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고 묻거든
딸 둘을 낳아 기르는 동안 나는 늘 꿈을 꾸었다. 자유를, 고독을, 아무 간섭 없이 향유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칠 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오 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와서 사는 동안 사는 일이 늘 시끌벅적했다. 역할과 노릇에서 자유롭지 못해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들에 눌려 살았다. 일상의 여러 일들을 해치우는 일만도 버거웠으므로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자투리 시간이 생겨나도 지쳐 있는 몸을 추스르기에 바빴다.
사는 게 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내 삶이 아닌 남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는 느낌이 늘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정체성에 대한 풀 수 없는 질문들에 늘 발목이 잡혀 있었음에도 남의 장단에 북 치고 장구 치며 일상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삶과 죽음, 신과 사랑, 존재와 무, 그런 근원적인 것들에 일찍부터 안테나가 닿아 있었지만 깊이 천착할 여유가 없었다. 부족한 열정과 게으름 때문에 시간을 헛되이 떠내려 보냈다.
둘째까지 결혼시키고 나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부턴 내 세상, 내 맘대로다. 숙제는 끝났고 남는 게 시간일 테니 미루어둔 나만의 삶을 살아야지. 오래 꿈꿔 왔던 노경(老境)의 한유(閑遊)를, 내 몫의 삶을 누려보고 가야지. 맘껏 읽고 맘껏 쓰고 모자란 공부도 보충하면서 존재와 본질에 대한 답을 내 방식대로 찾아보고 가야지, 그렇게 야무진 꿈을 꾸었다.
일상이란 놈은 인정머리 없는 안주인 같아서 일생 그렇게 몰아세웠음에도 상기도 짬을 내주지 않는다. 집 가까이 둥지를 튼 두 딸 때문에 전보다 더 바빠져 버렸다. 요즘 세상은 어떻게 된 건지 시집을 보내는 게 아니라 장가를 오는 거여서 딸을 출가시키면 남이 잘 키워 놓은 아들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다. 남의 헌칠한 아들로부터 장모님 대신 어머니 소리를 듣는 대신 늘어난 권속과 아이들까지, AS를 해주어야 한다.
직장 일에, 육아에, 살림에, 재테크까지, 확장된 역할들로 전사처럼 살아내는 딸들 뒤에는 젖은 손으로 간을 보고 손자들 치다꺼리에 허리가 휘는 친정엄마라는 이름의 우렁각시들이 숨어 살고 있는 것이다. 눈 딱 감고 모른 체하라고?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가 힘들다. 한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려면 다른 한 여자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사회구조 때문에 여간 독하게 맘먹지 않고선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딸이 힘들어하니 어쩔 수가 없지 않나.
어렵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동안 절로 알아 버린 비밀이 있다. 바깥으로 날아오르는 가장 좋은 방편은 안으로 숨어드는 일이라는 것. 제 몸에서 나온 실로 고치를 짓고 저를 가두는 누에처럼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야 날아오를 동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안이 바깥을 낳는 기묘한 분만, 그것이 곧 글쓰기일 것이므로. 어둠을 털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침잠할 시간이 필요할 터이나 일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휴직까지 한 딸애를 돌봐야 했고 무급에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손자 손녀와도 놀아주어야 했다. 어렵게 임신한 딸애가 입퇴원을 반복하다 출산할 때까지 병실 지킴이로 수발도 들고 말벗도 되어 주어야 했다. 뱃속에서부터 할미를 인질 삼은 아기가 태어난 지 겨우 두 주 지났지만 그 귀여운 도둑에게 얼마나 내 시간을 침탈당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딸로 마누라로 친정엄마로 할머니로, 가면들을 바꿔 쓰며 늙어가고 있지만 이런 분주다망 속에서도 깨달아가는 게 있다.
그토록 오래 궁금해하던 질문, 성경에도 불경에도 나오지 않던 답을, 면벽을 하고 명상에 몰입해도 구해지지 않았던 삶의 이치와 존재의 이유를 어느 날 문득 네 살짜리 손녀, 그 교외별전으로부터 터득해 버렸으니.
글줄이 막혀 서성이다 보면 하루 한나절이 금세 지나간다. 가슴 속에 만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글이 되고 그림이 된다는 추사 선생 말씀대로 천 편을 읽어야 일률을 얻어낼 만큼 연비가 낮은 게 글쓰기이다 보니 적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를 서성이면서 시간만 축낼 때도 많다.
그날도 그랬다. 젊은 날 못 찾아 먹은 나를 찾아보겠다고 되지 않은 글을 잡고 끙끙거리다가 네 살 손녀의 부름을 받고 컴퓨터를 끄고 후다닥 달려갔다. 마음은 분주했지만 느긋한 척, 숨바꼭질도 하고 공주놀이도 하고 <겨울왕국> 영화도 다시 보며 한나절 잘 놀아주었다. 손녀가 너무 행복해했다. 산머루 같은 눈빛을 보며 불현듯 터득했다.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나라는 대롱 속의 남은 시간들이 어떻게 새 대롱 속으로 흘러 들어가 그의 자양이 되어 주는지를.
남들은 진즉 아는 답이겠지만 지진아처럼 뒤늦게 터득한 답. 그 삶의 비의를 꺼내놓을 차례다. 아무리 내 안을 들여다보아도, 경전을 읽고 면벽을 해도, 존재의 의미는 찾아지지 않는다. 왜 사냐고? 누군가에게 필요해서, 써 먹히기 위해 산다. 세 살 손자에게, 늙은 어머니에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 아기에게, 전자레인지 하나 돌릴 줄 모르는 물경 사십 년 룸메이트에게,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여서, 여태도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내가 없다. 존재의 의미도 정체성도 없다. 내 바깥에, 너와 나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천 사람에게 천의 얼굴로 살다가는 인생. 인(人) 보다 간(間),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답이다. 인드라망의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어 영롱하게 빛나듯 삶의 모든 의미는 관계에서 찾아진다.
이 평범한 진실을 알기 위해 이제껏 그리도 터덕거렸던 걸까. 어쨌거나 다행이다. 여기저기 써 먹히고 부려 먹힐 수 있어서. 아직도 여기저기 불려갈 데가 많아서.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건 버려질 때가 가깝다는 뜻이다. 써 먹히지 않으면 삭제시키는 것, 그것이 이 행성의 불문율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