휴대폰으로 발전하면서,
인간이 휴대폰에 얽매이기 시작하면서,
전화기는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아들의 일에 관심이 없는 남편에 대한 아네트의 복수가
'핸드폰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것은 꽤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아네트 역할은 서주희 씨입니다.
아네트는 조금은 무례한 남편의 행동 때문에,
그리고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들의 잘못 때문에 안절부절못합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속마음을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싸웠으면 둘다 잘못이 있다.
우리 아이가 가만히 있는 댁의 아이를 때렸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참 재미있었어요.
저는 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이런 상황에 처한 부모라면 아네트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아서요.ㅎㅎ
제가 본 서주희 씨의 작품은 2004년도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밖에 없는데요.
그 당시에도 같이 공연을 본 일행은 서주희 씨를 보고 '징그럽게 연기를 잘한다'고 했는데
그 끔찍한(?) 감탄은 이 작품에서도 유효했습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워낙 여러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작품이라
서주희 씨가 연기해낼 수 있는 캐릭터란 이미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데
<대학살의 신>에서의 아네트는 또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주희 씨의 실제 모습이 어떠한지,
(인터뷰 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만의 색깔이 없는 배우'라는 것은 '그 어떤 색깔도 될 수 있는 배우'라는 뜻이기에,
서주희 씨는 정말 훌륭한 배우이십니다.
아참, 그리고 이 공연의 깜짝 놀랄 '특수 효과'가 아네트를 통해 나타나니까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
베로니카 역할의 오지혜 씨.
저는 이번에 오지혜 씨의 작품을 처음 보았습니다.
딱딱 끊어지는 정확한 말투가 참으로 오지혜 씨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오지혜 씨 역시도 이 역할이 자신과 참 많이 닮았다고 하시네요.
평소에 스스로 생각했던 자신의 단점을 극대화시켜 표현한 인물이 베로니카라고요.
오죽했으면 이 대본을 먼저 읽어보신
오지혜 씨의 남편이 "몰래 카메라를 해놓고 당신을 관찰한 다음에 쓴 작품 같다'고까지 하셨다네요,ㅎㅎ
베로니카는 세계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아마추어 작가입니다.
베로니카는 말끝마다 '세계시민' 운운하며 이 사건에 대한 대화를 주도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폭발하고 맙니다.
이 역할 역시도 현대인의 모습을 잘 꼬집어 주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을 꾸미는 모습.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척하는 현대인들.
저는 정말 젠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요.
자신이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자신이 숨기고픈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기 때문이랍니다.
오지혜 씨가 이 역할에 관심을 가지신 것도,
제가 이 역할을 유심히 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요.
미셸 역할의 김세동 씨.
미셸은 자기 주장이 강한 아내에 눌려사는 남편입니다.
착하고 순한 남편을 잘 연기하신 것 같습니다.
베로니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순하게 살아왔지만,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하나둘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그것은 또 베로니카와의 갈등을 불러옵니다.
햄스터를 만지지도 못하는 순박한 사람이면서
그 햄스터를 길에 내다버리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네 사람의 갈등은 처음에 아이들을 둘러싼 부부 대 부부의 갈등이었으나.
점차 휴대폰으로 인한 알렝 대 나머지의 갈등으로 변하고
햄스터로 인한 미셸 대 아네트의 갈등으로 변하고
부부는 서로 뜻을 모아 상대방을 흉보다가도
갑자기 '당신, 왜 내가 아니고 저 사람 편을 들어?"라며 서로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수 많은 갈등 양상이 얽히고 섥히면서 그 안에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냅니다.
그들의 '지랄 같'은 하루는 어떻게 끝날까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아이가 없는 부모라도,
결혼도 하지 않은,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공연입니다.
<사진 제공: 신시컴퍼니 & 여행블로거기자단>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개요
공연일정 2010년 4월 6일 - 5월 5일
공연시간 화,목,금 8시 / 수 3시, 8시 / 토,공휴일 2시, 6시 / 일 2시
(단, 4월 11일 6시 공연 있음/ 4월 14일, 21일, 28일3시 공연 있음/ 월요일 공연 없음)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티켓가격 R석 5만원, S석 4만원, A석 3만원
출 연 박지일, 김세동, 서주희, 오지혜
스 태 프 극본 -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 번역- 임수현, 윤색- 고선웅,
연출–한태숙, 무대디자인 - 박은혜, 조명디자인- 신호, 의상디자인 - 안진환
제 작 신시컴퍼니
후 원 (재)대학로공연예술센터
관람연령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공연예매 1544-1555(인터파크), 1588-7890(티켓링크)
첫댓글 나도 이거 어제 봤어~~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ㅋㅋ
그러게요 언니... 번개가 뜰 줄 알았다면....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