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와이로'가
일본말인 줄 알았는 데... .
☘와이로(蛙利鷺)
고려시대 의종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 (夜行) 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히 민가(民家) 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인 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 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집 (이규보)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나는 있는 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
(唯我無蛙 人生之恨 /유아무와 인생지한)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 서 어느 만큼의 지식 (知識)은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주막에 들러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 면서, 주모에게 외딴 집(이규보 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에 낙방 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내려오며, 집안 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 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아서 면담을 신청 했다.
그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 /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았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 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시합을 하자"
라는 거였다.
백로(白鷺)를 심판 으로 하여 노래시합 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 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 가 자신에게 노래 시합을 제의 하다 니.. .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 게 가꾸고자 노력 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 를 백로(白鷺)한테
뇌물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 다.
약속한 3일이 되어 서 꾀꼬리와 까마귀 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의 판정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백로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가 가장 좋아 하는 개구리를 잡아다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썼기 때문에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꾀꼬리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
라는 글을 대문앞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 과거 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 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란 말이 생겼다.
*와(蛙): 개구리 와.
*이(利): 이로울 이.
*로(鷺): 백로 로.
이규보 선생 자신이 생각해도, 나의 실력 이나 지식은 어디에 내놔도 안떨어지는 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 었다.
돈도 없고, 정승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과거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 다.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한테 개구리를 상납한 것처럼 뒷거래를 하지 못하여 과거에 번번히 낙방해 초야(草野)에 묻혀 산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李奎報 선생의 품격 이나, 지식이 고상 (高尙)하기에
자신도 과거(科擧) 에 여러번 낙방 하고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인데,며칠 후에 임시(臨時) 과거(科擧)가 있다 하여 개성으로 올라 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궁궐에 돌아 와 즉시 임시 과거를 열 것을 명 (命)하였 다고 한다.
과거를 보는 날,
이규보선생도 뜰에 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 으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걸은시제(試題)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
<나는 있는 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
이란 여덟 글자 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냄 으로써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이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 다고 한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唯我無蛙人生之恨) 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 편집,碧山)
첫댓글 뒷돈 와이루
일명 급행료
씁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