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승산마을에서 부자 기운 받아 볼까
한국의 재벌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홍제 모두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더위가 한풀 꺾이니 그늘을 찾던 바쁜 걸음에 여유가 깃든다. 이럴 때일수록 고즈넉하고 호젓함이 충만한 한옥마을 여행은 어떨까? 진주 승산마을에는 100여 채의 한옥이 담과 담 사이로 줄지어 서 있다. 유독 부자가 많이 살았다던 승산마을, 그 마을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 글 백지혜 사진·동영상 김정민
우리나라를 이끈 대표 기업가들의 출신지 남해고속도로 지수 나들목을 내려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씩만 꺾으면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이 나온다. 5㎢ 남짓한 면적에 137가구, 241명의 주민이 사는 이 마을은 여타 한옥마을답게 아담하고 조용하지만, 뭔가 다르다. 우리나라 경제사를 이끈 대표 기업가를 다수 배출해 낸 특별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가 생가가 나타난다. 마을을 감싸는 담장 길이만 무려 5㎞. 쉬어가며 여유 있게 돌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300여 채에 달하던 한옥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99채만 남았고 일부 후손들이 살고 있지만 거주하지 않고 관리만 하고 있다. 대부분의 집은 문이 잠겨 있는데, 돌담 너머로 집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큰 고택들과 실개천, 담장 너머로 핀 능소화는 위화감 대신 옛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우렁이, 올챙이들이 노니는 논, 말끔히 정비된 산책길 등은 이 마을이 깨끗하고 단정한 마을이라는 인상을 준다.
부자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 진주 승산마을 승산마을은 600년 전부터 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집성촌이었다. 300년 전부터는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이주해 삶의 터전을 일궜고 두 가문은 예로부터 겹사돈을 맺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두 가문의 명성 또한 자자했는데 천석꾼 이상만 16가구, 그 재산이 모두 5만석에 달했다. 이는 당시 마을 전체 재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래서 한양에서는 승산마을의 부자 집안과 혼맥을 맺기를 원했고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승산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부자들의 기운을 받아 가기 위해 기업가들 생가 문고리를 만진다고 한다. 또는 24시간 개방된 민간 공원 효주원의 ‘기바위’ 위에서 정좌로 한참을 앉아있다 가곤 한단다. 실제로 사업이 잘 풀렸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면 기분까지 개운해진다고 하니, 얼마나 특별한 기운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기업가 정신의 산실 옛 지수초등학교 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옛 지수초등학교가 있다. 1921년 개교한 시골 학교지만 졸업자들을 보면 한국 기업들이 줄줄이 거론된다. 1980년대 당시 한 일간지에 100대 기업인 중 30명이 지수초등학교 출신이라 소개됐다고 하니 저절로 입이 벌어질 만하다. 구인회 LG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모두 1회 졸업생으로, 세 사람은 함께 교정에 ‘부자 소나무’를 심었다. 100살이 넘는 이 소나무가 부러지거나 아프면 그룹 차원에서 소나무 전문가를 파견해 치료한다. 학생들이 어릴 적 심었던 작은 소나무가 학교 건물 높이를 넘길 만큼 자란 걸 보니 세월의 깊이가 절로 느껴진다. 현재는 졸업생이나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포토 존이 됐다. 지수초등학교는 2009년 폐교된 이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2016년 12월 학교의 소유권이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진주시로 바뀌면서 보존 방안이 진척됐다. 보존 작업에 앞장섰던 이충도 지수초등학교 총동창회 사무총장은 “하마터면 대한민국 창업주를 배출한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 했죠. 힘들게 지킨 만큼 앞으로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을 계승시킬 수 있는 소중한 장소로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눔과 베풂, 진짜 부자 정신이 있는 곳 승산마을이 지금껏 유지돼 올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뭘까? 풍수지리로 보면 마을 뒤에 방어산이 날개를 펼친 새처럼 보인다. 꼭 머리가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고 마을로 내려앉는 형상같다. 또한 옛 지수초등학교 뒤로 지수천이 흐르고 남강 또한 지수면을 휘감아 흐른다. 하지만 풍수지리도, 재력 때문만도 아니다. 만석꾼 허만진 옹은 어려운 이웃들이 춘궁기에 먹을 양식이 없을 때도 그냥 곡식을 나눠주지 않았다. 방어산에 있는 돌을 집 앞마당에 가져다 놓으면 그때서야 쌀 한 말씩을 ‘노동의 대가’로 지급했다. 사람들이 쌀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쌀을 갖도록 해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할 목적이었다고. 그렇게 가져다 놓은 돌들이 쌓여 마치 1만 2000봉우리인 금강산을 닮았다고 해서 ‘승산마을 금강산’으로 불린다. 또, 허만정 GS 창업주의 아버지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가였던 만석꾼 허준 선생은 자기 재산이 자식들에게 화로 남을 것을 염려해 국가와 이웃, 친족, 조상으로 4등분해 재산을 배분하겠다는 내용을 ‘허씨의장비’에 새겼을 정도다. 어쩌면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나눔과 베풂의 마을 기풍, 근검절약하는 정신과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자금 지원의 구국·구휼 정신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아이와 함께 부산에서 여행을 온 임태용(46) 씨는 승산마을 여행의 키워드로 부자나 재벌이 아닌 ‘여유’를 꼽았다. “마을길을 걷다가 아이가 매실 열매가 신기했는지 만졌는데, 동네 어르신께서 얼마든지 따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요”라며 주민들의 넘치는 친절과 호의가 인상 깊이 남을 것 같다고 했다. 지수관광 테마 마을 조성사업 활발히 진행 중 진주시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의 협업으로 옛 지수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K-기업가정신센터와 전문 도서관을 건립·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문화재 보수, 기업가정신 문화탐방로 조성 등 승산마을을 지수관광 테마 마을로 조성하는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국립역사관 건립, 기업가 생가 개방, 의령·함안과 연계한 K-기업가정신 관광벨트를 구축해 지수면을 2022년 말까지 세계적 기업가정신 마을로 조성할 계획이다. 앞서 한국경영학회는 2018년 7월 진주시를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의 수도로 선포했다. 조성사업 일환으로 마련된 승산 마을 내 숙박 시설도 지난 6월 개소했다. ‘지수남명진취가(게스트하우스)’는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20인을 수용할 수 있고, 2인실, 4인실, 6인실 등 6개 방을 갖췄다. 기존 한옥을 매입, 보수해 증축한 ‘승산에부자한옥(한옥숙박시설)’은 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를 느끼기에 적격이다. 예약은 진주시청 통합예약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진주 승산마을 위치 진주시 지수면 지수로 483 문의 055)749-2616(지수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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