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좌마을 (將佐)
거제대교를 건너 조금 오다보면 청곡리가 나오고 이어서 청곡리 지석묘가 왼편에 보인다. 거기서 몇 백 미터 더 가면 지석리가는 표지판이 나온다. 조금 올라가다보면 산밑에 아담한 마을이 보인다. 그곳이 장좌마을이다.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좀은 길을 가다 보면 지석 소류지가 나오고 이어서 장좌 마을이 나온다. 소유지 부군에서 배추밭에 농약을 치고 있는 조삭불씨와 지석마을 김재청씨가 들려주는 장좌마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 마을은 옛날에 장자라는 사람이 은거하여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 때 장군이었던 수성빈씨(壽城賓)가 입주하여 살고 있는 마을이라 장좌라 하였다고 하며 그의 묘는 둔덕면 거림리 막하터 뒷산에 賓政丞墓라는 큰 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옛날 이 고을에 이 **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밀수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머슴이 4-5명, 가솔들과 일꾼 등 3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지석부두에 보면 간혹 데구리배가 4-5척 정박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인부가 2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돈이 많고 발이 넓어 감히 관원들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 위세가 짐작이 간다. 대궐같은 집을 짓고 위세를 떨치던 가문도 집이 몰락하려고 하니 하루 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그 연유는 밀수왕의 둘째 아들이 매일 술만 먹고 분탕질만하여 어머님께서 바지게 작데기로 때린 것이 그냥 죽고 말았으니 그때부터 가새가 기울기 시작하여 몰락의 구렁텅이로 빠졌다고 한다. 그 뒤에 이 집이 돈을 많이 번다는 속설때문에 다른 가문에서 구입하여 보존하고 있으나 주인은 부산으로 살로가고 옛모습만 남아 있다고 한다.
한순간 누렸던 부귀영화도 하루 아침에 날려버리고 저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보니 '삼대 부자는 없다' 는 말이 떠 오른다.
그런데 거제에는 장자라는 이름이 여러곳 있다. 나의 고향 천곡에는 장자골이 있으며, 덕포에도 장자골마을이 있다. 이곳의 지명은 장자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통영에는 장자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에는 금이 많이 나와 1930-60년대 까지 지하 200m까지 땅굴을 파서 작업을 하고 분리 작업은 석포해서 했으나 지금은 바닷물이 침수하여 볼 수없다고 하니 아쉽다. 그 지명의 연유는 다음에 조사하여 올려 놓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자라는 마을이 형성된 연유는 장자라는 사람이 살았다기 보다는 長者 즉 2번과 3번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나하고 생각해 본다.
1. (나이나 지위·항렬 따위가) 자기보다 위인 사람. 어른.
2. 덕망(德望)이 있고 노성(老成)한 사람.
3. ‘큰 부자’를 높이어 이르는 말. 거부(巨富).
옛날 농사를 위주로 살던 시절에는 농사도 잘되고 산도 많아 살기 좋은 곳이어서 유림들이 꾀 있었으며 도유사(都有司)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업화 물결이 일어나면서 거제에도 조선소가 들어서자 한명 두명 빠져나가고 9만 여 평이나 되던 농토는 폐허가 되고 현재는 600여 평 정도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니 人生無常이다. 지금은 젊은 사람은 없고 전부 늙은이 뿐이고 소득이 없는지라 국가에서 지원하는 약간의 돈과 자식들에게서 붙여오는 돈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조씨와 이씨의 집성촌이었으며 일부 빈씨와 강씨도 살았다고 한다. 일지기 학문에 눈을 뜬 사람이 많아 국회의원 조형부씨도 이 마을 출신이며 이형덕 판사도 이곳 출신이라고 하니 대충 짐작이 간다.
마을 을 돌다보니 마을 어구 밭 언저리에는 아주 오래된 모과나무와 감나무가 마을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본 나무 중에 가장 오래된 나무로 여겨진다. 거제시 자료에 의하면 수령이 300년 정도나 되며 섣달그믐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이 되어 있으나 내가 보기로는 150년 정도 된 나무인 것 같다. 실제 거제에 있는 나무 중 수령이 300년 이상 된 마무는 거의 없는 것으로 사료 되나 기록에는 대부분 300년으로 되어 있다. 모과나무 바로 옆에는 약 100년 가까이 된 감나무가 있는데 관리가 되지 않고 수고가 너무 높아 감히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어찌하던 식물탐사 한다고 돌아다녀 보지만 아직도 조사할 내용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어느 한 분야에 도가 티일려고 하면 아마 30년은 연구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겨우 10년을 넘겼으니 20년은 더 연구를 해야 그래도 그 분야 조금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참고로 달성빈씨(수성빈씨)의 유래를 찾아 보면
달성빈씨(達城賓氏)
빈씨(賓氏)는 본래 중국 성씨이다. 주나라 경왕(景王) 때 대부(大夫)를 지낸 빈골주(賓骨周)가 있었고, 노나라 때 빈모가(賓牟賈)라는 공자의 제자가 있었다. 달성빈씨의 시조 빈우광(賓于光)은 바로 빈모가의 후예다. 빈우광의 호는 송헌(松軒)이다. 그는 송나라 말엽에 한림학사를 지내다가 송이 망하자 서적 1만7천권을 가지고 고려로 망명, 학풍을 진작시켰다. 충숙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를 수성군(壽城君)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수성은 달성과 대구의 다른 이름이다.
빈씨의 본관은 수성, 달성, 대구, 영광의 4본이 있다. 그러나 수성, 대구, 달성은 같은 본이며, 영광빈씨의 유래는 전해오지 않는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에서는 이외에 밀양, 의성이 나타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0가구가 있다.
옛날 장수가 살던 장좌마을
거제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
모과나무는 플라타너스와 같이 줄기에 무늬가 있다.
담쟁이덩굴과 생존경쟁을 벌리는 감나무 (거제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 수령 120년 정도)
우리가 어릴 때 똥감이라고 부른 감나무(감이 많이 달린다고 붙여진 이름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