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년 전「탐라순력도」에 그려진 산방굴사 소나무(왼쪽)와 재선충병으로 죽은 산방굴사 소나무(2013. 11)
극심한 가뭄 때는 구황식품으로 이용 조상들의 목숨 구하기도
다양한 건축자재…집·배의 재료·관(棺) 만드는데 중요한 재목
최근 제주에서 이름난 산방굴사 소나무가 재선충병으로 죽었다. 이 산방굴사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 거센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암벽에서 꿋꿋하게 살아왔으나 한 순간에 재선충병에 감염돼 안타깝지만 앞으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10년전(1702년 11월 10일) 이형상 목사는 산방굴사에서 이 소나무를 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당시 이 목사는 화공 김남길을 시켜「탐라순력도」에 산방굴사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를 그리도록 했다. 또 영조 30년(1754) 제주 3읍성에 돌하르방을 만들어 세우도록 한 김몽규(金夢 ) 목사도 대정현을 다녀가면서 이 산방굴사에 들러 소나무를 보며 자신의 이름을 굴사(窟寺)의 벽에 새겼다. 대정의 역사와 문화를 한 아름 안고 있는 이 산방굴사 소나무를 보면 부해(浮海) 안병댁(安秉宅, 1861~1936)의 '절벽의 소나무 숲(側壁松林)'라는 시가 저절로 떠오른다.
'절벽은 오를 수 없고 보기에도 위태로운데(絶壁無攀見亦危)/소나무는 거꾸로 늘어져 가지가 늙은 용 같네(松生 倒老龍枝)/땅이 위급한지 진나라 관리는 아니 오고(地危自不秦官到)/새와 구름만 홀로 점하여 때로 오가는 구나(來往鳥獨占時)'
소나무야 소나무야
유명한 노래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도 무색하게 지금 제주의 숲은 마치 저녁놀이 덮고 있는 듯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다. 이제 걷잡을 수 없게 된 소나무 재선충병의 확산은 제주의 소나무와 한국의 모든 소나무 숲까지 위협하고 있다. 재선충병에 대한 현재의 방재대책은 안타깝게도 터무니없이 역부족한 상태이다. 금방 잘나야할 소나무가 많고 많지만 예산도 부족하고 소나무 절단 작업을 할 사람의 손도 너무 모자란 상태다. 큰일은 소나무 재선충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어서 정부 차원에서 시급하게 효과적인 대책이 이뤄져야 하지만 그것이 더디기만 한 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한라산을 먼저 보호한다는 대책을 세우고, 전도(全島)의 재선충병 방제와 소나무 제거 비용으로 앞으로도 수백억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올 겨울이 지나 매개충이 활동하는 시기인 5월이 오면 더욱 재선충병이 확산될 전망이다. 공식적인 보고에 의하면 올해 고사목은 약 17만 그루, 내년 약 5만 그루가 추가돼 모두 22만 그루를 내년 5월까지 긴급하게 잘라야 할 상황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눈에 식별되지는 않지만 이미 감염이 진행되고 있는 소나무가 더욱 많은 것으로 추정돼 재선충병 소나무는 22만 그루를 훨씬 넘어설 것으로 보여 소나무의 미래가 캄캄하기만 하다.
지상에 보도된 대로 소나무 재선충병은 '솔수염하늘소'와 '북방수염하늘소'란 매개충이 먹이를 먹을 때 입을 통해 재선충이 소나무, 해송, 잣나무 등에 옮기는 병으로, 재선충의 크기는 0.6~1㎜ 정도이며 목재운반, 조경수 이동, 매개충의 자력이동 등의 방법으로 언제든지 다른 소나무로 전이되면서 발생지 주변으로 확산된다.
실제로 지금의 상태로 가다가는 전국의 소나무가 적어도 수십년 안에 사라질 판이다. 만일 소나무가 사라지면 수천 년 이어온 한국인의 소나무 문화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우리 곁에서 함께 해온 또 하나의 삶의 문화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데 소나무가 없는 우리 동네의 풍경을 생각해 보라.
소나무는 소나무과 소나무속에 속하는 상록교목이다. 이름도 다양해서 솔나무, 송목(松木), 적송(赤松), 육송(陸松) 등이 자주 불리고, 간혹 송유송(松油松), 여송(女松), 자송(雌송 등으로도 부른다. 소나무속은 잣나무·누운잣나무·섬잣나무·백송이 속하는 단유관아속과(單維管亞屬)과 소나무·해송이 속하는 쌍유관아속(雙單維管亞屬)으로 나눌 수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일본·만주의 모란강 동북쪽으로부터 중국의 요동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하며 우리나라 나무들 가운데 가장 넓은 분포 면적을 가지고 있고, 그 개체수도 가장 많다. 남쪽 제주도에서부터 함경북도까지 소나무가 이르고 함경북도 북부지역에는 소나무 개체수가 소량으로 나타난다.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소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신라 화랑도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한다(任慶彬,1994).
민중의 벗, 소나무 구황과 약효
솔잎은 명절이 되면 절변, 솔변을 찔 때 떡 밑에 깔아 상큼한 향기가 나게 했으며, 극심한 가뭄 때 구황 식품으로도 이용돼 우리네 조상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소나무 껍질은 독이 없고 굶주림을 막는데 쓴다'고 했다. 조선시대 구황을 위한 매뉴얼「구황촬요(救荒撮要)」에는 '솔잎은 오장을 편안케 하며 배고프지 아니하게 하니, 솔방울과 송진, 껍질, 뿌리의 껍질은 곡기를 그치게 하는데 오직 솔잎이라야 바로 곡기를 그치게 한다. (…) 솔잎을 찧고 빻아 자루에 넣거나 헝겊에 싸서 단단히 매어, 흐르는 물에 담갔다가 사나흘 지나거든 내어 쪄서, 볕이나 구들에 말려서 찧으면 쓴 맛이 없다'고 하여 굶주림을 이기는데는 소나무에서도 솔잎을 최고로 치고 있으며, 맛있게 먹는 방법까지 말하고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소나무와 관련된 처방을 기록하고 있다. '송화가루는 4월 꽃 필 때에 즉시 채취해야 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다 떨어진다', 송화 가루의 약효는 '몸을 가볍게 만들고 병을 치료하는데 소나무 껍질이나 솔잎보다 낫다'고 한다.
솔잎은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채취할 수 있으나 되도록 솔잎에 물이 차오를 때인 여름철이 더욱 좋다. 송엽주 만드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솔잎을 따서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깔고 끓는 물을 부어 2~3일 두었다가 솔잎을 꺼내버리고 그 물을 체나 삼베로 거른 후에 다시 항아리에 붓는다. 그 솔잎 물에 찹쌀을 쪄서 누룩가루와 섞은 후 항아리를 잘 봉하여 3~6개월 보관해 두면 좋은 송엽주가 된다.
송엽주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은, 솔잎을 먼저 항아리 안에 얇게 펴 놓고 그 위에 설탕을 적당히 덮어 주고, 또 다시 켜켜로 솔잎과 백설탕을 되풀이해서 깔면서 원하는 분량을 넣은 후 시원한 곳에 약 6개월 이상 저장해 두었다가 그것을 꺼내 체나 삼베로 거른 다음 다시 저장해 두면서 필요할 때마다 마시면 된다. 송순주나 송화주를 만드는 방법도 이와 같으나 송엽주와 달리 송순주와 송화주는 4월께 송순과 송화가 필 때가 아니면 술을 담글 수가 없는 번거로움이 있다. 송엽주는 재료가 흔하고 쉽게 만들 수 있어서 그야말로 민중의 약주라고 할 수 있다. 맛은 송순주가 송엽주에 비해 좋지만 계절에 맞춰 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마실 때는 1일 3회에서 4회이고, 1회 마시는 양은 20~30㏄가 적당하다. 송엽주는 신경통과 류마티스에 효과가 있다고 전하는데 특히 장마철에 발생하기 쉬운 류마티스에 좋다고 한다. 또 솔잎을 씹어 그 생즙을 먹으면 임질이나 위장이 좋아지고 생선중독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솔잎을 입에 오래 물고 있다가 뱉어내면 신경성 치통, 풍치, 신경성치은염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진태준, 1977).
소나무 목재의 이용
소나무는 고금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무였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제주의 마을 주변 소나무숲은 아이들의 병정 놀이터이자 우리네 부모들의 땔감 생산지였다. 뒷산에서 아버지는 소나무 가지를 쳐서 묶어 겨울을 날 땔감을 장만했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팬 마른 소나무 장작을 두어 단씩 지어 나르거나 '솔또롱(솔방울)'을 주어 마대에 담아 집으로 지고 왔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솔잎을 긁은 후 둥그렇게 말아 등짐으로 운반하여 마당에 솔잎 눌을 만들어 두고 겨울을 나는 부엌용 땔감으로 썼다.
소나무는 다양한 건축자재 즉, 집을 지을 때, 배의 재료, 관(棺)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재목이었기 때문에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아예 소나무 채취를 금지했지만 목재 수요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부조리로 인해 소나무 관리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 암묵적으로 도벌이 성행 했다.
특히 해안을 따라 자라는 큰 소나무는 조선용(造船用)으로 중요시되어 보호돼 왔고, 왕실 종친이나 귀족들의 장례용 관곽재료로 애용되었는데 소나무 안쪽의 심재가 황적색을 띤 소나무는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하여 고급 관곽재료로 인기가 높았다. 왜구가 극성하던 조선 초기에는 우리나라 남해안이 공도(空島) 정책으로 섬을 비우게 되자 왜구들은 멋대로 빈 섬에 들어가 여러 날 살면서 선재용(船材用) 소나무를 잘라 바다로 달아나기도 했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