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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명성지맥 종주기3
*지맥구간:산정호수주차장-여우고개-낭유고개
*산행일자:2011. 2. 20일(일)
*소재지 :경기 포천
*산높이 :여우봉620m, 사향산750m
*산행코스:산정호수버스종점-여우봉갈림길-안덕고개-여우봉-여우고개
-사향산-낭유고개
*산행시간:9시22분-17시20분(7시간58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회원10명
(24회김주홍, 이규성, 이기후, 우명길, 26회임종륜, 29회정병기, 유한준.
31회김성만, 37회장부순, 초대손님 박현출)
명성지맥 종주 길에 아주 가까이에서 군 사격장을 보았습니다. 지맥의 마루금이 사격장 안을 지나 이를 따르지 못하고 빙 돌아가면서도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은 것은 사격훈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간 군은 여기 사격장에서 실시되는 대규모 사격훈련을 매년 한 번씩 일반에 공개하고 언론이 이를 보도해왔습니다. 유사시에 대비해 평상시에 사격훈련을 철저히 해 두는 것이야말로 유비무환에 이르는 길입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반만년에 이르는 우리민족의 전쟁사에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사전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서도 전쟁에 패한 사례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반대로 아무런 사전대비 없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이는 극히 예외적인 천우신조의 결과임에 틀림없습니다.
방금 읽기를 마친 서애 유성룡선생의 징비록(懲毖錄)을 통해 다시 확인한 것은 국가안보에 유비무환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입니다. 선생은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라고 이 책의 첫머리인 자서(自序)에서 그 집필동기를 밝혔습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중심으로 하고 전란의 발단을 구명하기 위해 왜란 전의 일도 같이 기록해 놓은 징비록을 읽고 나서 조선이 임란에서 망하지 않은 것은 천우신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서장관으로 일본을 왕래한 명신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께 절대 일본과 실화(失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조선의 임금들과 조정신하들은 일본을 얕잡아보고 일본의 침략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조정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굳게 믿었던 신립은 명성과는 달리 장군의 자질이 충분히 갖춰진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천혜의 요새 조령을 버리고 늪지인 탄금대에다 배수의 진을 친 후 왜군을 맞아 싸우다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조선군이 허망하게 전멸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장수 이일 역시 명장이 아니었습니다. 상주에서 패전하여 충주로 달아난 이일은 적군이 선산에 이르러 가까이 왔다고 보고한 개령사람을 여러사람의 마음을 의혹시킨다고 목을 베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이 적의 척후병을 보고도 말을 하지 않아 조선군은 패하고 이일은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 모두가 조선은 물적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인적으로도 전쟁을 치러낼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임란 발발 한해 전에 선조임금이 서애 유성룡선생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정읍현감을 하던 종6품의 이순신을 정3품의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것은 정말 잘 한 일로 하늘이 조선을 도운 것입니다. 사간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수사로 임명된 장군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전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1년 동안 사전 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 결과 해전에서 대승했고 그 덕분에 호남의 곡창지대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아 조선의 패망을 막았습니다. 조선군이 육전에서 참패하고 해전에서 대승한 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침9시22분 산정호수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지난 달 강추위로 종주산행을 쉬어서인지 두 달 만에 만나보는 동창들이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북한의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산정호수는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여서 서울보다 기온이 3-4도는 낮은 것 같습니다. 주차장에서 등룡폭포를 거쳐 사격장까지 이어지는 계곡 길에 햇빛이 닿지 않아 대동강 얼음도 녹는다는 우수가 지났는데도 한 겨울의 냉기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등룡폭포가 빙폭 속에 가둬버린 궁예의 비화를 떠올리며 계곡 길을 올라 왼쪽 위로 팔각정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주차장 출발 50분이 다 걸린 이 길은 지난번에 하산한 길이어서 엄격하게 따진다면 지맥 길 이어가기는 이제부터라 하겠습니다.
10시18분 사격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팔각정갈림길에서 몇 분을 더올라가 군 텐트를 보았습니다. 사격장출입을 통제할 뜻으로 세웠을 텐트에서 머물고 있는 앳된 병사 한 명이 저희 일행을 보고도 길을 막지 않아 바로 위 사격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통제지역답게 억새가 무성하다 했는데 조금 더 올라가자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사격장이 눈앞에 전개됐습니다. 명성지맥 동쪽 너머로만 사격장이 있는 줄 알고 있었던 저는 이제껏 그 반대편의 계곡에 왜 흙탕물이 흐를까 그 이유를 몰라 많이 궁금해 했는데 이번에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팔각정을 지난 명성지맥의 마루금이 사격장 안의 안덕재를 지나면서 이 지맥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사격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나서야 등룡폭포로 흐르는 서사면의 계곡물이 흙탕물인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사격장 안을 가로 지르는 마루금을 따르지 못하고 그 앞의 시멘트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선 후 사람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 눈길을 힘들게 걸어올라 이동통신탑에 이른 시각이 11시14분이었습니다.
11시55분 해발620m의 여우봉을 올랐습니다. 한 주전에 올랐던 소백산에 쌓인 눈에 못지않은 많은 양의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덕분에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오르며 몸은 조금 힘들어도 마음만은 어느새 순백의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헬기장에서 동쪽 멀리 남북으로 내닫는 한북정맥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한북정맥을 같이 종주한 동문들과 함께 하나 하나 봉우리 이름들을 확인해 나갔습니다. 국망봉을 위시한 몇 봉우리는 해발고도가 천m를 넘어 멀리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눈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경기도 제 1봉인 화악산과 제2봉인 명지산도 같이 보여 반가웠습니다. 헬기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오르다 한참 후 다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 여우의 흔적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여우봉에 올라섰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래된 표지목이 봉우리 이름을 알려주는 여우봉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점심을 들고자 안부에다 자리를 잡았습니다.
13시50분 여우고개에 내려섰습니다. 이번 산행에 처음 참여한 한 후배가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호화로운 점심상을 차려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감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자 준비한 메뉴에 산에서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따끈한 어묵 국이 곁들여졌으니 이 정도면 성찬이라 할 만해서입니다. 13시7분 1시간 남짓 걸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오후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 편안한 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사 길을 내려가 여우고개를 조금 앞둔 묘지 근처에서 잠시 쉰 후 여우고개에서 78번 도로를 건너 넓은 시멘트길을 따라 직진했습니다. 몇 분 후 다다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마루금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삼거리로 되돌아오느라 십 수분을 까먹었습니다. 삼거리에서 눈이 녹아 질퍽한 큰 길을 따라 남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시멘트도로에서 조금 벗어나 왼쪽 위에 터 잡은 팬션 파인힐을 지난 시각이 14시7분이었습니다.
15시55분 해발750m의 사향산에 올랐습니다. 군부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시멘트도로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올라가는 임도는 북사면의 산허리에 낸 길이어서 응달이 진데다 짙푸른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곳도 있어 어둠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지맥 길은 임도에서 왼쪽으로 치고 올라 만나는 능선 길이 틀림없지만 힘들게 올라가봤자 군부대가 길을 가로막아 마루금을 이어갈 수는 없어 오른쪽으로 확 꺾이는 임도를 버리고 곧바로 산등성을 올랐습니다. 선두가 눈 위에 낸 길을 따라 힘들게 올라 군부대의 철조망 울타리를 만났습니다. 이 울타리를 따라 군부대를 오른 쪽으로 에돌아 부대 정문 앞 공터에 올라선 것이 파인힐 출발 1시간이 넘게 지난 15시15분이었으니 눈이 많이 쌓인 산등성을 오르내리느라 반시간 넘게 고생한 셈입니다. 명성지맥을 앞서 종주한 몇 분들처럼 여기 부대 앞까지 시멘트 길을 따라 걸었다면 몸은 편했겠지만 가는 겨울 마지막 눈길을 이번처럼 원 없이 걷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철원 벌에 우뚝 솟은 금학산과 고대산 줄기가 가깝게 보이는 부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깊숙이 내려갔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는 길이 이번 산행의 마지막 깔딱 길이었습니다. 깔딱 길을 올라 다다른 능선에서 군부대 울타리와 헤어지고 오른쪽으로 진행해 삼각점만 박혀 있는 사향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북쪽 방향으로 군부대가 들어선 730m봉이 내려다보이는 사향산에 오르자 국망봉을 남북으로 지나는 한북정맥이 참으로 늠름해 보였습니다.
17시21분 낭유고개에 도착해 3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사향산 정상에서 조금 더 진행해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는 중 길이 미끄러워 잠시 멈춰 서서 크램폰을 꺼내 찼습니다. 이내 내려선 평탄한 방화선 길을 따라 모처럼 느긋하게 걸었습니다. 먼 곳에서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명성산 자인사 부근의 웅장한 암벽과 꽁꽁 얼어붙어 마냥 초라해 보이는 산정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는 벙커봉우리인 670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미끄럽고 질퍽한 길을 내려가며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다보니 생각보다 하산 길이 힘들었습니다. 차 소리가 가깝게 들려 낭유고개가 멀지 않겠다 싶어 크램폰을 풀었는데 여전히 길은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낭유고개가 가까워지자 다음번에 오를 차도 건너 관음산이 꽤 높아 보였습니다. 일행에 물어 고도를 확인해본 즉 해발733m로 사향산과 별반 차이나지 않아 다음 종주산행도 초반부터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330번 도로가 지나는 낭유고개에 도착해 대기 중인 음식점 차에 올라 이동으로 옮겼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산행대장을 맡은 막내 기수의 한 후배와 오로지 카페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해 동참했다는 또 다른 후배의 성공적인 산행을 축하하며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조선이 사전대비는 못하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제때 고쳤다면 병자호란의 참화는 막았을 것입니다. 반정공신 이괄의 난에 놀라 토성으로 된 남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일을 빼고 외세의 침입에 제대로 대비한 것이 없는 인조임금이 청나라 황제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천안함 피침 사건과 연평도 피폭사건을 겪고서도 북한에 관용을 베풀자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군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후방의 국민들 모두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잠잘 수 있도록 만드는 첩경은 이번에 지난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궁예의 울음소리를 간직한 명성산에 우리 국민들이 비통한 곡소리를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산행사진>
첫댓글 저희도 25일 13명이 인수 야영을 하고 26일 선후배 모두 11명이 인수정상을 올랐습니다.
종주팀의 산행도 이렇듯 후기로 함께하여 동행을 하니 그저 고마웁고 건강한 모습들 뵈니 참 아름답습니다.
찬찬히 종주기를 읽어 내리노라면 부족한 역사관과 애국심 또한 불을 지핍니다.
Excelsior K-rock !!!!
숙제(산행기) 를 몇편 동시에 쓰셔야하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합니다...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