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2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살았던 당대의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과 심판의 예고에 대한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물론 유다 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흥망성쇠에 대한 예언의 말씀도 담겨 있습니다. 39장까지의 긴 하나님의 말씀 모음 속에는 죄에 대한 통렬한 지적과 하나님의 탄식과 무서운 심판과 전 지구적인 멸망의 위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도 소금이나 보석처럼 뿌려져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심판적 예언 중에 우리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앗수르 제국의 침략과 멸망이 실현되고 남 유다는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망하지 않지만, 결국은 그 뒤에 일어나는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도 들었습니다. 이로써 모세에게 주셨던 선민 계약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보면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을 계속 어기게 되면 결국 먼 나라에서 독수리같이 날아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심판할 것이요 먼 이방 나라로 끌어갈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긍휼히 여기시고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그들을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언약을 주신 바 있습니다. 그 언약과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유다가 망하게 되고 그 백성이 끌려가게 될 것에 대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39장의 후반부에 나온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선포할 때가 주전 700년이요 그 후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때가 주전 586년이요 그리고 바벨론에 끌려간 지 70년 기약이 찬 후에 다시 돌아오니, 이사야의 예언은 그야말로 약 200년 뒤에 그대로 성취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선지자는 더 이상 현실 세계 속에서 동족 유다의 죄를 지적하거나 그들의 무감각함을 책망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신성한 영감을 받아서 그는 이제 장차 유다 백성들이 고생스런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새로워진 세상에서 평강과 위로를 누리는 세상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하여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일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실 더 놀랍고 위대한 새로워진 하늘과 새로워진 땅과 새로워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주는 미래는 단지 시간 세계에 머물지 않고 영원 세계로 펼쳐져나갑니다. 그러한 내용이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 이어지는 장대하고 영광스러운 이사야의 예언 말씀의 대략적인 소개입니다. 이렇듯 장대한 예언은 사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흔치 않을 정도입니다. 다윗, 다니엘, 스가랴,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예언도 있고 신약 시대에 사도 요한의 계시록도 있지만 참으로 이사야의 예언은 매우 장엄하고 거대한 규모의 하나님의 역사를 담고 있는 대하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앞으로 이 메시지를 살펴보면서 신약 시대에 그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또 하나님 백성들에게 어떻게 그 예언이 성취될 것인가를 비교하여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 만사를 다스리고 경영하고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가시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영원전부터 영원까지의 작정하심이 있었고, 그것을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가는 것을 보고 그의 신실하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이제 오늘 읽은 부분의 말씀을 잠시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40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들인 예언자들을 불러서 당부하기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원문에 보면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은 죄에 대한 책망과 무서운 위협과 한탄과 각 나라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계속 하신 것과 달리 여기서 갑자기 논조와 메시지가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로하다’는 말씀은 격려와 소망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위로하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같은 말을 서두에 반복하신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마음이 절실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생각할 때, 선지자가 말씀만을 입을 열어 전할 때 전쟁과 저주와 심판만을 예고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죄를 깨닫고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경고한 대로 심판의 채찍과 막대기를 휘두르신 것 역시 사실은 자기 백성을 죽이려는 것이 본심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애가 3:3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칠십년 동안 고생살이 하게 하신 것도 그들을 고생하다가 망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9:10 이하에서도 하나님께서 혼란과 전쟁의 불안 속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백성들이 끌려갈 것을 예고하시면서도, 자기 뜻을 이렇게 분명히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소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0~13)
이처럼 하나님의 본심 깊은 곳에는 항상 자기 백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변함없는 긍휼이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북 이스라엘 백성인 에브라임 지파를 심히 책망하여 괴롭게 하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괴로워서 어찌할 바 모르는 부모의 마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이 부를수록 더 물러가며 그들을 안고 고치려고 애쓸수록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하며 끝끝내 물러갔을 때 징계의 채찍과 막대기로 그들을 때리시면서도 그의 마음의 본심은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이렇게 토로한 바 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함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가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며 온 세상을 다 멸하실 것처럼 진노하실지라도 그 본심은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속으로 울고 계시며, 때리시면서도 아파하시고, 조금만 돌이켜도 금방 그 무서운 진노 대신에 자비와 긍휼로 관 씌우시는 인애와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지난날의 죄에 대하여 우리의 죄를 철필로 새기고 영원히 잊지 아니하며 우리의 악에 대하여 영원히 분노할 자로 알고 두려워하고 물러가는 자가 되지 맙시다. 그는 자기 백성의 마음이 혹시라도 깊이 상할까 겁을 내시며 염려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 백성을 향하여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많은 일들이 이처럼 상하고 찢긴 영혼들,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절대로 죄를 용서해주지 아니하시는 엄격한 분으로 알고 감히 나오지 못하고 눌린 영혼들을 향하여 위로자요 격려자로 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예수님을 만난 자는 그의 얼굴과 어조와 말씀을 통하여 다들 소생함을 얻었으니, 곧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그러하며, 소문난 죄인 되었던 여인이 그러하며, 돈만 바로보고 살아왔으나 뒤늦게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진리를 찾으나 부끄러움 때문에 감히 찾아나서지 못하고 몰래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세리장 삭개오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들 모두에게 한없는 위로자로 오셨지 않습니까? 그들의 상한 마음을 감싸주시고 무거운 짐을 벗겨주셨고, 그들의 고단함을 내려놓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고단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담 이래로 우리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얻게 된 삶의 고단한 무게에 눌려 신음하며 허무감에 시달리면서 헛된 것을 추구하나 만족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진노와 심판의 불길만이 마음에 치솟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로 보시고 그 짐을 함께 짐지시고 그 멍에를 가볍게 하시려고 친히 우리 곁에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2절을 함께 읽어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고생한 것을 다 알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노역’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노역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짜봐’인데, 군대 생활의 복무 기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그 때부터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의 입영 훈련 기간이 70년이었는데, 그 복무 기간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를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 역시 70이요 강건하면 80입니다. 그러나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임을 하나님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과 더불어 그가 보내신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의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도 바로 위로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행한 죄가 있더라도 그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고 연단을 받아 노역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만 그렇다고 그 죄를 하나님은 사해주시는 분입니다. 시편 99:8 말씀에 그에 대하여 이렇게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용서해주시고 그 고생한 것에 대하여서도 죄값으로 당한 것이니 고생 좀 실컷 하라고 좋아하시고 조롱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슴 아파하며 안타까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천년 전에 오셔서 그토록 사랑 많으신 목자로서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애가 끓으셨던 우리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그러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의 따뜻한 위로를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와 여러 선지자들에게 당부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와닿도록 마음에다가 정다히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와닿고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위로해주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을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대변하여 따뜻하게 전달해주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위로의 마음을 전달 못할까봐 그렇게 자상하게 명하기까지 하실 만큼 하나님은 우리가 위로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하나님에 대하여 항상 그분은 분노로 가득찬 하나님이시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러할 뿐입니다. 그러한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그 죄로 인하여 우리가 망할까 죄값을 치르게 될까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가 채직과 막대기로 우리를 때리시는 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요 사실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함이라고 시편 23:4 말씀에도 나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안위하다’는 말이 ‘위로하다’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사실 우리를 위로하며 지키며 보존하시는 사랑 가득한 것입니다. 그분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우리를 때리셨지만 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로 위로받고 용기를 내어 우리 심령이 상하지 않고 더 가까이 주님께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위로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힘을 얻고 용기를 내어 이 노역의 때를 용기를 가지고 순례길을 계속 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