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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산 믿음, 죽은 믿음/약 2:14-17
출 처| 박봉수목사
믿음은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김치는 담가 놓고 나면 계속 변합니다. 발효를 통해 점점 익어갑니다. 아주 감칠 맛 나게 익습니다. 그런데 발효가 조금 더 진전되면 시어지고 나중에는 먹을 수 없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 따라 잘 관리하면 좋은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 관리하게 되면 좋지 못한 믿음으로 변질됩니다. 우리가 이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잘못 변질된 모습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거짓 믿음입니다.
출 32장을 보면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40일 동안 모세가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로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크게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금으로, 돌로, 나무로 자꾸 우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절합니다. 오늘도 절에 가면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에 오르다 보면 성황당에 치렁치렁 이런 것들을 늘어드려 놓았습니다. 이방 종교는 온통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거짓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믿음을 보시고 진노하고 계십니다. 거기 절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지 않으십니다.
참 믿음은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영안을 열고 영이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리의 믿음이 이런 거짓 믿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참 믿음을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적은 믿음입니다.
마 14장을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흥미로운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주님을 보면서 베드로는 자기도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청했습니다. 주께서 오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잘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을 보자 무서워하게 됐고, 그 결과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구해 주신 뒤에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다가 점점 믿음을 잃어갑니다. 세상에서 불어오는 환란, 풍파, 갖가지 사건 사고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게 되고 그 결과 믿음을 잃어갑니다.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믿음도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큰 믿음은 세상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볼 때 지켜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풍파가 태풍처럼 거세게 밀려와도 우리가 주님만 의지하면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이 변질되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죽은 믿음입니다.
약 2:26을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행함이 빠지면 곧 죽은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산 사람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죽은 사람이 된 것처럼 신앙 생활 잘 하던 사람들에게서 행함 없어지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은 신앙생활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 둘은 구분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분리되면 둘 다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맹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은 하나로 연결되어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외면한 채 행함만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이 점의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슬그머니 행위가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행위 없이 믿음만 가지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참된 믿음은 행위로 증거 된다고 역설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17을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결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됩니다. 행함을 통해서 그 믿음이 더욱 성숙해 집니다. 그래서 행함과 상호작용을 이룬 믿음이 굳건하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문제로 무슨 게이트니 하는 문제들이 우리 마음을 너무도 무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월드컵 기간 중에도 대통령 아들이 구속되어서 월드컵으로 고양된 국가 이미지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ROTC(Republic Of Total Corruption) 즉 부패공화국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1천만이라고 자랑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눈부신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사회의 어두운 곳에 어김없이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있습니다.
최근 갤럽이 조사한 앙케트 결과를 보면 개신교인들이 불교인들이나 천주교인들과 비교해 볼 때 종교성이 월등히 강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스스로 신앙이 깊다고 보며, 종교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교리적 확신도 강하고, 종교적 모임에 참여도도 현저하게 높다고 나와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인들보다 기도도 훨씬 많이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으며, 전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가장 많이 내는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종교적인 헌신이 일상생활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양심적이거나, 더 선하게 산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남보다 더 법과 질서를 잘 지킨다거나, 어려운 이웃들을 더 살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개신교인들에 대한 시선이 별로 곱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믿음은 좋은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우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욕 타임스지가 지난 1000년 간 안간이 만들어 낸 것 중 각 분야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지퍼, 피아노, 나사못을 비롯하여 수많은 것들이 선정되었습니다. 그 중에 금속활자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가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여기에 수록된 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뽑혔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발명한 금속활자는 대량 출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출판의 혁명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 좋은 기술이, 수준 높은 지식이 적용되지 못해서 삶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압니다. 성경에 대해 잘 압니다. 그래서 남들이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본문 19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알지만 행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알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말로만 고백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관계와 행함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산다면 아버지께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마 7: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산 믿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죽은 믿음이 되 살아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죽은 믿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행함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축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 월드컵 선수들은 대단합니다. 4강까지 올라오면서 객관적으로 볼 때 도저히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팀들을 하나씩 물리쳤습니다. FIFA 랭킹 40위의 팀이 5위 포르트갈, 6위 이태리, 8위 스페인, 13위 미국, 그리고 38위 폴란드 팀을 물리쳤습니다.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이변이요, 기적입니다. 어느 하나 쉽게 볼 수 없는 팀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송종국, 이영표, 최태욱, 현영민, 이천수 이 5선수가 매일 숙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답니다. 이들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답니다. 그 말씀이 대하 14:1-2이랍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아무리 강팀이라도 주눅 들지 않고 믿음으로 달리고 또 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월드컵 역사를 바꾸고 있고, FIFA 랭킹 자체를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믿고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며 뛰고 또 뛰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산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주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좌절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앞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 속에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산 믿음은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냅니다. 좌절과 절망의 상황을 희망과 비전의 상황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상황이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고, 여건이 여의치 않다고 꿈도 꾸어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내 믿음이 꿈과 희망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다음으로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특별히 22: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철저하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침에 일찍이...”라는 구절을 통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100살에 나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제 큰 민족을 이루게 될 씨앗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버리라는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밤에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죽이러 가는 일을 앞두고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저 같았으면 하나님께 며칠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뒤 일을 생각한다든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순종할 준비를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100미터 출발선상에 선 선수들이 출발의 총성을 기다리듯이 지금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명하실까 기다리며 준비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부탁하시고, 명령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예배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탁과 명령을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우리나라와 이태리 축구 경기를 중국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웠던 것은 일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승리를 못내 배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기내용에 대해 문제 제기를 계속했습니다. 중국 신문에 우리의 응원문화를 비꼬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의 응원은 마치 동원된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 기사를 읽은 중국 분이 저에게 묻더라구요!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구호를 일사불란하게 외칠 수 있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보니까! 정말 그렇게 보이더라구요. 강제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처럼 정말 놀라운 수가 모였더라구요. 어디서 동원된 사람들처럼 똑 같은 옷을 입었더라구요. 마치 오래 연습한 뒤 모인 것처럼 구호나 함성을 지르고 노래하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척척 맞는지?
그뿐 아니라 또 이런 내용도 실렸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불과 15분만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런데 휴지하나 남지 않았다’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작은 실천을 모아서 이룬 정말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마다 시간을 내고, 돈을 써가며 참여하고 실천해서 이룬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도 믿기 힘든 기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생각이 떠 오르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고 믿어지면 미루지 말고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이 실천이 우리의 믿음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에는 죽은 믿음이 있고, 또한 산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잘 아는 것,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 것 여기서 머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으로 실천되어질 때 그 믿음은 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평소에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늘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즉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이 되게 하소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열매를 맺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