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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영전(英英傳) - 작가미상
민근홍 언어마을
■ 줄거리
명나라 효종 때 성균진사 김생이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쾌활하였다. 어느 날 취중에 한 미인을 만나 사모하게 되었다. 남자종인 막동이가 미인이 사는 집 노파와 친하게 되어, 그 미인이 회산군의 시녀 영영임을 알게 된다.
김생의 그리움이 더해지자 노파가 주선하여 영영과 만나게 되나 동침만은 거절당한다. 그 뒤 김생은 회산군집에 몰래 들어가 영영과 하룻밤을 동침하고 헤어진다.
이들은 만날 길이 없는 가운데 3년이 지났는데, 그리움으로 자결까지 하려던 김생은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를 한다. 삼일유가(三日遊街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를 하다 회산군 집에 들어간 김생은 영영과 편지만 주고받는데, 이때 회산군은 죽은 지 3년이 되었다.
김생이 영영에 대한 그리움으로 앓아 눕자, 회산군 부인의 조카인 친구가 김생의 사연을 말하여 영영을 보내주게 하였다. 김생은 벼슬도 사양하고 영영과 여생을 보낸다.
■ 핵심 사항
․ 특징 : ① 한시나 편지글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삽입하여 인물의 심리를 전하고 있음.
② 중심 갈등은 인물들과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 환경 사이(김생-선비,영영-궁녀)에서 형성되고 있다.
․ 주제 : 고난을 뛰어넘는 사랑의 실현
․ 신소설의 작가 이해조는 이 작품의 설정을 빌려<岑上笞)라는 한문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
■ 감상의 길잡이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영영전(英英傳) :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1책. 한문 필사본. <상사동기 相思洞記>·<상사동전객기 相思洞餞客記>·<회산군전 檜山君傳>이라고도 한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본을 비롯하여 5, 6종의 사본(寫本)이 전한다. 이 작품은 지체 높은 귀공자가 궁녀를 열렬하게 사랑한 사연을 담은 애정소설이다.
이 작품은 <운영전>과 유사하여 동일 작자설까지 논의된 바 있으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운영전>의 비극적 결말과 달리 이 작품은 남녀의 지상결합으로 행복한 결말로 이루어진 것이 큰 차이점이다. 이에 따라 <운영전>의 전기적 성격이 <영영전>에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 작품은 궁녀들의 폐쇄된 생활상을 드러내고, 삽입한 시와 함께 사실적인 표현, 생동적인 비유를 통한 절절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 삼방요로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유영전> 즉 <운영전>의 필사기가 ‘대명천계(大明天啓) 21년(1641)’인 것으로 보아 이 작품도 그 무렵에 이미 읽히고 있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남녀간의 모범적인 사랑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박력있게 그린 애정소설이다.
■ 참고자료
평설-조선 시대의 애정 소설
「영영전」은 작자, 연대 미상인 한문본의 애정 소설이다. 대개의 고전 소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 융성했던 것처럼 애정 소설도 이 시기 이후 많이 창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비해 많이 창작되었다는 것일 뿐 여전히 그 수는 적었다.
사실 조선 사회에서 애정 문제만큼 억제되고 제한된 것은 없다. 조선은 건국 초기, 고려 가요들을 ‘음란하다[淫詞]’ 하여 일부만 남겨 두고 없애 버렸다. 그나마 일부 남은 노래들도 같은 이유로 가사를 바꿔 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학은 여자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여 문 밖 출입도 어렵게 했다. 근본적으로 남녀의 만남조차 봉쇄했던 것이다. 혹 만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으로 철저히 서로 피하는 것이 미덕임을 강조했다. 이런 사회 배경 속에서 애정 소설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남녀의 애정 문제가 소설의 주제에서 물러설 수는 없다. 사랑은 소설의 영원한 주제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염집 여인들의 행동을 심하게 규제했으므로 이들의 사랑을 소재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런 까닭으로 일부 양반들이 기생(妓生)들과 벌인 애정 행각 이외에는 이렇다 할 애정 이야기가 전해지기 힘들었다. 이런 규제가 임·병 양란 이후 약화면서 이전에 비해 많은 애정 소설들이 나왔던 것이다.
임·병 양란 이후는 여러 면에서 변혁의 시기였다. 명분보다 실천과 현실을 중시하게 되면서 실용적인 학풍인 실학이 중시되고, 평민 의식이 급성장했다. 특히 전쟁 중에 무기력했던 유학자의 권위주의를 배격하면서 허례 허식보다 인간의 감정에 보다 충실한 분위기로 변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번졌고, 고전 소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정 소설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조선 전기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진 것이다. 또한 배경 면에서 초기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여기에는 애정 문제를 용납하지 않는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제법 나와 그 변화 양상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아무리 변화된 상황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여염집 여인과의 사랑을 꿈꿀 수는 없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의식이 변환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염집 여인의 자유 연애가 강조될 만큼 체제가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관련교과 -「문학(상)(김열규 외)」교과서 P.136에서
‘사랑’만큼 소설의 주제나 소재로 많이 쓰이는 것은 드물다. 하지만 우리 나라 고전 소설에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이것은 조선 사회의 유교 윤리가 애정 문제를 엄격하게 막았던 탓이다. 그래서 애정 소설이래야 기껏 중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비교적 교제가 쉬운 기생과의 사랑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실질과 인간의 감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영영전」은 이런 면에서 그 변화 양상을 알리는 대표적인 애정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행동의 제약을 심하게 받는 신분인 궁녀와 선비의 사랑을 과장 없는 진솔한 목소리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영영전」을 읽어 보자. 특히 이 작품이 표현, 구성, 인물 면에서 다른 고전 소설과는 달리 현실적이며 사실적이라 평가받는 점에 주목하면서 읽어 보자.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말까지에 해당하는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세적 사회 질서는 여러 가지 모순과 혼란에 부딪쳤고, 이에 따라 이전의 이념과 문화는 점차 변모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러한 시대 정신에 따라 이 시기의 문학에서는 평민 정신의 대두로 문학의 양상이 크게 변모하였다.
◇ 참고사항 : 「운영전」과「영영전」
애정 소설로는 「운영전」을 비롯하여 「옥단춘전」, 「숙영낭자전」, 「채봉감별곡」, 권필의 「주생전」 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운영전」은 여러 면에서 「영영전」과 비슷하다. 먼저 「영영전」의 줄거리를 살펴본 다음 두 작품의 공통점을 알아보자.
소년 선비 김생은 한 여인을 우연히 보고 저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김생은 마침내 상사병으로 눕게 되었다가, 막동의 도움으로 그녀의 이모인 노파에게 접근한다. 노파는 그녀가 영영이란 이름의 궁녀로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생은 노파의 도움으로 영영을 만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다시 영영이 있는 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김생이 궁으로 몰래 들어가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이후 노파가 죽어 서로 연락할 길이 끊어진다. 삼년 후 김생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삼일 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돌아다니는 일)를 하다가 우연히 영영을 만나게 된다. 김생은 다시 상사병으로 눕게 되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영영과 맺어지고 이후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구성 및 소재 면에서 「운영전」과 매우 비슷하다. 우선, 두 작품 모두 궁녀와 선비의 사랑을 그 소재로 하고 있다. 깊은 궁궐 속에 있는 궁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소재는 굳이 조선 사회의 엄격함을 말하지 않아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흔하지 않은 소재가 두 소설의 공통점이 된다는 것은 두 작품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둘째, 영영과 김생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는 데 노파가 조력자로서 수행하는데, 이것은 「운영전」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셋째, 사랑을 얻기 위해 김생이 영영이 있는 궁궐로 몰래 들어가는 모험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데, 모험적인 사랑이라는 흔치 않은 이야기 역시「운영전」에서도 보인다. 물론 결말에 있어서 죽음으로 끝나는 「운영전」에 비해 「영영전」은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이지만, 여러 가지 공통점으로 보아 이 두 작품은 어느 편의 작가가 모방했던가, 동일한 작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작품은 다른 고전 소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고전 소설 하면 흔히 전기성, 사건 전개의 우연성 남발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것을 찾기 어렵다. 「영영전」의 두 주인공 김생과 영영이 사랑을 이루는 공간은 바로 현실 공간이며, 이들의 절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이 아닌 필연에 의해서만 만나고 헤어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 당시로선 뛰어난 구성력과 현실감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고전 소설 중에서 이 작품은 권선 징악 같은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남녀의 애정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적이며 모험적인 사랑을 과감히 보여 준 보기 드문 작품이라 하겠다.
영영전(英英傳) / 작자미상
■ 본문읽기
말도 발을 멈추고 가지를 않네
조선 선조 때 성균관에 김생이라는 소년 진사가 있었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글을 잘했으며 우스운 이야기도 잘했다. 게다가 겨우 십오 세에 진사 제일과에 올라 장안에 그를 사위 삼으려는 공경 대가(公卿大家)들이 줄을 이었다.
어느 봄날, 김생은 말을 타고 성균관에서 집으로 가며 봄 경치를 구경하다가 술집의 파란 깃대를 발견했다. 다른 날과 다른 봄 기운에 그는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술을 한 병 샀다. 그는 술을 마시고 취하자 주루(酒樓, 술을 파는 집 또는 그 집의 누각)에 올라 누웠는데, 꽃 향기가 날아와 옷에 스며들고 시원한 바람이 취한 얼굴을 간지럽혔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렸다. 새들도 모두 숲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무렵이라 마부 역시 돌아가기를 재촉했다. 김생은 말에 올라 채찍을 휘둘렀다. 마침 길가에 인적이 드물어 김생은 소리 높여 시를 읊었다.
동쪽 언덕의 꽃과 버들을 완상(玩賞, 즐기어 구경함)하니
말도 발을 멈추고 가지를 않누나
어느 곳에 옥 같은 미인이 있느뇨
복숭아꽃 덧없으나 정이사 한(限) 있으랴
읊기를 마쳤을 때, 김생의 취한 눈에 무엇이 어른거렸다. 눈을 들어 보니 하늘거리는 것이 여인의 옷자락이었다. 김생의 눈은 옷자락의 주인공을 좇았다. 열여섯쯤 되었을까, 사뿐사뿐 걸음이 가볍고 허리가 가늘어 바람에도 하늘하늘 흔들리는 여인. 그녀의 푸른 소매가 봄바람에 가볍게 휘날리고, 빨간 치마는 맑은 시냇물에 비쳤다.
김생은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 앞서 걷던 여인은 상사동 길 옆에 있는 두어 칸짜리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김생도 그 집 앞까지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집 앞에서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여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몹시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해가 저물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생은 아쉬운 마음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떼었다.
사랑을 위해 살다
그 날 저녁부터 김생의 얼굴은 못마땅한 듯, 황홀한 듯, 때로 멍하고 때로 붉어져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 그는 밤중에도 베개를 어루만지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잠이 부족해 입맛도 잃어 버렸다.
이렇게 며칠을 보냈을까? 당연히 잠자리와 먹는 것이 시원치 않으니 몸은 시든 나무처럼 마르고, 얼굴은 식은 재처럼 파리했다.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평소 김생을 따르던 막동이란 자가 찾아왔다.
“도련님처럼 호방하신 분이 이렇게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계시니,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생은 막동의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막동은 이야기를 들으며 빙긋이 웃다가 김생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라면 근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너마저 그런 소릴 하느냐?”
“하하, 제게 좋은 계교가 있으니 쓸데없이 애를 태우지 마옵소서.”
“저, 정말이냐? 그래, 내가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겠느냐? 네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다. 어서 말해 다오!”
김생이 성급하게 채근하자 막동은 웃음부터 흘렸다.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김생의 눈을 보고 정색을 하더니 계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우선 도련님께선 좋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셔서 그 집에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멀리 떠나는 벗을 전송하는 사람처럼 그 집 주인에게 방 한 칸을 빌리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술자리를 만드셔서….”
막동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두웠던 김생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어째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김생은 막동의 계책을 칭찬하며 하인들에게 서둘러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김생은 여인이 들어갔던 집을 찾아가 방 한 칸을 빌었다. 그리고 미리 약속한 대로 막동에게 손님을 청해 오라 하였다. 막동은 한참 동안 어디를 다녀오는 것처럼 한 후에 나타났다.
“그래, 지금 온다더냐?”
“도련님, 손님께선 오늘 많이 취하셔서 내일 오겠다고 하더이다.”
김생은 서운한 투로 말했다.
“서운하구나. 그 사람이 가기(佳期, 아름다운 때)를 그르쳐 좋은 술을 버리게 생겼으니…. 이 집 주인을 불러서라도 한잔 마시는 것이 낫겠다.”
주인을 부르니 칠십 정도 된 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께서는 편히 앉으소서. 손님을 전송하러 나왔다가 허탕을 쳤지만 좋은 술이 아까우니 주인과 한잔하고 싶어 불렀소이다.”
김생은 막동에게 술과 안주를 들이라 하고 그 노파에게 술을 권했다. 이날 김생과 노파는 취하도록 마셨고, 마치 친한 벗처럼 허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 날 김생은 여인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이튿날 김생은 좋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또 그 집으로 갔다. 그 날도 역시 막동이 왔다갔다 하였고, 손님 대신 노파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김생이 똑같은 준비를 하고 노파를 청하자 막동의 예상대로 노파는 과연 의심이 든 모양이었다.
“이 부근 어느 집도 손님을 전송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인데 도련님께선 어찌하여 하필 누추한 저희 집을 골라 사흘씩이나 은혜를 베푸시는지요?”
“손님이 오지 않아 이렇게 된 것뿐 무슨 다른 뜻이 있겠소? 또 할머니와 더불어 술을 나누는 것은 손님과 주인 사이에 당연한 것이 아니오.”
김생은 그렇게 노파를 안심시켰다. 그 날도 두 사람은 술이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김생은 빨간 보자기를 풀어 비단 적삼 하나를 내놓았다.
“매일 할머니를 괴롭히고도 갚을 것이 없어 걱정했는데 이것이라도 제 정성으로 아시고 받아 주시오.”
노파는 김생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근심이 되었다. 노파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로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제가 과부 되어 살아온 지 오래지만 이웃 사람조차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 도련님께서 소망이 있으시다면 비록 죽는 일이라도 말씀하소서.”
그제서야 김생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소? 제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한 낭자를 보았습니다. 나이 어린 협기로 뒤를 좇아왔더니 그 낭자가 들어간 곳이 바로 이 곳이었소. 그런데 그 낭자를 본 뒤부터 마음이 취한 듯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그 낭자만 생각하니, 애끊는 괴로움이 벌써 여러 날이라오.”
노파는 김생이 여인을 본 날짜와 여인의 복장을 물었다. 노파는 짚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련님께선 제 죽은 언니의 딸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 애의 이름은 영영(英英)이라 하는데 정말 탐스러운 아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뭐란 말이요?”
김생은 노파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파는 김생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그 애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요?”
“그 애는 회산군(檜山君)의 시녀입니다. 궁중에서 나고 자라 문 밖을 나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전에 내가 본 날은 어인 나들이었소?”
“그 때는 마침 그 애 부모의 제삿날이라 제가 회산군 부인께 청하고 겨우 데려왔었지요.”
“….”
“영영은 자태가 곱고 음률이나 글에도 능통해 진사(회산군을 말함)께서 첩을 삼으려 하신답니다. 다만 그 부인의 투기가 두려워 뜻대로 못 할 뿐이랍니다.”
김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였다.
“결국 하늘이 나를 죽게 하는구나!”
노파는 김생의 병이 깊은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노파는 그렇게 김생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요? 그, 그것이 무엇이오? 빨리 말해 보시오.”
“단오가 한 달이 남았으니 그 때 다시 작은 제사상을 벌이고 부인에게 영아를 보내 주십사고 청하면 그리 될 수도 있습니다.”
김생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할머니 말대로 된다면 인간의 오월 오월은 곧 천상의 칠석이오.”
김생과 노파는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영영을 불러낼 계획을 세웠다.
수심은 비가 되고
마침내 노파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김생은 날이 밝기도 전에 그 집으로 달려갔다.
“일이 어떻게 되 가오?”
노파는 아침도 먹기 전에 달려온 그가 우스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부인께 간절하게 부탁하였더니 처음에는 거절하셨습니다. 진사께서 영아의 출입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 제가 다시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진사께서 출타하실 일이 있으니 그 때라면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영아가 오긴 오겠지만 진사님 출타 시간을 알 수 없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김생은 노파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영영을 기다렸다.
그런데 해가 거의 오시(午時, 낮 11시 30분부터 13시 30분까지)가 다 되어도 나타나는 그림자가 없었다. 김생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일어서서 부채를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그 노파를 불렀다.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고, 근심하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행인들이 가까워졌다가 곧 다른 데로 가니, 그 때마다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소.”
“지성이면 감천이라니, 도련님은 좀 안정하시지요.”
두 사람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데 먼 데서 신을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김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발소리는 점점 노파의 집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김생이 창으로 달려가 바라보니 과연 오는 사람은 꿈에도 그리던 영영 낭자였다.
김생은 기뻐 손뼉을 치는데 마치 어머니를 본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은 문 앞 버드나무에 붉은 말이 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을 살피며 머뭇거리면서 들어오지 않았다. 노파는 영영을 불렀다.
“빨리 들어오너라. 여기 도련님은 우리 집에서 손님을 전송하러 오신 분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늦었느냐? 네가 못 오는 줄 알고 네 부모 제사를 그냥 지냈구나. 어서 들어오기나 하려므나.”
영영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파는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김생과 더불어 잔을 들고 서로 권하였다. 몇 잔 술이 오갔을 즈음 김생은 미소 지으며 영영에게 말했다.
“낭자도 이리 가까이 앉으시오. 내가 잔을 채우겠소.”
그러나 영영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않았다.
“네가 깊은 궁중에서 자라 세정(世情,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한다지만 술 권하는 예의조차 모르느냐?”
노파가 그렇게 말한 뒤에야 영영은 잔을 받아 들었다. 김생이 영영에게 술을 부어 주었고, 그녀는 주저하다가 술잔을 잠깐 입술에 대기만 했다. 잠시 후 그 노파는 술에 많이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영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네가 잠시 도련님을 모시고 있거라.”
노파가 자리를 피해 주어 김생과 영영만 남았다.
“삼월에 홍화문 앞길에서 서로 본 적이 있는데 낭자는 그 때를 기억하겠소?”
“말은 기억하오나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말만 못하오?”
“말은 보았으나 사람은 보지 못했나이다.”
“낭자는 나를 놀리는구려. 비록 얼굴이 파리하고 몸이 말라서 그 때와 다르긴 하지만 설마 날 모르겠소? 하기야 낭자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된 것인지 알 까닭이 있겠소?”
김생은 안타까운 눈으로 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영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분명 김생을 아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낭자는 내가 아닌데 어찌 이 마음을 알겠소?”
“도련님은 제가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을 아시리오?”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영영은 다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멀리서 바라보고 그리워한 지가 이미 달이 지났는데 이제야 만나 보게 되다니,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소. 낭자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내 목숨은 오늘을 기다려 겨우 살아 남았소.”
김생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러나 영영은 김생의 말이 끝날 무렵 일어서야 했다.
“진사님께서 돌아오시면 먼저 저를 찾으십니다. 그만 가야 합니다.”
김생은 영영의 말에 금방 시무룩해졌다.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벌써 작별할 때는 다가왔고 다시 만나기는 어려우니….”
영영이 다시 눈을 들어 김생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이 달 보름 밤에 진사님은 밖에서 다른 왕자님들과 달을 감상하신다 합니다. 그 날 궁의 무너진 담 쪽으로 오십시오.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무너진 담 옆의 작은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그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있사오니 도련님께선 거기에 계십시오.”
김생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영영과 작별하였다. 김생은 노파의 집에서 나와 멀어져 가는 영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었다.
깊고 깊은 저 궁 안에 고운 님 갇혀 있네
손을 놓아 작별 후로 서로 소식 아득하여라
이 날도 잊지 못해 예쁜 얼굴 알뜰한 사랑
하루 속히 서로 만나 좋은 인연 맺었으면
지난 일을 생각하니 수심은 비가 되고
가기(佳期)를 고대하니 하루 해가 한 해 같네
십오야 달 밝은 밤 고운 님 찾고지고
다락 올라 달을 보며 그 옛날을 다시 찾네
사랑과 이별
보름날, 김생은 영영이 일러 준 대로 회산군 저택으로 가 담이 무너진 곳을 찾았다. 그 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얼마쯤 갔을까, 과연 외딴 방이 하나 보였다. 김생은 기뻐하며 그 별침에 몸을 숨기고 영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달은 점점 높아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때 문 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김생은 숨을 죽이고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발소리는 별침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리며 고운 향기가 방 안에 퍼졌다. 바로 영영이었다. 김생이 썩 나서며,
“낭자, 소생 여기 있소.”
하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너무 컸다. 영영도 놀랐지만 소리 친 김생도 놀랐다. 두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도 피식 웃었다. 영영은 김생의 손을 붙잡고 가까이 앉았다. 두 사람은 부부처럼, 때론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끔씩 침묵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긴 했지만, 그 침묵의 순간조차도 눈빛은 끝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한참 깊었을 즈음 영영이 갑자기 일어섰다.
“진사께서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소서.”
김생이 무어라 말하려 손을 내젓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진사님이 돌아오시나이다.”
그 말에 영영이 재빨리 밖에 뛰어나가고 김생은 졸지에 혼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잘못 돌아다니다 붙들리는 날엔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한참 동안 바깥이 시끄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작아지면서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집 안의 불도 모두 꺼졌다.
얼마쯤 지나자 영영이 등과 술병을 들고 와서 문을 열었다. 이 무렵 김생은 아무래도 일이 틀린 줄 알고 한쪽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영영은 웃으면서,
“제가 이렇게 따뜻한 술을 가지고 왔나이다.”
하고 술을 따라 김생에게 권하였다.
“내 마음이 낭자의 정에 있지 술에 있지 않소.”
김생은 술을 사양하였다.
그 날 밤 두 사람은 둘만의 사랑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한 두 남녀가 만났으니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겐 밤이 짧았다. 마침내 먼 곳에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밝아 오는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먼 데서 종소리가 들린 뒤에는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우리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좋은 밤은 짧기만 하군요. 이렇게 한 번 궁문을 나가면, 다시는 만나기 어려우니 이 심정을 어이하리까?”
영영이 김생의 말을 듣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도련님께선 남아의 철석 같은 마음으로 어찌하여 여자를 생각하여 마음을 상하십니까? 원컨대, 도련님께서는 저를 생각하시느라 마음 상하지 마시고 옥체를 소중히 하시고 학업에 정진하여 소원을 이루신다면 소녀 다행으로 여기겠나이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다만 손을 잡고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창 밖이 점점 밝아져 영영이 김생을 붙잡고 나가 무너진 담 밖에서 전송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생이 영영을 만나고 온 얼마 후, 회산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도와 주었던 노파도 세상을 버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편지조차 서로 보낼 수 없어 소식이 영영 끊기고 만 것이다.
재회(再會)와 끝없는 사랑
상처는 세월이 흐르면 치유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근심 속에서도 삼추가 지났다. 이즈음엔 김생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시 경서에 마음을 쏟고 과거에 응시하였다. 김생은 선비 천 명이 응시한 가운데 당당히 장원이 되었다.
장원 급제에 삼일 유가가 주어졌다.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배우들이 주변에서 갖은 재주를 부렸다.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마치 장터처럼 시끄러웠다. 김생은 호탕하게 채찍을 잡고 말에 올랐다. 사람들은 배우들의 재주를 보기도 하고 김생의 당당한 모습을 칭찬하기도 했다.
얼마쯤 갔을 때 길 옆에 높고 긴 담이 보였다. 김생이 말 위에서 보니 푸른 기와, 붉은 난간이 사면에 빛나고, 여러 가지 화초들이 가득 향기를 뿜는데다 나비와 벌이 뜰 안을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곳이 어디인가?”
“회산군 댁입죠.”
말을 끄는 이의 대답에 김생은 문득 옛일이 생각났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더워졌다.
이 때 회산군 부인도 궁인들을 이끌고 집 앞으로 구경을 나왔다. 부인은 삼년 전 회산군이 죽은 후 처음 소복을 벗은 때여서 쓸쓸히 지내다가 유가를 따르는 배우들의 재주를 보러 나온 것이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김생은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잠시 딴생각을 한 탓이었을까? 어쨌든 그가 말에서 떨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 달려들었다. 회산군의 부인은 곧바로 시녀들을 시켜 그를 사랑으로 데려가게 했다.
그래도 여전히 음악과 재주는 계속되었다. 김생이 회산군의 집으로 들어갔으니 이들도 따라와 연주하고 재주를 부렸다. 시녀들 몇이 주렴을 걷고 이를 구경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생은 은근히 정신이 들어 궁녀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영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저 세상 사람이 된 건 아닐까?’
김생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 무렵 한 여인이 멀리서 김생을 바라보다가 들어가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김생을 바라보다 눈물을 감추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에 나와 바라보면서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차마 김생을 보지 못하고 눈물을 막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영영이었다.
벌써 저녁 무렵이었으니 김생은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김생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내가 여기에 무엇 하러 왔을까?”
김생은 혼잣말처럼 이 말을 남기고 바로 나가려 하였다. 이때 부인이 들어오다가 김생이 나가려는 것을 보고 잠시 쉬며 차라도 마시고 가라 붙잡았다. 김생은 부인의 마음이 고마워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김생 앞에 놓았다. 좋은 차의 향이 방 안 가득 퍼졌다. 김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보니 이게 웬일인가? 차를 들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영영이 아닌가! 영영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김생은 놀랍고 반가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김생도 영영도 결코 내색할 수가 없었다. 김생은 기가 막혀 눈앞이 흐려졌다. 영영이 차를 올리고 나갈 때 봉투 하나가 김생 앞에 떨어졌다. 김생은 얼른 주워 부인 모르게 소매 속에 감추었다.
김생이 집에 와서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어 보니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복 없는 첩 영영이 다시 절하며 낭군님 발 앞에 아뢰옵니다. 제가 살아서 낭군님을 따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쉽게 죽지도 못하여 이렇게 시들어 가며 남은 생을 살고 있습니다. 봄날에도 깊이 궁에 갇히었고, 오동잎에 비가 떨어지는 밤에도 저는 빈 방에 갇혀 있사옵니다. 오랫동안 거문고를 가까이 하지 않아 거미줄이 상자에 얽히고, 경대를 쓰지 않고 감추어 두니, 티끌과 먼지만 가득합니다.
해가 기우는 저녁 하늘에 저의 한이 더하고,
새벽별 그믐달에 외로움이 더합니다. 다락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구름이 저의 눈을 가리고 창에 기대면 수심이 저의 혼을 끊으니, 오호 낭군이시여! 어찌 슬프지 않겠나이까? 이모께서 세상을 버리신 후 편지조차 전달할 수 없어 애가 끊어지는 듯하더니 이제야 낭군님을 뵈었습니다. 비록 젊음이 시들고 비천한 몸이지만 낭군님 앞에 이렇게 아뢰옵니다.’
김생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침음(沈吟, 근심에 잠기어 신음함)하고 슬퍼하면서, 차마 손에서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것이 그전보다 더했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깊은 궁중 속에 있는 그녀를 사모하는 김생의 정만 더할 뿐이었다.
김생은 얼굴이 파리해지고 몸이 쇠잔하여, 자리에 눕자마자 병이 들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니 김생은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김생의 친구 중에 이정자(李正字)라고 하는 이가 문병을 왔다. 정자는 김생이 갑자기 병이 난 것을 이상해 했다. 병들고 지친 김생은 그의 손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정자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말했다.
“자네의 병은 곧 나을 걸세. 회산군 부인은 내겐 고모가 되는 분이라네. 그 분은 의리가 있고 인정이 많으시네. 또 부인이 소천(所天, 아내가 남편을 일컫는 말)을 잃은 후로부터, 가산과 보화를 아끼지 아니하고 희사(喜捨)와 보시(布施)를 잘 하시니, 내 자네를 위하여 애써 보겠네.”
김생은 뜻밖의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병든 몸인데도 일어나 정자의 손이 으스러져라 꽉잡을 정도였다. 김생은 신신 부탁하며 정자에게 절까지 하였다.
정자는 그 날로 부인 앞에 나아가 말했다.
“얼마 전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문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을 고모님이 시비에게 명하여 사랑으로 데려간 일이 있사옵니까?”
“있지.”
“그리고 영영에게 명하여 차를 올리게 한 일이 있사옵니까?”
“있네.”
“그 사람은 바로 저의 친구로 김모라 하는 이옵니다. 그는 재기(才氣)가 범인(凡人)을 지나고 풍도(豊道)가 속되지 않아, 장차 크게 될 인물이옵니다. 불행하게도 상사의 병이 들어 문을 닫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은 지 벌써 두어 달이 되었다 하더이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문병하는데, 피부가 파리해지고 목숨이 아침저녁으로 불안하니, 매우 안타까이 여겨 병이 든 이유를 물어 본 즉 영영으로 인함이라 하옵니다. 영영을 김생에게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인은 듣고 나서,
“내 어찌 영영을 아껴 사람이 죽도록 하겠느냐?”
하였다. 부인은 곧바로 영영을 김생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꿈에도 그리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생은 기운을 차려 다시 깨어나고, 수일 후에는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김생은 공명(功名)을 사양하고, 영영과 더불어 평생을 해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