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에서 나온 이야기
1. 고다이바부인과 「엿본 톰」
영국의 코벤트리시는 11세기경, 레오프릭 백작의 영지였다. 그는 영내에서 무거운 세금을 징수했으므로 얌전하고 마음이 착한 백작부인 고다이바는 남편에게 세금을 가볍게 매기도록 간청하였다. 냉혹한 백작은 이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몇 번이고 부탁하므로 만일 부인이 알몸뚱이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거리를 한바퀴 돌아온다면 청원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얌전한 귀부인이 설마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백작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다이바 백작부인은 ‘공중의 행복을 위하여’ 감세시키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고 각오한 나머지 이를 수락하고 결행키로 하였다. 고다이바 백작부인의 이 결심을 전해들은 거리 사람들은 감격한 나머지 이날 부인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 때 모두가 창문을 굳게 닫고 커튼을 내려서 밖을 내다보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백작부인이 말을 타고 알몸뚱이로 거리를 돌았다. 모든 시민이 창문과 커튼을 내리고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 오직 톰이라는 사나이가 시민의 합의를 어기고 문틈으로 백작부인의 알몸뚱이를 내다봤던 것이다. 이에 대한 벌로 그는 당장 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이래 영국에서는 여자목욕탕을 들여다보는 변태적인 짓을 하는 따위의 남자를 ‘엿보는 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코벤트리시에서 옛날 사용한 동전에는 이 전설을 기념하여 ‘공중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하는 라틴말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말은 테니슨 경 등의 시의 제재로 되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2. 어수룩한 재크
이 말은 프랑스사람이 프랑스민중을 자조(自嘲)할 때 쓰는 숙어다. 주로는 프랑스 농민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말은 프랑스의 리베럴한 부르조아적 역사가 티에르가 프랑크적 이기주의자인 귀족 계급에 대립시켜, 옛날부터 흙하고만 친하고 소박하고 또 야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그 무엇을 두려워하는 가난한 농민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한 것이다. 제아무리 고통스런 국면에 부딪쳐도 익살, 자조, 농담으로 웃어버리는 프랑스인의 기질을, 이 말은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1358년 북부프랑스에 일어난 농민봉기를 ‘재크리의 난’이라고 부르는 것도 똑같은 의미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봉건적 지배하에 갖은 억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영주와 승려와 같은 지배계급의 설교에 귀를 기울인 농민에 대해 답답하다고 생각한 자유주의자들의 심정도 얼마간 포함된 말이라고 한다.
3. 사자심왕(獅子心王)
영국왕 리처드 1세(1157~99)는 잔인한 ‘사자심왕’으로 불리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리처드 1세는 그의 10년간에 걸친 치세기간 중에 본국에서 지낸 것은 불과 6개월 뿐이고 나머지는 외지에서의 전투로 밤낮을 보내다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제3회 십자군원정(1189~92)에 참가하여 프랑스 왕과 협력하여 키프로스 섬에서 싸워 그곳을 점령한 뒤 다시 팔레스티나에서 살라후딘(Salahu'd-Din, 1138~93)과 격전을 벌렸다. 그때 마침 본국에서 동생인 존이 음모를 꾸며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1192년 살라후딘과 화해하고 회군하려 했다. 그러나 살라후딘이 포로의 매수에 불응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그 자리에서 포로를 끌어내어 모두 목을 베게 하였다.
리처드 1세는 통치자로서는 무능했지만 용감성과 관용적인 태도로 스스로 중세기 기사의 표본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의 관용성 뒤에는 기실 이러한 잔인성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사자심왕’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후세에 이르기까지 아랍의 어린이들은 리처드의 이름만 들어도 우는 것을 뚝 그쳤다고 한다.
이렇게 저지른 인과응보인지는 모르나, 리처드 1세는 귀국도중 오스트리아의 지배자 레오폴드 5세(Leopold 5, 1157~94)에게 체포된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Heinrich 6, 1190~97 재위)에게 인계되어 1년 이상이나 감금되었다가 몸값을 치루고 석방된 후 일단 귀국했다. 그러자 1194년 프랑스로 건너가 필립 2세(Philip 2, Auguste 1180~1223 재위)와 싸우던 중 1199년 4월 6일, 리모쥬 부근에서 전사했다.
4. 울트라(Ultra)
울트라라는 말은 극단적인 것, 과격한 것을 가리키는 접두어이다. 원래는 ultra-montane라는 라틴어로서, 이것은 산 저쪽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 볼 때, 알프스의 저쪽, 즉 로마교황청의 입장을 가리키는 낱말이었다.
중세기 이래 로마의 교황과 각국의 왕들간에는, 사교(司敎) 이하의 승려들에 대한 임명권과 기타의 권한문제를 놓고 줄곧 논쟁과 암투가 있었다. 이 말은 당시 각국의 ‘로마교회 지상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통상 울트라라고 하면 초(超)…라는 접두어로 사용되어 과격한 입장이나 그런 성향을 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에 ultra-royalist라고 불리는 일파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왕보다 도 더 우파’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5. 가터 훈장
영국의 최고훈장은 1348년에 제정된 ‘가터훈장’으로서 이것은 가슴에 달거나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발목에 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에드워드 3세(Edward Ⅲ, 1312~77, 1327~77재위)는 모후 이사벨라와 그녀가 사랑하던 신하 모티머에 실권을 빼앗기고, 명목상의 군주로만 앉아 있었으나 1327년, 모티머를 에드워드 2세 살해 및 스코틀랜드 원정실패의 책임을 물어 유폐(3년 후에 교수형에 처했다)하고, 모후 이사벨라도 1330년에 궁정에서 추방함으로써 왕권을 회복하고, 윈저궁에서 다시 한번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대관식에 참가한 모든 기사들에게 똑같은 ‘파란색 양말대님(garter)을 매게함으로써 한층더 대관식을 화려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가터훈장‘의 시초이다. 그러나 그 훈장이 오늘날의 것과 같은 형태로 제정된 것은 15세기 중엽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터훈장’에 관한 제정 경위에는 또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솔즈버리 백작부인이 궁중에서 양말대님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당시의 귀부인으로서는 대단히 버릇없는 행동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그것을 가만히 집어서 자기 발목에 맴으로써 마치 자기 것이 떨어진 것을 맨 것처럼 해서 그녀의 실수를 커버해 주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우자 왕은
“사념(邪念)가진 자들에게 재난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 말이 ‘가터훈장’에 명문으로 새겨져 있는 것은 이에 유래된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크레시전쟁에서 돌격신호로 왕이 양말대님을 내어 흔들었던 고사를 기념한다는 것이다.
6. 마녀재판
중세기의 사상은 교회의 엄중한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무지한 민중은 교회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주문에 의지한다든지 괴이한 기도에 마음을 붙이곤 했다.
특히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인 만큼 약초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닌 초인간처럼 존경받거나 무서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단지 인간정신에 대한 가르침만으로 그치지 않고, 자연계와 인간계의 진리를 모두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여 이런 가르침을 위반하는 자는 악마에게 영혼이 침해당한 이단으로 규정하여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구한 세월동안 몇 백 만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피살되었다. 이런 재판을 마녀재판이라고 부른다.
하긴 마녀라곤 하지만 여성에 한하지 않고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판단된 남녀는 모두가 마녀로 규정되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쟌 다르크가 1431년 종교재판에 의해 화형에 처해진 것도 그녀가 괴이한 가르침을 신봉하는 마녀라는 구실 하에서였다.
마녀는 대부분이 늙고 모습이 추악하여 기분 나쁜 여성으로 되어 있지만, 쟌 다르크의 예에서 보듯이 민중을 놀라게 할 만큼의 여장부라든가, 재치 있는 여자도 가끔 마녀의 대상으로 되었다. 이렇게 마녀로 만드는 것은 대부분이 민중이었는데 민중의 혐오나 밀고 없이는 제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교회라 해도 그리 간단하게 종교재판권을 발동하지는 못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처럼 태풍이 있었던 것을 마치 마녀의 장난으로 하여 대량의 용의자를 체포 처형한 예도 있기는 했다.
마녀재판에는 의례 고문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고문은 원래 용의자의 의식을 잃게한 다음 반무의식 상태에 놓고 자백을 강요한 것으로서, 매우 잔혹한 방법이 쓰이었다. 고문에 못이겨 자기가 마녀임을 자백하면 당장 화형대에 보내어 처형했던 것이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 정적을 숙청했거나 할 때도 구실을 이데올로기의 위배에 붙였는데 이것은 중세기 종교재판의 선례에서 그 원형을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