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어머니
모처럼 친정에 들러 어머니와 한 이불에 들었다. 불을 끄자 희붐한 달빛이 너울처럼 어머니와 나를 덮는다. 모녀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아 이 얘기 저 얘기를 두서없이 이어갔다. 어머니는 웬일로 이제껏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외조부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외조부는 일찍이 학문에 마음을 두셨다고 한다.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땅 일구며 논마지기 늘려가는 일보다 학문하는 것이 좋았다. 그 일념이 얼마나 강했던지 몇 차례 고향을 떠나 서울에 몸을 숨기기까지 했다. 외조부는 4형제 중 둘째였는데, 외증조부는 둘째를 유독 총애하여 잠적한 자식을 번번이 찾아내었다. 효자였던 외조부는 결국 부친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 끝내는 향리로 돌아왔고, 서당 훈장을 하면서 학자도 농부도 되지 못한 반편이 삶을 평생 한스러워 하였다.
어머니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할아버진 술 한 잔 들어가면 곧잘 시조를 읊곤 하셨지. 인물이 좋으셔서 주막에 가면 여자들이 흠뻑 빠져들곤 했어. 술이 과하신 날엔 효도가 당신 꿈을 앗아가 삶이 이도저도 아닌 얼치기 인생이라고 사랑에서 홀로 우시곤 했지. 그런 날이면 할머니가 나를 슬며시 불러 주막집 주모를 불러오라고 했단다. 캄캄한 밤, 고샅길 지나 주막엘 가려면 얼마나 무섭던지 등골이 다 쭈뼛했지. 젊은 주모는 나를 보면 손에 엿을 쥐어주곤 했는데, 나는 엿 받아먹는 재미에 무서워도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지 뭐냐. 언니들이 둘씩이나 있는데도 왜 어린 나에게만 그런 심부름을 시키시는지 그 때는 알지 못했어.”
내가 외할머니를 처음 뵌 것은 유아시절이었겠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모습뿐이다. 해마다 여름 방학이면 이종사촌 오빠들과 어울려 시골 외가로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왔느냐?” 한 마디면 그 뿐 다른 말씀이라곤 없으셨으나 할머니는 살가우셨다. 그래도 나는 할머니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노인네가 시골 할머니답지 않게 깔끔한 까닭도 있었지만 보다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나는 꽃을 좋아해 외가에 갈 적마다 산야를 헤집으며 들꽃들에 빠져 노닐었다. 어느 해 여름, 뒷산에 올라 주황색 산나리를 한줌 꺾어 가지고 왔다. 반쯤 열려 있는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은 고요하고 땡볕에 달궈진 눈부신 마당만이 나를 맞아주었다. 꽃을 꽂기 위한 뭔가를 찾으려고 부엌으로 들어갔으나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았다. 다시 광을 뒤지니 초록색 빈병 하나가 보였다. 거기에 물을 받아 꽃을 꽂은 후 툇마루에 놓고는 다시 냇가로 나갔다. 외가 식구들이 보면 좋아할 거라고 상상하면서.
얼마 후 돌아와 보니 나리꽃이 마당 가운데 버려진 채 시들어 가고 있었다. 시든 꽃은 꽃잎과 꽃술의 강렬한 색감 때문인지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있는데 외숙모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할머니가 버리셨다고 했다. 순간 내가 마당에 버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무안했다. 유리병이 귀했던 시절이니 할머닌 풀꽃 따위를 가당찮게 여겨졌던 모양이나 나는 매정한 할머니가 한없이 야속하였다.
그 날 이후 외가에 갈 일은 드물어졌고 고등학교 시절에 할머니는 세상을 뜨셨다. 부음이 전해지던 날 어머니는 벌건 눈시울로 안절부절 못하였지만 나는 웬일로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주모가 떠나자 할머니는 다시 마을의 젊은 과부를 불러들이셨어. 할아버지가 워낙 엄한 성품이기도 했지만, 할머닌 할아버지에게 정말로 지극 정성이었다. 사랑채로 과수댁이 들어가면 할머니는 외삼촌을 등에 업고 마당을 한 없이 왔다 갔다 하셨지. 흰 저고리에 잿물 들인 치마를 입고 그 위에 널찍한 행주치마를 두르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구나. 할머니는 그 근처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셨어. 그리곤 사랑방 불이 꺼지면 돌아 서 혼자 우셨어. 그래도 나는 아무 영문을 몰랐으니….”
하얗게 밤이라도 지샐 것 같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시나브로 잦아들고 얕은 콧소리만 들려온다. 달빛은 아직 어머니의 창가에 유영 중이고 그 달빛을 받으며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간다. 희부연 달빛이 여인의 흰 무명 저고리를 적시는 밤, 등에 업힌 막둥이는 어미 등에서 잠투정을 하고, 살구 빛 일렁이던 사랑방 창호는 한 순간 먹빛으로 변한다. 여인은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려는 건지 시린 달빛에 불덩이 마음을 식히려는 건지 빈 마당을 서성인다. 그녀 눈가에 고였던 물기가 달빛을 받아 번뜩인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을 손수 들이고 여인은 밤이 이울도록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참으로 속없었던 여인이다. 처용은 아름다운 제 아내와 동침하는 역신을 체념 어린 결단으로 수용했다지만 그녀는 한 수 더 떠 지아비 곁에 외간 여자의 두 다리를 엮어 놓질 않으셨나. 외조부께서 대놓고 첩실을 들인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역신이 처용의 노래에 물러갔다면 외조부의 여인들은 조강지처의 애틋한 정에 물러갔으려나. 옛 여인들은 자신을 지키려 은장도를 지녔는데 할머니는 여필종부 하기 위해 당신 가슴을 은장도로 찌른 모양이다.
세월은 흐르고 가치관은 변하였다. 요즘엔 배우자의 부정으로 파경에 이르는 부부도 적지 않다. 그들에겐 우리 할머니가 어찌 비칠지는 모르겠으나 시대가 변한들 인간의 품격이야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전근대적 할머니의 모습에서 초현대적 여성성을 보는 듯 했다. 고졸한 골동품에서 때론 현대적 감각이 느껴지는 것과 유사한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푸른 달밤, 나는 그 달빛 아래 어슴푸레 보이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할머니 임종 시에도 덤덤했던 눈시울이 뒤늦게야 젖어든다. 아, 할머니!(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