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도 스토리 제 3탄
★ 계속 반복되는 일상 속 년초 겨울로 기억된다. 하숙집 앞 슈퍼 안
★ 우연히 낡은 해적판 방송금지곡 수록 테이프 하나를 발견한다.
★ A면 첫 번째 곡에 “사랑하고 있어요"가 수록되어 있었고,
나머지 테이프에 있었던 수록곡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 원곡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실로 12-3년만에 우연한 조우다.
★ 눈이 번쩍 뜨인다. 이 기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시 이렇게 기뻤을까?
★ 길다란 머리카락 소유자였던 슈퍼 아가씨, 얼굴이 빨개지며, 웃으며 빌려준다.
★ 빌려다가 하숙집 세이코 녹음기로 약 1주일은 반복으로 들었던 것 같다.
★ 금지 당시 일본 엔카가수 미하시 미찌야 노래 표절곡으로 방송금지되어 있었는데,
★ 곡 전주곡 진행시 트럼펫/섹스폰 음량의 페이드 인 효과는 단연 압권이고,
★ 솜사탕같은 목소리와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바 여기엔 언급이 회피된다.
★ 낭랑한 무결점의 초기 목소리에 들을수록 진국이 흘러나오는 매력 만점의 곡이다.
★ 50년대 말, 故 미하시 미찌야 대표곡중의 하나 올립니다. 곡명: 오사라바다 도쿄(안녕! 도쿄)
★ 남진님 노래는 mp3가 업로드가 되질 않아 고육책입니다. wma파일로 올립니다.
나훈아, 배호와 함께 60년대 트로트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대중음악, 영화계의 슈퍼스타.
TBC 방송국의 TV공중파 송출을 시작으로 연예산업이 본격적인 국면을 맞던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한 19세의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비교될 만큼 수려한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 경쾌한 몸짓을 선보이면서 TV시대 최고스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5대 국회의원이었고, 호남매일신문 사장, 정미소 등의 사업을 했던 갑부 사업가 김문옥의 장남으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겪은 이 청년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가족 몰래 상경한 목포고등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작곡가 한동훈의 지원 속에 출반된 첫 음반에 담긴 그의 미성은 당시 현미, 한명숙, 최희준 등 허스키한 목소리의 유행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고, 부모의 반대에 밀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면서 다시 상경했다. 타고난 연희적(演戱的) 본능과 수려한 용모로 이미 대학계의 스타가 되어버린 그를 더 이상 제지할 수 없었던 모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그리고 66년 12월에 발표한 김영광 작곡의 <울려고 내가 왔나>는 보름만에 7,000장이 팔려나가는 기록적인 매출을 보였고, 트로트, 왈츠, 블루스, 차차, 트위스트 등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섭렵하면서 그가 보여준 다양한 의상컨셉과 독특한 몸짓은 비쥬얼 퍼포먼스가 부족했던 당대 대중음악의 관행에 일대 파격을 가하며 일거에 오빠부대라는 새로운 팬문화를 형성시키기에 이른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왜색시비로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67년 박춘석의 곡으로 취입한 <가슴 아프게>는 전작을 압도하는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이 음반의 출시 1달 만에 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를 누리고 전국 레코드 판매 1위에 등극했고, 그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그가 만들어낸 연예산업계의 광풍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히트곡의 <울려고 내가 왔나>와 <가슴 아프게>의 이름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꽃미남 남진을 주연으로 캐스팅했으며, 이후 <형수>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으면서 수많은 여배우와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968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69년 7월 월남에 파병되었다. 2년 간 북부 베트남에서 청룡부대 2대대 5중대2소대 소총수로 복무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1969년, TBC는 파병 중인 그에게 방송가요 대상 남자 가수상을 시상했는가 하면, 그의 귀국을 기다릴 수 없었던 지구레코드는 그의 미발표곡이었던 <청춘> <파도의 블루스> 등을 묶어 신보를 발표할 정도였다.
이 시기에 그의 일생의 라이벌이 될 나훈아는 남진이 사라진 무주공산(無主空山)의 대중음악계에서 최고의 스타로 약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한 남진은 70년 11월, 신보 <사랑이 스쳐간 상처>를 발표하면서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차트 정상에 올랐다. 이것이 한국대중음악사상 최대 라이벌인 남진, 나훈아 대결의 서막이었다.
71년 6월 제대하여 귀국한 남진은 <마음이 약해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9월, '귀국 리사이틀'을 무대에 올렸다. 이 단 한번 공연으로 포크, 록에 밀려 고전하던 트로트계는 고무되었고, 공연시장의 불황이 회복되었을 정도였으니 그 성황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바로 다음달인 10월 경쟁적으로 개최된 <나훈아 리사이틀> 역시 관객동원인원이 화제에 오르면서 완전매진사례를 기록하면서 대중음악계는 활력을 되찾았다. 이해 남진은 공백기에 대한 세간의 우려와 예상을 예상을 뒤엎고 나훈아를 누르고 MBC 가수왕에 등극했다.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언론의 부채질 속에서 지나치게 과열되어 팬들 사이의 폭력사태로 비화되는 등 많은 해프닝을 낳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경쟁은 대중음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시장규모의 측면에서도 대대적인 확대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71년 한국 무대 예술 대상, 71ㆍ72ㆍ73년 MBC가수왕, 67ㆍ71ㆍ72ㆍ73ㆍ74ㆍ75년 10대 가수상 선정 등 70년대 중반까지 화려한 수상 퍼레이드는 그의 인기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그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박춘석과 정두수의 합작품이었고, 특히 그를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아꼈던 박춘석은 74년 1월 레코드 계의 혁명이라 불렸던 '박춘석 프로덕션'의 설립 이후, 이미자 등과 함께 스승의 권유로 대도 레코드사와 전속계약하면서 판매량에 따라 개런티를 받는 최초의 인세 뮤지션이 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랑하고 있어요><별아 내가슴에><미워도 다시한번><임과 함께><그대여 변치마오><지금 그 사람은><빈잔><둥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의 히트넘버들은 그에게 평범한 삶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의 인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사건의 연속이었고, 각본없는 드라마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육탄공세와 수많은 스캔들의 끝에서 결혼한 윤복희와의 3년 7개월을 결혼생활이 만들어낸 수많은 특종뿐만 아니라, 팬에 의한 피습, 폭력사건 등 무수한 기사거리를 제공했던 그의 삶은 말그대로 뉴스메이커 자체였다. 그러나 89년 11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20대 청년 3명에게 긴 칼로 허벅지 하단부를 관통 당하는 피습을 당한 후, 절치부심한 남진은 방송 출연과 음반 홍보를 자제하면서 평온한 삶을 되찾기 시작했고, 세간이 주목이 잠잠해진 후에도 조용히 꾸준한 음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91년에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2000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연예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대중예술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첫댓글 행크 윌리엄스 의 1953 발매곡. YOUR CHEATIN' HEART. 네킹콜도 불렀음. 유아 치틴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