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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 국수의 디아스포라, 6·25 전쟁] 60년 전 그때 그 시절, 피난민의 도시 부산은 뭐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고 그 와중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역시 같은 처지였다. 실업난·주택난에 남자들이 허둥거릴 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그 집안의 아낙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좌판에 차려진 것은 그네들 고향 음식을 닮았지만 어딘가 낯선 먹거리였다. 이북식 메밀 냉면은 밀가루를 만나 밀면이 되었고 합천·밀양·함안 출신 할매들이 끓여낸 돼지국밥은 이제는 모두 부산 음식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음식, 구포 국수가 있다. 국수는 그 면발의 생김새 덕분에 장수와 인연, 자손의 번영과 희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국수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축제 때 성황을 누리던 음식이었다. 그런 국수가 전쟁이 한창인 부산에서 피난민의 밥상에 오른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국수를 어떻게 기억할까. 실향과 이산의 슬픔으로 말라버린 눈물샘을 간간하게 적셔주던 짭조름한 국물과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정도의 끈기를 지닌 면발로 피난민들의 지친 삶을 위로하지 않았을까. 피난민이 불어나면 국수 면발도 불어나던 시절, 구포 국수의 전성기는 시작되었지만 그 탄생의 순간은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길 따라 사통팔달(四通八達)이 가능했던 구포의 내력은 17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시대 구포는 상주의 낙동진(洛東津), 합천 율지의 밤마리 나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나루인 감동진(甘同津)의 소재지였다. 경상도 일대에서 현물로 거둬들인 공물과 현물세를 인천을 거쳐 서울로 올리던 남창(南倉)이 있던 구포는 상주 인구 1,500명을 자랑하던 거점 포구였다. 사시사철 명지 염전의 소금을 실은 돛단배가 낙동강을 따라 대구와 안동으로 올라갔고, 가을 녘이면 내려오는 배편으로 실려 온 쌀과 곡물이 구포 나루에 부려졌다. 그리고 개항 이후 구포는 대일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일감을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인부들로 들썩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 선창 노래」는 구포 나루에 닿은 배에서 나락을 내리고 정미소에 나온 쌀을 수출선에 싣는 인부들의 노동요이다. 쉴 새 없이 나루에 접안하는 돛단배마다 걸쳐진 배다리를 위태위태 걸어가면서도 흥에 겨워 부르던 노랫가락에서 사람과 물자로 넘쳐 나던 구포 나루의 번영을 읽을 수 있다. 개항기 포구 도시로 명성을 이어간 감동진 구포 나루는 경부선 구포역이 들어서면서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으로의 곡물 반출을 위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생산된 곡물들이 대량으로 구포에 집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포역에는 증가하는 곡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구포 둑을 따라 집하장과 도정 시설들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시기 구포에는 예전에는 취급하지 않던 곡물이 대거 반입되기 시작했으니 다름 아닌 밀이었다. 일제 강점기라 하더라도 제분업이나 제면업은 조선인에게는 색다른 사업이었고, 그 재료인 밀가루뿐만 아니라 국수 역시 여전히 낯선 음식이었다. |