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유관순이야기”A Resistance
한국영화, 장르:드라마, 개봉:2019.02.27
감독,각본:조민호, 제작:디씨지플러스,조르바필름
주연:고아성,김새벽,김예은,정하담,류경수, 관객:1,068,341명(2019.03.12.)
1. 유관순(嚴福童,1902년12월16일~1920년9월28일)
1902년 12월16일, 유관순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3남2녀가운데 둘째딸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로부터 기독교 가정인 유관순은 3대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 “유중권”(柳重權)은 사회개혁과 부녀자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흥호학교”(興湖學校)에 참여하였다. 유관순은 경성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는 등 근대화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경성과 충남 공주간 교통로가 활발한 목천군은 선교사들이 복음전파에 많은 정성을 쏟은 곳이다. 1901년, 지령리에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교회가 동참하자 11월, 일본군이 교회를 불태워 버렸다. 1908년,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가 “케이블”(E.M.Cable,奇怡富)선교사의 후원으로 “조인원”과 함께 “지령리교회”를 재건축하였고 유관순도 유아기에 이 교회를 출석하였다. 1916년, 지령리 교회를 순회하던 “샤프”(Alice Hammond Sharp,史愛理施)선교사에 의해 유관순은 교비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한다. 1918년 3월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한 유관순은 “이문회”(以文會)에 가입하여 매일 오후3시,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에 참여하였다.
1919년 1월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스스로 상복을 입고 휴교하였으며 2월28일, 전교생이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1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과 노예달은 파고다공원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하고, 유관순은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등 “5인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문에서 망곡(望哭)한후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3월5일, 학생연합시위대가 거리에 나서자 학교측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참가하여 신특실, 유점선, 노예달이 검거되고 김독실 선생은 투옥되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지만 곧 바로 석방되었다. 3월10일, 전국적으로 강제 휴교령이 반포되었다. 3월13일,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마을 어른들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병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한다. 4월1일, 조인원, 유중권, 유중무 등 수천명이 참여한 병천시장의 이른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의 부모와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유관순은 현장에서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공주영명학교 만세운동의 주동자인 친오빠 유우석도 함께 수감되었다. 5월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6월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는다. 일본제국의 재판권 자체를 부인하였던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920년 3월1일, 오후2시 “삼일운동1주년 기념 옥중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천명의 수감자들이 외친 만세소리가 감옥밖으로 퍼져 나갔고, 이 일로 형무소 주위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전차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긴급 출동하는 등 일본경찰을 충격에 빠뜨렸다. 1920년 4월28일, 영친왕의 결혼기념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가 1년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오전8시20분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이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거부하였다. 이에 학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가 미국언론에 이 사실을 알려 공포하겠다고 말하자 은밀하게 장례를 한다는 조건으로 시신을 인계하였다. 1920년 10월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왔으며, 10월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치했다. 그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기지로 개발하면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였으나 실전되었고 현재는 충남 천안시 매봉산에 초혼묘가 봉안되어 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9년, 삼일운동100주년을 기념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하였다.
2. 영화 “항거:유관순이야기”
기독교 가정인 유관순의 고향집에서 기독교인 다운 식사가 시작된다. 기도중에 밥 한숟갈을 먼저 입에 넣는 아이와 벌레가 무서워 하는 오빠 대신 벌레를 잡는 유관순의 가정은 평화롭기만 하다. 어느날 일본 경찰이 유관순의 집에 순찰을 하고 아버지 “유중권”(최무성역)과 오빠 “유우석”(심태영역)이 맞서는 사이에 유관순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들고 뒷담을 넘어 도망간다. 유관순은 4월1일, 병천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현장을 급습한 일본경찰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틈을 노리며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다. 그렇게 유관순은 그 자리에서 부모를 모두 잃어 버린다.
1919년, 일본경찰이 서대문형무소로 여자죄수를 이송해 온다. 여옥사 “간수”(이수연역)가 죄수를 인계받아 남자 간수와 함께 여죄수를 기록 한다. 수인번호 371번, 폭행을 당하여 얼굴이 부은 여죄수의 이름은 “유관순”(고아성역)이다. 여옥사 8번방에 수감된 유관순은 25명의 죄수들이 옆으로 누울 자리 조차 없이 비좁은 방을 보며 매우 놀란다. 어릴때부터 보고 자랐던 “만석 어머니”(김남진역)도 옥방에 갇혀 있었다. 만석 어머니가 유관순을 보며 독립만세운동으로 아들이 죽었다면서 되려 유관순을 원망한다. 이때, 기생출신 “김향화”(김새벽역)가 독립만세운동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면서 유관순을 변호하고 나선다. 소란이 끝난 후 누워 있던 사람들이 약속하듯이 모두가 함께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아리랑을 부르고 모두가 힘을 모아 아리랑이 감옥 밖으로 퍼져 나간다. 놀란 여옥사 간수가 조용히 하라고 경고음을 보낸 후에야 8번방 감옥은 다시 조용해 진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개구리 같다고 유관순이 말한다. 다같이 노래(개굴개굴,만세만세) 하다가도 누군가(사람,일본경찰) 오면 (개굴개굴,만세)를 멈춘다는 말이다.
조선인 간수 “니시다”(류경수역), 한국명 “정춘영”에게 “형무소장”(이영석역)이 일본어로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라고 할수 있는 개구리 주동자를 찾아내라고 명령한다. 이에 곧바로 “이옥이”(정하담역)가 걸려들자 유관순과 다른 언니들이 모두 나서서 니시다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건강검진이라는 명목의 일대일 면담에서 방에 있던 임산부 수감자들에게 감옥에서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특혜를 미끼로 유관순을 고발하게 한다. 손목으로 허공에 유관순을 매달아 놓은 간수들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여자로서의 모멸감과 함께 추악한 수치심을 주는 고문을 한다. 또한 세워 놓은 관속에 유관순을 가두어 놓고 일주일을 지내도록 한다. 일주일이 지난후 관을 열어주며 걸어 가라고 하지만 걸을 수 조차 없는 유관순은 산송장처럼 쓰러져 버린다.
유관순은 부모님 기일과 삼일만세운동 1주년에 옥중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유관순은 모범수들만 하는 빨래일을 한다. 양잿물을 만져야 해서 손은 엉망이고 밥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다. 감옥에서 날짜를 알지 못해 니시다에게 날짜를 알려 달라고 말한다. 유관순이 무엇인가 계획을 갖고 있는 듯 하자 8번방 언니들이 일단은 감옥에서 나간 다음 하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 보다 무엇을 하는 것이 낫다고 신념을 밝힌다. 스스로에게 애절한 사연이 있어서 만세를 외친 것이 아니다. 무슨 애국애족과 같은 신념이 투철해서 만세를 부른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자격도 없지만 유관순은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싶은 보통의 국민일 뿐이다. 결국, 1주년이 되는 날, 유관순은 빨래 노역장에서 힘겨워 쓰러지는 척 하여 방으로 돌아 온 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8번방에 있던 사람들과 다른 방 수감자들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우레같은 소리에 놀란 형무소 밖의 사람들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기적같은 일이 현실이 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간수들이 순간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니시다가 사건 당일 유관순이 노역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주동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받는다. 유관순이 고문을 받는 동안 특별사면으로 8번방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지만 유관순은 예외다. 손톱을 뜯어내고 배를 발로 차 방광과 자궁을 파열 시키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그후 석방된 오빠와 김향화가 면회를 왔지만 유관순은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영친왕의 결혼으로 특별사면 기회를 얻어 형기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지만 유관순은 “나는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았으니 너희가 마음대로 정한 형량이 반으로 줄어들든 말든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유관순은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이어간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다른 동료 노역자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요?”라고 묻는다. 유관순은 말한다. "그럼, 누가 합니까?“
영화는 끝이 났다. 아무도 일어나 극장을 나갈수 없게 되었다. 석별의 정 노래가 이토록 가슴 아프게 절절히 다가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순국 열사들의 사진이 한 컷씩 올라 가는데, 일본의 야만적 행위앞에선 증인들이 한명씩 죽어가는데 일본은 아직도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야 한다. 유관순은 그리스도인 답게 살았으며 독립선열답게 살았다. 유관순을 죽일수는 있었지만 굴복시킬 수 없는 그녀의 신념은 결국 살아서 승리한 것이다. 유관순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한다. 잘못된 역사, 잘못된 친일의 청산, 왜곡된 역사의 굴절을 바로 잡는 일, “그럼, 누가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