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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5:1-21) 신앙의 방관자 효과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2.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5.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7.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8. 그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
10. 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1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오늘 시편 135편 말씀 중심으로 <신앙의 방관자 효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신앙의 방관자 효과’
'방관자'라는 말은 뉘앙스가 긍정적이고 좋은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과 '방관자 효과'라는 말이 영어로는 'Bystander effect'라는 말과 관련된 비극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1964년 3월 13일 새벽 3시 30분입니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20대 후반의 한 여성이 뉴욕시의 자기 집 근처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의 칼부림 앞에서 30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키티 제노비스의 비명소리가 인근 뉴욕 시에 있는 가정들을 깨웁니다. 한 집 한 집 불을 켜고 창문을 열고 제노비스와 강도의 칼부림이 번쩍거리는 그 사투의 현장을 무려 40가구가 목격하고 목격자가 38명이었다고 합니다. 38명의 목격자가 있는 가운데, 30분 동안 제노비스는 살인강도의 칼 앞에서 몸부림치며 사투를 벌이다가 온 몸을 칼로 찔려서 30분 만에 죽게 됩니다. 그러나 비명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불을 켜고 창문을 연 그 어떤 시민도 제노비스의 사투를 보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 전체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한 달리와 라테인이라고 하는 두 심리학자가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를 심리학적 측면에서 실험을 통하여 연구 조사하게 됐어요. 어떤 연구를 감행했느냐면, 집단 토론 명목을 내걸고 대학생들을 모았습니다. 2명, 4명, 7명의 단위로 그룹들을 만들었어요.
2명이 방에 들어가서 대화하는 방을 여러 개를 만들고, 4명이 들어가서 대화하는 방을 여러 개 만들고, 또 7명이 들어가서 대화하는 방을 여러 개를 만들었습니다. 각 방마다 미리 짠 조교를 하나씩 넣어 놓고, 대화를 하다가 그 조교가 아프다고 하면서 책상 위에 엎드러지는 설정을 하고 결과를 지켜봤더니, 2명씩 들어가서 1:1로 대화를 하던 방의 학생은 그 방의 85%가 다 뛰어나와서 ‘나와 대화 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 쓰러졌습니다.’라고 보고를 하는데, 4명이 들어간 방들에서는 62%만 나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7명씩 들어간 방들은 31%만 보고를 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보고 달리와 라테인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이상하게 사람과 목격자가 많을수록 보고가 덜 들어옵니다. 그 이유를 인터뷰를 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지만 남들이 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목격자가 많으면 책임이 분산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1:1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한 사람이 쓰러지면, 이 사람들은 85%가 뛰어나와서 보고를 하고, 4명일 경우에는 62%가, 7명이 들어간 방에서는 31% 밖에 보고를 안 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키티 제노비스가 살인강도에게 난자를 당할 때에 뉴욕 시민들이 불을 켠 다른 집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경찰에 신고하겠지.’라고 하면서 자기는 신고를 안 하는 동안에 키티는 강도의 칼에 찔려 난자당해 죽었다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방관자 효과입니다. 여러 명이 목격을 하고, 여러 명이 함께 있을 때, 오히려 책임이 분산 되면서 방관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걸 그 여자의 이름을 따서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아세요? 참 신앙이라면,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에요.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방관자 효과가 거꾸로 신앙에서는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5편은 그 내용이 찬양시인데 출애굽과 가나안정복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하심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2절에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라고 하는데 성전 뜰에 서있는 자들은 누굽니까?
4절에 나오는 특별한 소유로 택하신 자들입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은 성전 뜰에 서있게 됩니다.
'성전 뜰에 서있다'는 것은 1년에 세 번 밖에 안 되니까 실제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 먼 타향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했던 것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하십니다. 이 땅에 내려오시는 그 하나님을 함께 모시고 사는 자들이 바로 선민이라는 것이에요.
그 선민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뭐냐?
5절에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울타리 안에서 성경공부 시간이나 설교 시간에 하나님이 위대하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높으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워요. 그런데 실제의 삶에서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을 경험하는 자들이 바로 선민입니다.
예를 들어 돈 때문에 내 마음이 걱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이 제일 높으시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걱정에 사로잡히면 돈이 위대하시고 돈이 높으신 분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은 대학 못 들어갈까 걱정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면 학력과 학벌이 위대하신 것이고 높으신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분이 계심으로 해서 그분만 계신다면 어떤 것이 없더라도 내 마음에 걱정과 근심과 불만과 불행이 찾아오지 못해야 진짜 그 분이 높으신 것이고, 그 분이 진짜 위대하신 것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에요.
지금 이 시편의 노래가 뭘 말합니까? 출애굽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당시의 미국과 같은 나라였던 애굽이 하나님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선민들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애굽 전역이 초토화 되어버립니다. 무기 한 번 쓰지 않은 하나님의 활동이고 역사였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선민들이 보고 경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높으신 분이고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광야를 지납니다. 사막에서 사십 년을 살아남을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250만 명의 숫자가 사막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힘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시고 높으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속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에요.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 하나님이다.’라고.
내가 선택한 백성들의 삶에서 출애굽 때처럼, 광야 때처럼,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처럼 내가 활동하는 자요, 내가 역사하는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자, 그러면 이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요?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주어질 수 있어요. 건강 문제, 가족 간의 인간관계 문제, 부부 문제, 부모자식간의 문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문제, 직장에서의 문제, 돈 문제, 승진 문제 등 많아요. 잘 될 때도 있고, 못 될 때가 월등하게 많고 이런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뭘 말합니까? 진짜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 나타나는 효과가 뭘까요? 보세요.
2명씩 들여보낸 방에서 1:1로 대화를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가 쓰러지자 한 사람은 반드시 책임의식을 느끼고 뛰어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일들, 예를 들어 돈 문제, 자식 문제, 건강 문제, 인생의 미래 문제, 결혼 문제, 직장 문제 등의 1:1로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문제가 제대로 안 되면 내가 책임을 지게 되어있습니다. 둘만 있으면 그 일과 내가 1:1로 대면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앞에 놓인 일이 사람이건 과제건 결혼이건 사업이건 무엇이든지 간에 안 되면 내가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지를 않아요.
그런데 1:1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끼어들어 오셨습니다. 끼어들어 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사를 주관하시고, 그 문제를 대면하고 있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나의 미래와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람의 미래를 다 아시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면 그분이 주관자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내가 어떻게 한 걸음이라도 나댈 수가 있겠습니까?
내 일이 아니잖아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고백이었고 주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내 앞에 떨어져있는 문제가 참새 한 마리보다 더 큰 문제들이 대부분인데, 그 문제 앞에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봤다면, 진짜 선민이라서 성전 뜰에 서 있는 자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경험하고 있다면 내가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행동과 액션을 취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본 자라면 책임이 이전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 분이 주관자이시니까.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키티 제노비스가 강도에게 난자를 당할 때, 구경을 하고 있던 너무 끔찍한 그 현장, 비난의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그 방관자의 모습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자들에게서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주관자이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왜 이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고, 어떻게 발전되어야 하는지를 그 분만이 아시고, 그 분만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그런 하나님을 계시 받고 그런 하나님을 보고 그런 하나님을 만났다면 방관자 효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나쁜 놈이라고만 생각해요. 물론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짓을 했어요. 그러나 종교적인 용어들을 다 제쳐놓고 보면 가룟 유다가 누굽니까? 열심당 출신이에요. 열심당은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과 같은 자들입니다.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투사들이에요.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께서 일제에 항거하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게 뭐가 나쁩니까?
로마 식민지하의 민족을 사랑하며 분노를 느끼고 로마에 항거해서,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원했던 것이 가룟 유다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도대체 뭡니까? 그 많은 능력으로 죽은 자까지 살리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오천 명을 오병이어로 먹이시던 그 능력을 다 뒤로 하시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모습을 볼 때에 가룟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팔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에 대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키티 제노비스의 현장을 목격하며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느끼는 분노였다면 틀린 말입니까?
하나님의 선민이 이방 민족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온 자가, 민족의 식민지 상황을 수수방관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립니다. 자발적으로. 독립을 위한 어떤 운동도 하지 않고. 주님이야 말로 방관자 효과의 원형이십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감옥에서 잠을 잡니다. 내일이면 참수형을 당해야 돼요. 내일 목이 잘리는데 천사가 와서 내 옆구리를 차도 깨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을 자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큰 목회하고 이런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니에요. 그 잠이 내 인생의 목표예요.
베드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을 실제로 봤어요. 자기의 목숨을 주관하시는 분이 참새의 목숨까지 주관하시는 분이세요. 그러므로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누가 주관하겠습니까? 그 사실을 봤어요. 내일 참수형이 진행된다면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겁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에요.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 목에 대해서조차도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작은 문제까지도 내가 걱정하고 내가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질내고 우울해하고 불평하고 불만인 이유가 뭡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요. 선민답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당연히 책임 져야죠. 1:1로 있으니까. 내 인생의 삶의 문제들과 내가 1:1로 대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문제로 고꾸라지면 내가 책임져야지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러나 선민의 삶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개입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다고 나댈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책임지고 이 일은 잘 돼야 한다.’라고 정해 놓고 하나님 부르는 것은 이단입니다. 명심하세요. 이제 우리는 유보하지 말고 선언합시다. 이건 이단이라고.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방향을 정해놓고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는 이단들의 기도이고, 이방인들의 기도예요. 하나님을 보고 있기 때문에 선민이 이런 기도 못 드립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먼저 움직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나를 움직여 가시면, 그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여 갈 뿐이지, 어떻게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겁니까?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줍니까? 두 가지를 해줘요. 이 땅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방관자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내가 책임을 느끼고 달려든다는 이야기는 아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성이 우리를 그렇게 끌고 가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일어난 것이에요. 그 십자가사건을 통하여 이 땅에 대해서 죽고 방관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 옆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방관자가 되면 방관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눈에 보이는 이 땅에 대해서 죽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먼저 보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이 땅에 대해 죽지 않는 한 볼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 것이에요.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이 세상의 일로 마음이 덮여있어서,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없다는 것을 아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하십니다. 봐라! 십자가를 봐라!
십자가를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방관자가 됩니다.
모세가 민족의 노예상태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었을 그 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주님이 민족의 역사에 대해 방관자가 되셨을 그 때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 뒤에 하나님의 원자폭탄 같은 성령의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방관자가 있어야 이 세상일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을 느끼시고 움직이시기 시작하십니다. 내가 방관자가 되지 못하고, 내가 책임을 지고 나서는 한 하나님은 뒷전에 계실 수밖에 없어요. 진짜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싶으십니까? 방관자 효과가 나타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착각하면 안 돼요. 내가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내가 이 문제를 하나님을 불러서 하나님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것은 이단이에요. 하나님은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이 세상일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해주시는 방법론이 아닙니다. 해결사가 아니에요. 전적으로 주권자이시고, 전적으로 책임자이시고, 전적으로 사랑으로 내게 다가오시는 나를 선택해주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며 세상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본 자는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설 수 없으니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세상에서 혐오스러운 방관자의 효과가 신앙에서는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주권자이시고 책임자이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실제로 우리 삶에서 보고 함께 모시고 있다면, 그분 앞에서 절대로 내가 책임지며 먼저 나설 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먼저 나서도록 종용하고 강요하는 우리의 죄성이 죽게 하시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며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고, 진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진짜 하나님의 높으심을 경험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