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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6장 31-35절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유월절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먹지 아니할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눅22:15-16).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이 유월절과 관련된 것을 다시 먹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구약에서는 유월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그림자로 예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월절을 통해 알리시던 바를 실체로서 실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림자는 필요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림자가 아닌 실체로써의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찬을 제정하셨는데, 그것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는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입니다(요6:48). 그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참된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실제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요6:35 참조). 즉 믿음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이고, 참된 믿음으로 먹고 마시는 자에게는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이렇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 성찬을 앞두고 가룟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 사건은 어떤 면에서 볼 때 굉장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씀도 듣고 이적을 보기도 하며 심지어 이적을 행하기도 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팔게 되었다고 할 때 결국 그에게는 참된 믿음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그에게는 참된 믿음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결국 그가 유기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유기자로 정하시고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유기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셨을지라도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핑계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누가복음에서는 ‘기록된 대로’가 아니라 ‘작정된 대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눅22:22), 작정하셨다고 해서 죄에 대하여 하나님 잘못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자의 결국이 이와 같다면 택자의 행보는 좀 다른가? 뜻밖에 오늘 본문은 나머지 열 한 제자에 대하여 소개를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무엇인기 물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의 경우 예수님을 판 자로 있는 반면, 나머지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을 지킨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자의 다름은 바로 이런 자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자 하시는 데 있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자리에만 가만 두시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죄를 짓고 난 뒤 죄 가운데 거한 상태로 있었다면, 택자들의 경우는 결코 죄의 자리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나 그 이면에는 그러한 사실을 뜻하고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선 3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 즉 예수님께서 잡히시게 되는 날을 말하는데, 그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서 번역하자면 걸려 넘어진다, 실족하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혹은 죄를 범하게 된다는 그런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태복음을 쭉 살펴보면서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팔리게 될 것도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 이후 부활하게 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잡히시게 될 때 제자들은 어떤 자로 있게 되느냐?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모습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자, 실족하게 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배반하고, 결국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결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기록된 바’입니다. 구약에 기록되기를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과 같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용하고 계시는 말씀은 스가랴 13장 7절인데, 거기 보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슥13:1-2)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부분이 나오는데, 스가랴 13장 7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13:7-9)
분명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방금 읽은 것처럼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고, 우상의 이름도 끊어져서 기억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하는 은혜언약의 내용을 말씀하실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시느냐?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칼의 권세로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게 될 것인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할 것이지만, 삼분의 일은 남아 마치 은과 금을 연단하기 위해 불에 던져 넣는 것처럼 하여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구분하여 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지금 예수님께서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하고 계신 것은 비록 지금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잡혀가게 될 때 다 흩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무엇까지 염두 해 두고 계시느냐? 그런 시험을 통해 연단을 받아 결국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까지 염두 해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가룟 유다와 나머지 제자들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가룟 유다는 마태복음 26장 24절 말씀처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듣는 자로 있습니다. 반면 나머지 제자들의 경우도 기록된 말씀대로 흩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면서 배반한 것, 그렇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기자에게 돌려지는 말은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화로 있다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시험을 통한 연단의 결과 여호와는 진실로 내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을 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바로 이것입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으시려고 까지 하시는데, 어떻게 그들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상 반드시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시험 가운데 놓이기도 하고, 시험을 통해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도 하는 모습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해 부인했다면 반드시 회개하여 돌이키는 일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이 유기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이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그리고 끝까지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는 내 백성이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고백하도록 하시느냐? 우리가 “하나님은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하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난 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잡히시게 될 때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하게 될 것이지만, 부활 이후 다시금 너희를 갈릴리로 모으실 것이라는 겁니다. 목자가 치면 양이 흩어지지만 목자가 다시금 서게 될 때 양은 바로 그 목자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모으시는 것만 말씀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여기에도 주께서 염두 해 두신 뜻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6-20) 오늘 본문 32절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난 뒤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 역시 갈릴리로 모였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실 때 처음 제자들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가르쳤습니다(행1:3).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요약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 28장의 마지막 내용이 사도행전 1장 8절의 내용과 만난다고 할 때 이 말씀은 승천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과, 승천을 앞두고 주님을 뵈옵는 자리에서조차 여전히 의심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뵙고서 경배는 하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그들이 주를 버리고 도망하게 된 것은 그만큼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경배하나 의심하는 자도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자신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권세로 내가 너희를 세워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럼 함께 하신다는 성격이 뭔가? 어떤 의미에서는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요, 오히려 담대 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의 마지막 말씀이 사도행전 1장 8절과 만난다고 할 때 거기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은 마치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것을 한 마디로 증인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증인이 되어 질 수 있는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입니다. 너희가 주체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표현하자면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있기 전에는 한없이 믿음이 작은 자로, 믿음이 연약한 자로 있었지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그들 안에 성령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특별한 성령의 임하심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좀 더 믿음에 있어서 성숙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정확하게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실 때 너희는 흩어지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바로 흩어진 너희를 세워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시느냐? 성령을 주셔서 너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내가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것으로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후 내용을 통해서도 우리가 확인하겠지만 인간 스스로가 나는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붙들 수 있는 힘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이후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33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3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35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가 동일하게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이요, 굳은 결심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이후에 있을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6장 56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마태복음 26장 69절 이하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부인할 때 그냥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맹세하고, 또 저주하기까지 하면서(막14:71) 그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굳은 결심, 확고한 의지로 대답했을지라도 그것을 이룰 힘이 인간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본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는 꾸밈없이, 진지한 감정 그대로 말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그릇된 확신 때문에 그것은 허풍이 되고 만다... 이 사건은 베드로가 자신을 철저하게 살피는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약속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자만의 도취상태를 역력하게 본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는 죄가 그들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보시기에 심지 좋은 모습으로 창조 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나 소요리문답, 대요리문답과 같은 내용을 보면 ‘원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그에 대한 형벌에 대한 부분을 보면 2항에서 “이 죄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원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져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원의’의 상태로 보는데, 제가 배운 바로는 칼빈의 경우 이 ‘원의’라는 표현을 거절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 전의 상태를 ‘원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없는 의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이 ‘원의’라는 말이 스콜라신학으로부터 온 정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지금 이 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칼빈의 견해를 따라 이 ‘원의’라는 말을 거절하면서도, 버젓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이나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에 표현되고 있다고 할 때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즉 개혁주의 안에서 ‘원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할 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이 말을 거절했다고 할 때, 그리고 그의 그런 정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원의’라는 말을 거절하는 대신 우리는 이것을 아예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죄로 인해 원의로부터 떨어졌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본래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에 있었지만 거기서부터 떨어져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쨌든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지령, 그것도 많은 금지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을 불순종하게 됨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같이 타락한 자 되었는데, 타락의 결과가 무엇인가?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롬3:10-12).
물론 제자들의 경우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고, 그러한 고백은 결코 거짓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수님 곁에 있던 제자들은 참된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사람들이요, 중생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따라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행보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가 큰가로 다투었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눈치를 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도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누가복음 22장 24절 이하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20절 이하 23절은 지난주 본문의 내용이고, 31절부터가 오늘 본문의 내용과 만나는데 그 사이에 이런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4-30) 다른 부분보다는 여기서도 저들은 다투었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 있었지만 그들은 늘 누가 큰가로 다투었고, 자기 자신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하자면 너보다는 내가 더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다투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이루어 낸 것처럼 그렇게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그들의 귀에만 들릴 뿐 마음에 새겨지지 못 했던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 알리시는 바는 무엇인가? 너희는 너희 스스로 자만하고, 너희 스스로 자신의 힘과 의지와 같은 것들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목숨을 내 놓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비록 중생된 자라 할지라도, 그리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매우 연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이 아니라 점과 흠으로 얼룩진 그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들은 전혀 우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참된 신앙을 고백할 때부터 드러내셨던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지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성경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따라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그들 자신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만한 어떤 조건이 있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담의 타락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 되었고, 타락한 자로서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시고, 믿음에 따른 고백을 하게 하시고, 지금도 연약하지만 그런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면서 이끌어 가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의 죄악 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내 의지가 확고부동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켜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향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다른 모든 제자들은 호언장담합니다. 내가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를 버릴지언정 내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그러나 호언장담한다고 해서 그 일이 이루어지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16장 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인간은 인격적 피조물입니다. 소위 지성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 밖에서 무엇 하나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절대로 없습니다.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이런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하나님은 창조주요 하나님 외 모든 것은 피조물인데, 인격적 피조물이라 하는 인간은 그 피조물의 성격을 버리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특징인데, 그것을 버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말하자면 의지조차 피조물인데, 마치 창조주와 같아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리는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매여서 그분의 뜻과 그분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인간의 연약함이 어떠한지를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비록 중생하였지만 중생하였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믿음을 소유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성도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철저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무엇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선한 열매를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성도의 실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날마다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제자들의 연약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기도하기는커녕 잠자는 자로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잡혀 고난을 받으실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미리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심각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미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이 그들 마음에 새겨지지 못한 것처럼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 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절과 34절을 보면 오늘 본문과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각오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통하여 너를 시험하고 또한 이 일을 통하여 너를 연단하여 세우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던 겁니다. 네가 나를 부인하겠지만,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겠지만, 부인한 사실로 인하여 믿음이 완전히 박탈되지 않도록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가룟 유다처럼 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오늘 본문의 시점에서는 배반할 것이지만, 너는 가룟 유다와는 달리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때문에 그때는 네게 주신 주의 은혜를 따라 네 형제를 굳게 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택자의 다름이 여기 있는 겁니다. 실제로 이 말씀처럼 베드로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이후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는 성도를 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였지만 성령 강림 사건이 있기까지는 여전히 무지한 자로 있었습니다. 여전히 연약한 자로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승천하는 자리에서조차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지금인지를 물었던 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지상 나라를 꿈꾸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의미에서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를 주관하실 때 그는 형제를 세우고 주께서 명하신 것처럼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도 그가 완전한 자로 세워졌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종종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주의 은혜 없이는 주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더더욱 철저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대를 보면 자존감을 세워주는 프로그램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위해서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쌓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만든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체요, 모든 일의 원인자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면 외적으로는 스펙 때문에 화려할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로만 떵떵거리는 제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제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자랑이 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감이 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힘이 되어 하나님을 뒤로 물러나도록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잠언 말씀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라는 사실입니다. 스펙을 쌓더라도 스펙이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 앉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요, 심지어 스펙을 쌓는 거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 열심과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열심을, 그런 노력을 누가 주셨는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빼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죄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분으로 계신 만큼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잠언 3장 6절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하시느냐?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말씀을 마치면서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 몇몇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연약성을 항상 명심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마땅하며 아무도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수준 이상의 것을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여러분들이 함부로 장담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장담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고보서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내가 장담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불안을 뒤흔들어 버리고 교만으로 가득하게 하는 나머지 기도에 대한 열심을 소멸시키는 지독한 경시를 삼가야겠다... 자신의 연약성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무모하게 적진으로 뛰어드는 술 취한 병사와 같다... 무분별한 열심보다 쉽게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섰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혹이라도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을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자로서 주 앞에 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