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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일곱 번째-2)
(충주 중원탑-여주시 도리, 2019년 8월 24일∼25)
瓦也 정유순
오후의 첫 일정은 다시 중앙탑면으로 건너와 용전리에 있는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전시관에서 시작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석비(石碑)로 원본이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비전시관은 충주고구려비를 전시한 <고구려의 천하 관>과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안악3호분 벽화 관>, 세계 최초의 철갑전사인 <개마무사 관>으로 구분하였다.
<고구려비 기념관>
<고구려의 천하 관>에 보존된 충주고구려비는 마을 어귀에 아주 오래전부터 돌기둥 하나가 서있어서 마을이름이 입석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돌기둥을 대장간 집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돌에다 떡을 바치며 득남을 원하기도 하여 마을을 지키는 수호석(守護石)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9년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하여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고구려비>
<고구려비 탁본>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우리 고대사를 푸는 열쇠로 만주부터 남한강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준다. 또한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그리고 삼국 간의 정치적 관계와 문화적 교류,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줌은 물론 절사(節賜), 절교사(節敎賜) 등 이두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라의 이두(吏讀)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추정한다.
<광개토대왕 비>
<고구려 영토>
<안악3호분 벽화 관>은 북한 국보 제28호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57년 제작된 고분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 중 가장 크다. 무덤의 규모와 짜임새, 벽화의 구성, 표현방법이 뛰어나 4세기 중엽 고구려 문화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문간방과 2개의 곁방, 널방 등 4개의 방에 ‘ㄱ’자 회랑을 갖춘 33m 규모다. 벽화는 각종 생활도와 250여명으로 구성된 대형행렬도가 장관을 연출한다.
<대형행렬도>
<안악3호분 현실>
2018년 7월 중국 요녕성 우하량(牛河梁)이란 곳으로 홍산문명을 보러 갔었는데, 그곳의 유물 중 여신묘(女神廟)의 현실(玄室)을 본적이 있다. 이 여신묘의 현실은 평면 ‘中’자형의 반지하식 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 구조물은 주실과 양측의 동측실과 서측실, 주실 남북의 남실과 북실, 남실 남측의 남단실(南單室)로 구성되어 있다.
<우하량 여신묘 현실 구성도>
나는 이 여신묘를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어쩜 충북 충주의 <고구려비 전시관>에 전시된 <안악3호분>의 현실(玄室) 내부구조와 이렇게 똑 같을 수가 있을까? 닮아도 너무 닮았다. BC 4000∼BC 3000년 전의 유물과 AD 357년에 제작된 고분의 현실 배치도와 규모가 거의 같다. 최소 3000년 이상 시공(時空)의 간극을 메꾸는 것 같다.
<안악3호분 현실 평면도>
또한 <안악3호분>의 ‘견우와 직녀’ 벽화와 ‘우하량(牛河梁)’이란 글자가 자꾸 겹쳐진다. 우하량의 ‘우하(牛河)’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나기 위해 필히 건너야 하는 은하수(우하)’이고, ‘량(梁)’은 ‘칠월칠석 날 두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은하수의 오작교(烏鵲橋)’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의 이러한 상상이 맞는다면 고조선 이전부터 우하량을 포함한 만주지역이 이미 우리 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역사는 실증(實證)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퍼즐게임이 아닐까…?
<안악3호분 견우직녀도>
<우하량유적 표지석>
<개마무사(鎧馬武士)>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사람과 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철편(鋼鐵鐵鞭)을 가죽으로 이어붙인 철갑(鐵甲)을 착용하고 긴 창(槍)을 주 무기로 사용함으로써 기동성과 공격력에 단단한 방어력을 부가하여 그 위용과 기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활용한 것은 우수한 철기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서양보다 천 년 앞서서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증거이며 그 시대의 아이콘이다.
<고구려비기념관 개마무사상>
<천등산휴게소 개마무사상>
삼족오(三足烏)는 태양에 살면서 천상의 신들과 인간세계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상상의 길조(吉鳥)인 동시에 세 발 달린 검은 새로 천손(天孫)의식이 깊은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또한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양사상은 한민족의 원형적 사유구조라고 볼 수 있어 해와 달, 하늘과 땅을 근본으로 삼아왔다. 전시관 입구에 세운 삼족오 조형물과 전시실 안에 있는 태양 속의 삼족오를 보며 만주 벌판을 누볐을 광개토대왕의 위용을 다시 생각해 보며 소태면 양촌리로 이동한다.
<삼족오>
조선 초 개국공신 권근(權近, 1352∼1409)도 이곳에 들렸다가 호(號)를 양촌(陽村)으로 지었다는 양촌리(陽村里)는 충주시에서 목계리를 지나 소태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목계나루와 같이 남한강 수운을 이용한 교역으로 선박장이 생기고 경제 환경이 좋은 덕분에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에 남한강이 여우섬을 돌아 흐르는 달여울[月灘]과 막흐르기여울[莫灘]이 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동리(松洞里), 월촌리(月村里), 선창리(船倉里)를 병합하여 양촌리로 하였다.
<양촌리 월촌마을>
<여우섬>
소태면 중청리에는 등대(燈臺)가 있다. 일반적으로 등대는 섬과 암초가 많은 바다에 항해용 등대와 항공기용 항공등대로 많이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남한강 변에도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선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 같다. 여울을 이루며 흐르는 강물은 지금이라도 당장 일엽편주에 몸을 실어 여울에 두둥실 떠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다.
<남한강 등대>
여울져 흘러가는 강물이 복스럽다는 복탄(福灘, 복여울)마을 사과 밭은 뜨겁던 여름 내내 더위 먹고 살찌우던 사과도 벌써 가을빛 물들이며 붉어지고,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었다는 능소화는 늦바람 나 하늘거린다. 덩달아 논에는 벼이삭이 스스로 몸을 낮추며 고개를 숙이고, 흰 꽃으로 봄을 노래했던 쪽동백도 구슬 같은 열매로 가을로 가는 문턱을 넘는다. 물에서도 잘 자란다는 물무궁화도 빨간색 뺨으로 가는 세월과 볼을 비비는데, 얄미운 가시박은 앙칼진 발톱으로 하천부지 수생식물들을 질식시킨다.
<물무궁화>
<가시박으로 덮힌 남한강>
마을 앞에서는 집 떠난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을 담아 주려는 어머니의 손길로 참깨를 터는 모습에 옛날 울엄니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는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데, 가까이 가보니 벼락을 맞아 반으로 갈라져 한 그루가 두 그루처럼 되었다. 표지판에 수령이 3백년으로 표시되어 있는 보호수인데, 이를 관리한다는 마을 어르신은 나이가 더 많다고 말씀하신다. 땀을 식힌 발길은 충주청룡사 터로 향한다.
<참깨털이>
<벼락맞은 느티나무>
<벼락으로 갈라진 느티나무>
청룡사지(靑龍寺址)는 소태면 오량리 뒷산인 청계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옛 절터이다. 청룡사의 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설화에 의하면 어느 화창한 봄날 한 도승이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갖고 놀다가 사라지면서 비가 멎었다. 산세를 자세히 살펴본 도승은 그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음을 상기한 도승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했다.
그 후 고려 말의 국사였던 혼수(混修)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다가 조선 태조 1년(1392)에 입적했다. 태조는 혼수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절을 크게 중창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다. 청룡사지에는 국보(제197호)인 충주청룡사지 보각국사탑과 보물(제658호)인 보각국사탑비 및 보물(제656호)인 사자석등이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제242호)로 지정된 충주청룡사 위전비와 3기의 석종형부도 등이 있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던 사찰 터다.
<청룡사지 유물들>
국보(제197호)로 지정된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은 고려 말의 고승인 보각국사(1320∼1392)의 묘탑이다. 묘탑은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부도(浮屠)라고도 하는데, 후기신라부터 조선 초까지는 8각 원당형(圓堂型)이 주류를 이루며, 이후로는 종모양 묘탑이 많이 만들어 졌다. 지대석과 몸돌 윗면에는 사리공이 있어 사리 및 옥촛대, 금송아지, 금잔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했다. 이 부도는 원위치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고, 상륜부는 지하에 파묻혔던 것을 원위치에 복원하였다.
<충주청룡사지 보각국사탑>
1394년(태조3)에 건립된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는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를 지낸 보각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다. 비문(碑文)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세웠다. 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었다.
<충주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장명등(長明燈)으로 조선 석등의 기본형인 평면 정사각형이다. 아랫부분에 한 마리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어 사자석등으로 부른다. 지붕틀은 두툼한 방석처럼 만들어져 있어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양주 회암사지 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자석등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충주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
청룡사지 석종형승탑(石鐘形僧塔)은 석종 모양의 승탑이다. 전체 높이가 1.98m로 비교적 대형 크기에 속한다. 탑신(塔身)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탑의 몸 앞면 가운데 부분에는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는 쓰인 글씨를 쉽게 알 수 없으나 ‘적운당사리탑(跡雲堂舍利塔)’이라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청룡사지에 전하는 여러 석조유물과 함께 당시의 불교 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54호)다.
<충주청룡사지 석종형승탑>
청룡사지 입구에 세워진 위전비(位田碑)는 현재 폐사된 청룡사(靑龍寺)가 신도들로부터 기증 받은 전답 등의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으로, 1692년(숙종18)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사찰의 경영을 위해 시주를 한 불자들의 이름과 시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다. 귀부(龜趺)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비신 위에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지붕돌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사원(寺院) 경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충청북도유형문화재(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충주청룡사지 위전비>
첫댓글 아직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있는 요즘 국토유람에 열성을 보여주신 정후배 정말고맙소...특히 약2000년전 삼한의 철기시대 유물을이용한 [고구려 개마무사상]을응용 백제지역 제천 [천등산휴게소 개마무사상]을 읽어내릴때 그감회가새로웠소.정말감사합니다.....
한강에는 삼국시대의 사연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아요.
우선 통일이 된다면
다시 한번 대륙을 향할 날이 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광개토대왕의 기개를
다시 느낄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그 때 그 시절이 오겠지요.
꿈이라도 크게 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